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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보다 馬이 더 좋은 남자, 인간이길 포기하다!

[금정연의 '요설']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④

☞금정연의 '요설' 지난 호 바로 가기 : 걸리버 여행기③ 네가 어디에 있든, "인간은 정말 혐오스러워!"

<제11장>
마지막 항해를 떠난 걸리버는 말들의 나라에 표류한다. 휴이넘과 만난 걸리버는 마침내 인간이길 포기한다.


걸리버의 마지막 항해를 따라 나서기에 앞서 그간의 여정을 되짚어보자.

첫 번째 항해. 외과의사 자격으로 배에 오른 서른일곱의 걸리버는 폭풍우에 휘말린다. 파선된 배에서 홀로 살아남은 걸리버는 얄궂은 운명의 장난으로 릴리푸트에 당도한다. 작은 사람들에게 생포된 걸리버. 커다란 덩치 덕에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정치판에 끼게 된 걸리버는 작은 사람들의 사회를 가까이에서 관찰한다. 크기만 다를 뿐 그가 떠나온 영국 사회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우스꽝스러운 작은 사람들의 행태를 비웃는다. 비록 영어의 몸이었지만 신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큰 남자'가 된 듯한 기분에 걸리버는 제법 우쭐하다.

▲ <걸리버 여행기>(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문학수첩 펴냄). ⓒ문학수첩
두 번째 항해. 마흔의 걸리버는 역시 외과의사 자격으로 배를 타고, 또 다시 폭풍우에 휘말린다. 물을 찾아 상륙한 브롭딩낵에서 다른 선원들이 모두 도망가는 바람에 홀로 남은 걸리버는 거인들의 손아귀(말 그대로)에 들어간다. 작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는 벌레 취급을 당하는 걸리버. 그는 현명한 거인 왕의 치세에 감탄하는 한편, 사랑하는 조국의 영광을 위해 필사적으로 인류 문명을 변호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인류가 이룩한 모든 진보는 하찮은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뿐이다. 의기소침해진 걸리버의 마음속에 인간에 대한 회의가 싹튼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 <걸리버 여행기>의 전말이다. 그리하여 영국으로 돌아온 걸리버는 여행기를 써서 부자가 되었고, 인간에 대한 회의는 까맣게 잊은 채 가족과 함께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이야기. 하지만 아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걸리버는 세 번째 항해를 떠난다. <걸리버 여행기>가 동화가 아닌 소설이 되는 순간이다.

세 번째 항해. 두 명의 조수를 둔 외과 과장(급료도 두 배)이 된 걸리버의 나이는 마흔넷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폭풍우는 그를 비켜가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낯선 바다에서 해적선을 만난다. 배에서 쫓겨난 걸리버는 작은 보트에 실려 망망대해를 표류하다 작은 섬에 도달하고, 삶을 포기하려는 순간 하늘을 나는 섬을 발견한다. 반복된 수난에 지친 탓일까. 그전까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역설과 풍자에 의지하던 걸리버는, 라퓨타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당대의 영국 사회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수학과 음악에 미친 귀족들을 비난하고, 쓸모없는 연구에 매달리는 과학자들을 비난하고, 품행이 단정하지 못한 부인들을 비난하고, 오쟁이 진 남편들을 비난하고, 과거의 유령들을 등장시켜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인류 역사를 비난하는 한편 불사의 인간들을 통해 인간성 자체를 비난한다.

자, 이제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남은 것으로 보인다. 인류와 화해하거나 영원히 척지거나.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마지막 항해가 그의 결정을 도울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금 바다를 향하는 그의 나이는 마흔여덟. 하늘의 뜻을 안다는 쉰을 앞둔 어느 날의 일이었다.

*

350톤 규모의 상선 어드벤처호의 선장이 된 걸리버는 1710년 9월 7일 포츠머스 항을 출발한다. 지난 항해에서 돌아온 지 고작 다섯 달이 되었다는 둥의 이야기도 이제 지겹다. 다만 그의 아내가 임신 중이었다는 사실은 밝혀두는 것이 좋겠다. 이제 독자들은 그가 다섯 달 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걸리버의 항해에 폭풍우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정작 그를 궁지로 내몬 것은 사람이었다. 열대성 열병으로 죽은 선원들의 자리를 메꾸기 위해 리워드 군도에서 모집한 이들이 실은 해적이었던 것이다. 이윽고 반란을 일으킨 그들은 걸리버를 선실에 가둔 채 항해를 계속하다 그를 어느 해안가에 내려놓는다. 걸리버는 물론 해적들도 이름을 모르는 낯선 나라였다. 언제나처럼, 걸리버의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걸리버는 평정을 잃지 않는다. 그는 둑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이제부터 무엇을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지를 차분하게 고민한다. 간단하다. 처음으로 만나는 '야만인'에게 팔찌나 유리반지 같은 장난감을 주고 생명을 구한다. 일단 목숨을 구하면 그 다음은 어떻게든 해결되게 마련이다. 과연 바다는 남자를 성숙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철없는 남자친구 때문에 고민인 여성들은 한 번쯤 생각해볼 부분이다.

