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 인문학계에서 매체이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구텐베르크 은하계 혹은 인쇄 매체, 선형적 문자 매체 등의 용어가 더 이상 생소하지만은 않다. 이미 마셜 맥루언이나 월터 옹의 매체이론이 널리 알려진 터라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노르베르트 볼츠 지음, 윤종석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라는 책 제목이 심지어 식상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 그러한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결론만 놓고 보자면 분명 뉴미디어가 과거의 인쇄 매체에 바탕을 둔 구텐베르크-은하계를 벗어나서 새로운 형세를 창출하고 있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특징은 이러한 새로운 형세의 출현 과정을 철학적인 담론을 통해서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현란하면서도 현학적으로 사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매체이론과 관련하여 국내의 많은 학자들이 볼츠를 언급하고는 있지만, 정작 뉴미디어의 일반적 특성과 관련한 피상적인 언급만 발견될 뿐이다. 심지어 매체철학 혹은 매체미학에 대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조차도 볼츠의 책에 전제된 철학적 담론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노르베르트 볼츠 지음, 윤종석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
저자가 직접 쓴 한국어판 서문만 잘 읽어보더라도 이 책을 관통하는 커다란 사상적 실타래가 단순히 맥루언이나 옹처럼 뉴미디어의 특성을 분석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저자는 서문의 첫 부분부터 이 책에 깔린 기본적인 사상적 체계를 위르겐 하버마스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과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이론의 대립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일관성 있게 고수하는 입장은 하버마스에 대한 거부감과 루만의 체계이론에 대한 우호감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이 책에서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게 된다.
이 책이 제목에서 암시하는 바의 다소 진부한 내용으로 채워질 것이라고 예상하여 사람들이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의 밑바탕에 깔린 혹은 명시적으로 언급되는 철학적 담론들을 간파하지 못한 채 피상적으로 볼츠만을 언급한 이른바 매체철학 연구자들의 잘못도 있을 것이다.
하버마스를 등지고 루만을 선택한 이유는? – 대화란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버마스 사상의 핵심이 커뮤니케이션, 즉 의사소통이라는 점에는 이의의 여지가 없다. 비판이론의 계승자인 하버마스에 따르면 개선된 사회란 개방적이고도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회이며, 이는 달리 말해서 열린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사회를 의미한다. 따라서 하버마스에게 대화란 단순히 사적인 영역이 아닌 공적인 영역이며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는 기초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믿음이 깔려있다.
현실 사회에서 대화는 얼마든지 왜곡되고 비이성적인 형태로 발생할 수 있지만, 그러한 왜곡과 비이성은 인위적인 산물이다. 비록 현실에서 이러한 왜곡이 완전히 제거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모든 대화는 이러한 왜곡과 비이성이 제거된 이상적인 대화 상태를 준거점으로 전제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버마스는 이러한 이상적인 대화의 모델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화용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볼츠가 보기에 하버마스의 이러한 주장은 이상적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며 비현실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버마스의 이론적 준거점인 이상적인 대화 상태가 애초에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대화에 참여하는 두 사람이 대화를 통해서 일치에 도달한다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경험을 잘 숙고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또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가족이나 배우자에게서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벽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며 자신의 생각을 서로 주고받으며 소통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방식대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상대방도 자기가 이해한 방식대로 이해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어디까지나 믿음일 뿐이다. 하버마스의 이상적인 대화 상황이란 이러한 믿음을 추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버마스와 달리 루만에게 대화란 오히려 대화의 불가능성 때문에 만들어진 가교에 불과하다. 원초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이란 불가능하다. 다른 어느 누구도 나의 마음을 알 수 없으며, 내가 아무리 그것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고자 할지라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할 뿐이다. 따라서 루만이 보기에 커뮤니케이션의 과정 자체는 블랙박스와도 같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대화란 서로 알 수 없는 참여자들 간에 블랙박스 과정에서 일어나는 행위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소통을 해야 하는 이유는 소통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소통은 인간이 살기 위한 하나의 체계에 불과하다. 루만이 보기에 이성적인 주체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대화이자 소통이라는 하버마스의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가령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나 선생과 학생의 대화는 대화의 체계에 앞서서 존재하는 두 이성적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와 아들 혹은 선생과 학생이란 가족이란 소통 체계와 학교 제도라는 소통 체계의 산물이며 그 체계를 형성하는 두 항일 뿐이다. 따라서 루만에 의하면 커뮤니케이션이란 그에 앞서 주어진 주체들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커뮤니케이션 그 자체의 산물일 뿐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 커뮤니케이션할 따름이다.