그곳에서 걸리버는 한 무리의 동물을 발견한다. 기형적으로 생긴, 기묘한 모습의 동물이었다.

그들은 꼬리가 없었으며, 항문을 제외한 엉덩이 부분에도 털이 없었다. 앉게 될 경우, 자신의 엉덩이를 보호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 암컷은 길고 곧게 뻗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으며, 항문과 음부를 제외한 신체의 나머지 부분에 잔털이 뒤덮여 있었다. 앞다리 사이에는 젖이 달려 있었다. 걸어갈 때는 젖꼭지가 거의 땅에 닿고는 했다. 머리카락의 빛깔은 암컷이나 수컷 모두가 갈색, 빨강, 검정, 노랑 등 여러 색깔로 되어 있었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 그렇게 기분 나쁜 동물은 결코 본 적이 없었다. 또한 지금처럼 반감을 품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 동물에게서는 경멸과 혐오를 강하게 느꼈다. (<걸리버 여행기>(신현철 옮김, 문학수첩 펴냄) 284쪽)


그는 왜 그렇게 강한 혐오를 느꼈을까? 동물들이 그에게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비록 그를 둘러싼 후 으르렁거리며 위협했고, 급기야 나무에 올라가 그의 머리에 배설물을 떨어뜨렸지만, 혐오는 이미 그 전에 시작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유를 밝히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갑자기 동물들이 있는 힘을 다해 달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리둥절한 걸리버. 주위를 둘러보던 걸리버는 들판을 천천히 걷는 말을 발견한다.

나는 용기를 내 말을 쓰다듬어 주려고 했다. 그리고 그 말의 목이 있는 곳으로 손을 뻗으려고 했다. 낯선 말을 다룰 때 기수들이 흔히 사용하는 것처럼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나 이 말은 나의 행동을 아주 경멸적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머리를 양옆으로 흔들고 눈썹을 찡그리면서, 나의 손을 피하기 위해 슬며시 앞발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서너 번 울부짖었다. 하지만 말 울음소리의 억양이 평소에 듣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그 말이 고유의 언어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287쪽)

과연 걸리버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곳은 바로 말들이 지배하는 나라였던 것이다. 그들 종족의 이름은 휴이넘, 그리고 그들은 걸리버를 '야후'라고 불렀다.

*

회색 말은 걸리버를 집으로 안내했다. 나무로 된 기둥과 나뭇가지와 밀짚으로 벽을 엮은, 조촐하지만 우아한 집이다. 바닥에는 부드러운 진흙이 깔려 있었고, 선반과 여물통이 한쪽 벽을 따라 길게 뻗어 있었다. 회색 말의 손에 이끌려 아주 예쁜 암말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 걸 인사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암말은 걸리버를 잠시 관찰하더니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이내 회색 말을 향해 몸을 돌린 후 불만을 토로했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야후라는 단어가 자주 반복된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야후가 뭐길래? 그때, 회색 말이 걸리버를 마당 한쪽의 작은 건물로 데려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걸리버는 야후의 의미를 알게 된다.

우리는 그 건물로 들어갔다. 나는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혐오스러운 동물 세 마리가 나무뿌리와 고기를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나는 그 고기가 당나귀나 개 그리고 사고나 질병에 의해 죽은 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 마리 모두 등나무 덩굴로 엮어 만든 끈으로 목이 메어져 기둥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 짐승들은 앞발로 음식을 쥐고 뜯어 먹었다. 회색 말은 그의 하인이었던 갈색 말에게 이 동물들 가운데 가장 큰 놈을 마당으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그 짐승과 나는 나란하게 세워졌다. 회색 말과 갈색 말은 우리의 모습을 자세하게 살펴보면서 비교했다. 그들은 야후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놀랍게도 나는 이 흉측한 동물들에게서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의 공포감과 경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293쪽)

휴이넘의 눈에 걸리버와 야후는 닮은 듯 닮지 않았다. 피부색이 달랐고, 손톱이 달랐으며, 무엇보다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 달랐다. 휴이넘들은 옷을 입지 않았기에, 그것이 걸리버의 피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걸리버는 자신의 몸이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비통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부터 말들과 함께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휴이넘은 그가 완벽한 야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들은 걸리버와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말들은 귀리와 건초를, 걸리버는 귀리로 직접 만든 빵과 우유를 먹었다) 그를 손님으로 대우했다. 야후를 닮은 동물이 이성처럼 보이는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놀라게 했다. 마흔아홉의 걸리버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말을 배우며,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게 바로 이 남자가 살아남았던 방식이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도 살아남는다. 그러니 그가 회색 말을 '주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해도 놀랄 필요는 없을 것이다.

*

걸리버는 주인과 오랜 시간을 보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걸리버는 그들의 이야기를 이해하지만 주인은 좀처럼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익숙한 전개다. 브롭딩낵 왕에게 걸리버가 한 마리의 벌레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휴이넘에게 걸리버는 한 마리 야후에 불과했던 것이다.

야후는 이 나라에서 가장 교활하고 악독한 성질을 지니고 있지만 학습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모든 짐승들 가운데 제일 길들이기 힘들다고 알려져 있었다. 나는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에서 나무로 만든 상자를 타고 바다를 건너왔다고 대답했다. 선원들이 나를 강제로 육지에 내려놓고는 떠나버렸다고 했다.

나의 말을 주인에게 이해시키는 데는 무척 힘이 들었다. 많은 몸짓의 도움도 필요했다. 그는 내가 오해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휴이넘의 언어에는 거짓말이나 허위라는 표현이 없기 때문에 주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바다의 저쪽에는 나라가 존재할 수 없으며, 짐승들이 나무로 만든 상자를 타고 물 위에서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어떠한 휴이넘이라도 그러한 상자를 만들 수 없으며, 더욱이 야후가 그렇게 한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301쪽)


주인은 혼란스러웠지만, 걸리버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는 의심이나 불신이라는 것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주인은 언어라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면서, 사실에 대한 지식을 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인데 누군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면(한마디로 거짓을 말한다면) 그건 언어가 아니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국에서의 휴이넘(즉, horse)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화를 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걸리버에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았다. 영국의 정치와 사회, 문화와 사람들의 삶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무척이나 고된 일이었다. 휴이넘에게는 범죄라는 개념이 없었고, 권력과 재산에 대한 욕망, 정욕, 무절제, 질투와 같은 감정 또한 마찬가지였으며, 권력, 정부, 전쟁, 법률, 처벌 등 많은 것들을 설명할 단어 또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해력이 뛰어난 주인은 사색과 대화의 도움을 받아서 마침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으며, 이내 유럽이라고 부르는 땅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기를 요청했다. 이윽고 인류의 온갖 악덕에 대한 익숙한 걸리버식 진술이 다시금 변주된다. 전쟁에 대한 걸리버의 설명을 보라.

예를 들면 고기가 빵이냐 빵이 고기냐에 대한 논쟁, 딸기 주스가 피냐 술이냐 하는 논쟁, 휘파람이 악행이냐 미덕이냐 하는 논쟁, 편지에 입을 맞추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그것을 불에 던지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논쟁, 외투의 빛깔이 검정색, 흰색, 붉은색, 회색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좋냐 하는 논쟁, 그리고 외투가 길어야 하는가 짧아야 하는가, 좁아야 하는가 넓어야 하는가, 더러워야 하는가 깨끗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많은 의견의 대립이 있다. 게다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일에 대한 의견의 대립으로 일어나는 전쟁만큼 무섭고 잔인하며 긴 전쟁은 없을 것이다. (314쪽)

트위터라는 최첨단 플랫폼을 통해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일이다. 16쪽에 걸쳐 나열되는 나른 악덕들 또한 모두 마찬가지다. 나는 이 자리에서 익숙한 이야기를 반복함으로써 독자들을 지루하게 만들 생각은 없다. 다만 그들이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주인은 인간이 아주 작은 분량의 이성을 부여받은 동물이지만, 이성을 좋은 일에 사용하는 대신 새로운 잘못을 만드는 일에 사용해왔고, 아무런 소용도 없는 발명품으로 단점을 메우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걸리버는 다른 야후 형제들과 그의 몸이 아주 닮았듯이, 기질에 있어서도 사실상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어 열다섯 쪽에 걸쳐 야후의 악덕들이 나열된다. 걸리버의 관점에서 그것은 물론 인간의 악덕이기도 하다. 이런 식이다.