이성 혹은 부정성이란 한갓 디지털의 이진법에 불과
비판이론 2세대인 하버마스는 1세대인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와 달리 미디어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는 계몽주의 이후 이성이 오히려 도구화되었으며 20세기 이후 이러한 이성의 도구화는 대중매체를 통해서 극으로 치닫게 된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반해서 하버마스는 1세대 비판이론가들이 그렇게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근대 사회에서 오히려 이성의 힘이 공론장을 형성하는 형태로 긍정적인 모습을 취한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일상의 세계인 생활세계의 영역에서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나 체계성이 배제될 경우 공론장을 형성하는 이성의 비판적 기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볼츠에 따르면 1세대로부터 2세대에 이르기까지 비판이론을 관통하는 이성의 '부정성'이라는 것 자체가 위대한 인간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에 불과하다. 헤겔의 변증법을 계승한 비판이론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긍하지 않고 부정하는 힘이야말로 이성의 위대함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은 사실상 있음에 대한 없음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표식에 지나지 않으며 어떤 것에 대한 긍정이나 지시를 나타낸다. 가령 정신분석학에서 피분석자가 의사(분석가)의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하는 경우 그것은 진짜 부정이 아닌 무의식적인 증상을 은폐하고자 하는 행위이며 궁극적으로 의사에게 그것은 무의식의 징후이자 지시이다. 어쩌면 부정은 레비스트로스가 문화를 탄생시킨 기저를 '양항대립'으로 보았던 것처럼 있음에 대한 없음과 같은 이진법의 코드를 만들어내는 가장 단순한 메커니즘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자면 하버마스가 계승하고 있는 그 위대한 전통인 부정이라는 사유의 힘은 궁극적으로 +와 –라는 양항을 만들어내는 소통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단순한 원리일지도 모른다. 선천적으로 이성적 판단능력이라는 잠재력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에 대한 믿음과 부정적 사유의 위대함은 볼츠의 이 책에서 그저 소통의 체계를 만들어내는 가장 단순한 원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사실상 –라는 것이 –가 아닌 +에 대한 대립적 기호이며 동일한 것을 지칭한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설적인 체계야말로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이란 원래부터 소통 불가능한 것을 소통하게 하는 모순적인 체계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볼츠는 화폐라는 것 자체도 소통을 위한 하나의 중립적인 미디어일 뿐 비판이론가들의 주장처럼 이성을 왜곡시키고 생활세계를 뒤틀리게 만드는 악의 화신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화폐 또한 다른 소통체계와 마찬가지로 그저 모순적인 구조를 지닌 소통체계에 불과하다. 볼츠는 화폐란 재화를 잉여와 희소성이라는 모순적인 체계, 즉 잉여라는 +와 희소성이라는 – 기호에 의한 소통체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재화가 잉여상태에 있지 않다면 화폐란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인 잉여상태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면 화폐의 필요성은 제기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모순적인 소통의 체계를 만드는 것이 화폐이다. 화폐란 미디어로서 하나의 소통체계를 암시할 뿐이다. 그러한 소통체계에서 어느 항은 구매자가 되며 다른 항은 판매자가 될 것이며, 어느 항은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가 되며 다른 항은 노동자가 될 것이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가 소통할 뿐이다.
디지털의 세계는 말레비치의 캔버스다
러시아의 화가 카시미르 말레비치의 회화는 슈프레마티즘(suprematism)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말은 흔히 절대주의라고도 번역되는데 이것이 암시하는 의미는 어떤 한정된 대상이 아닌 절대적인 대상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것은 '흰 배경 위의 사각형'이다.
이 고도로 추상화된 화면은 매우 역설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먼저 흰 배경에 사각형을 그린 것은 말레비치가 자신의 그림에서 어떠한 구체적인 대상도 묘사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어떤 현실적인 대상을 묘사할 경우 그것은 궁극적으로 현실에 대한 왜곡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각형은 대상의 말소, 즉 부정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대상 자체가 없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무일 것이다. 이러한 절대적인 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각형은 어떠한 대상으로도 치환될 수 있는, 그러나 현실 대상의 단순한 묘사가 아닌 그러한 대상이다. 따라서 이는 현실에 대한 구속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제 사각형이라는 대상은 현실의 재현이 아닌 구성된 대상이며, 말레비치의 캔버스는 구성되고 기획된 세계를 암시한다.
볼츠는 말레비치의 캔버스를 정확하게 디지털의 세계에 대한 은유로 읽는다. 디지털 미디어는 +와 –라는 전기신호를 0과 1이라는 기호로 대체함으로써 수많은 소통의 체계를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도 있으며 음을 만들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이제 기호는 현실의 재현이라는 도상적 제한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며, 디지털 세계는 말레비치의 캔버스처럼 투사되고 기획된 세계이다. 더군다나 이미지나 문자, 소리와 같은 모든 정보가 궁극적으로는 디지털 단위의 알고리즘으로 창출되기 때문에 이 상이한 기호들 간의 인터페이스조차 가능하다. 말하자면 소리신호를 형태로 바꾼다든지 워드 작업된 문서 파일을 소리로 재생하는 것은 이론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워드로 시를 쓰면 그것이 동시에 음악으로 연주되는 것이 가능하다. 구체시를 추구했던 아폴리네르의 꿈은 오래지 않아 한갓 놀이에 불과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뉴미디어의 세계는 이렇게 세계의 재현이라는 인쇄 매체의 패러다임, 즉 구텐베르크의 은하계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창조인지 혹은 세계의 상실인지에 대해서는 판단할 길이 없다. 볼츠 역시 이 책에서 이에 대한 대답을 회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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