주인은 그의 하인들이 야후에게서 발견한 또 다른 특징에 대해 말을 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했다. 어느 야후가 갑자기 변덕을 부리며 구석에 누워 있으면서 울부짖거나 신음했다. 그 누구도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주인의 하인들은 그 야후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젊고 건강한 그 야후에게는 음식과 물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들이 발견한 유일한 치료법은 그 야후에게 힘든 일을 시키는 것이다. 힘겨운 일을 하고 나면 반드시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335쪽)

혹시라도 같은 증상에 시달리는 독자분들이 있다면 참고하시길.

*

걸리버는 휴이넘들 사이에서 소박한 생활을 하며 행복을 만끽한다.

나는 육체의 건강과 정신의 평온함을 즐겼다. 친구의 배반이나 변절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숨어 있거나 드러나 있는 적의 비난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의 환심을 얻기 위해 몰래 뇌물을 주거나 아첨할 일도 없었다. 사기와 압력에 대해서도 마음을 쓸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는 나의 건강을 해치는 의사도, 나를 파산시키는 변호사도 없었다. 나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면서 억지로 비난거리를 만들어 내는 밀고자도 없었다. 비웃는 사람도, 비난하는 사람도, 뒤에서 헐뜯는 사람도, 소매치기도, 날치기도, 도둑도, 변호사도, 포주도, 익살광대도, 도박사도, 정치가도, 부자도, 짓궂은 사람도, 지리한 웅변가도,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도, 강탈자도, 살인자도, 강도도, 감정가도 없었다. 정당이나 파벌을 지도하는 사람이나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도 없었다. 유혹하거나 표본이 됨으로써 악을 조장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죄수를 가두는 감옥도, 도끼도, 교수대도, 처벌대도, 죄수에게 씌우는 칼도 없었다. 값을 속이는 상점의 주인이나 직공도 없었다. 자만심도, 허영심도, 꾸밈도, 치장도 없었다. 깡패도, 주정꾼도, 매춘부도, 매독도 없었다. 음탕하고 소란스럽게 떠들면서 돈을 많이 쓰는 아내도 없었다. 어리석은 자만심을 가진 현학자도 없었다. 자랑을 하거나 싸움을 좋아하는, 시끄럽게 큰 소리를 지르는, 어리석으면서도 잘 아는 듯한 표정을 짓고 맹세를 잘하는 성가신 친구도 없었다. 악덕에 의해 거지 신세에서 벗어난 악당도 없었으며, 악덕에 의해 거지 신세로 전락한 귀족도 없었다. 지배자도,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재판관도, 춤을 가르치는 교사도 없었다. (351쪽)

우리의 걸리버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자신이 인간을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휴이넘들과의 삶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자신이 한때 속했던 인류에게 영원히 등을 돌리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참을 수 없었지만, 휴이넘들과 함께라면 그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누구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는 법이다.

휴이넘들의 회의에서 걸리버를 추방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그들은 그에게 떠날 것을 정중히 '권고'했다. 걸리버는 충격을 받아 기절했지만, 거부할 수는 없었다. '권고사직'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권고란 명령보다 무겁고, 걸리버는 누구보다 순종적인 남자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714년("혹은 1715년이었는지도 모른다"고 걸리버는 말한다), 쉰을 넘긴 중년의 걸리버는 마침내 찾은 천국을 떠난다. 해변에 모인 친구들이 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를 무척이나 사랑해 주었던 갈색 말이 '흐누이 일라 니하 마이야 야후'라고 소리쳤다. 그건 "부디 조심하거라 예의 바르고 유순한 야후야"라는 뜻이었다.

*

그는 야후, 그러니까 인간들에 대한 도저한 혐오를 품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내와 남은 가족들은 살아 돌아온 가장을 기쁘게 맞이한다. 하지만 걸리버는 오직 증오와 경멸감만을 느낄 뿐이었다. 그들이 그의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자, 경멸감은 오히려 커졌다. 그는 자신이 바로 야후의 아버지였으며, 더러운 야후와 오랫동안 성교를 해왔다는 생각에 극도의 수치감을 느낀다.

아내는 나를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나는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기절했다. 그렇게 역겨운 동물과 오래도록 접촉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여행기는 영국으로 돌아온 후, 5년이 지난 다음에 쓰는 것이다. 처음의 1년은 아내나 아이들이 곁에 있는 것조차 참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서 풍기는 냄새는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더욱 참기 어려웠다. 아내와 아이들은 지금까지도 나의 음식에 손을 대거나 같은 잔으로 물을 마시지 못한다. 아무도 나의 손을 잡지 못하게 했다.

나는 두 마리의 수말을 구입하기 위해 처음으로 돈을 사용했다. 훌륭한 마구간에 말을 넣었다. 두 마리의 말을 제외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말을 돌보는 사람이다. 말을 돌보는 사람에게 배어 있는 마구간의 냄새만 맡아도 나는 정력이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말들은 나를 잘 이해해 주었다. 나는 매일 네 시간씩 말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직까지 나는 말에게 고삐나 안장을 얹어 보지 않았다. 나와 말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말들끼리도 사이가 아주 좋다. (366쪽)


인류에 대한 혐오와 휴이넘에 대한 사랑을 넘어 수간에 대한 암시까지 느껴지는, 그렇지만 무척 쓸쓸한 결말이다. 사실 걸리버는 한 장을 더 할애해 여행기를 낸 동기에 대해 쓰고 있지만, 나는 이것이 결말이라고 주장하겠다. 여느 현대 소설들보다 훨씬 근사한 결말이니까.

*

이 도저한 인간 혐오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척 많은 페이지가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우리에겐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걸리버가 말한 것처럼 나 역시 "이 문제만을 다룬 책을 근간에 다시 출판할 예정이므로 독자들은 그 책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거짓말이다. 내겐 이 혼란스럽고 때론 모순적인 정신을 설명할 능력이 없다. 그렇기에 그의 모험 각각을 분절해 제시했고, 그것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그럴 듯한 결론을 위해 찾아본 참고자료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걸리버 여행기>를 각각의 부분으로 떼어내어 해석하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단위로 해석하게 되면 우리는 스위프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 그것이 당대 사회에 대한 풍자인지 인간에 대한 절망인지, 아니면 인간의 비합리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해 가져야 할 희망인지 – 에 대해 단언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전인한, <영미문학의 길잡이 1>(영미문학연구회 엮음, 창비 펴냄), 193쪽)

다만 혹시라도 <걸리버 여행기>를 읽으며 (마치 걸리버가 야후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혐오감을 느낀 독자가 있다면 조지 오웰의 말을 전하고 싶다. 조나단 스위프트가 진보적이지 않고 정신적으로도 온전하지 않다며 끊임없이 불평하는 조지 오웰은 그러나 "만일 책을 여섯 권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없애야만 한다면, 나는 단연코 <걸리버 여행기>를 그중 하나로 꼽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스위프트는 인간의 삶에서 더러움과 어리석음과 사악함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는 태도로 온 세상에 대한 자신의 그림을 왜곡했지만, 그가 전체로부터 뽑아내는 일부분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언급하길 꺼려해서 그렇지 있는 줄은 다 아는 무엇이다. 우리 마음의 일부는(정상인의 경우 가장 우세한 부분이다) 인간이 고귀한 동물이며 삶은 살 만한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에 비해 적어도 이따금씩은 존재의 끔찍스러움에 아연실색하는 일종의 내적 자아 같은 게 있는 것이다. 참으로 묘하게도 쾌락과 혐오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중략)

작가의 관점은 정신건강 차원의 온전함, 그리고 자기 생각을 밀어붙이는 힘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 이상으로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재능일 것이며, 그것은 확신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위프트는 정상적인 의미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서울 정도로 강렬한 비전은 확실히 갖고 있었으며, 그것은 숨겨진 진실 하나를 골라내어 확대하고 비틀어서 볼 줄 아는 능력이기도 했다. <걸리버 여행기>가 오랜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작가의 세계관이 온전함이라는 기준을 겨우 만족시키는 수준일지라도, 작가의 확신이 뒷받침해준다면 위대한 예술 작품을 충분히 낳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정치 대 문학 : <걸리버 여행기>에 대하여', <나는 왜 쓰는가>(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327~329쪽)

정치적인 기준으로 작가와 그의 작품을 판단하려는 21세기의 많은 독자들이(정확히 말하자면 "많지 않은 독자들 중에서 많은 비중을 갖고 있는 그러한 성향의 독자들"이라고 해야겠지만) 한 번쯤 새겨들을 만한 구절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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