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경제부가 지난 2월초 국회에 보고한 자료를 보면, 현행 요금 차이가 최대 11.7배가 나는 주택용 누진제를 4~8배로 줄이겠다는 계획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6단계로 나눠진 전기 요금 누진 구간을 3~5단계로 완화하겠다는 것이다. 그간 주택용 누진제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던지라 개선해야겠다는 정부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개악도 이런 개악이 없다.
첫 번째, 누진제 완화로 서민층 부담을 늘고, 고소득층 가정의 부담은 크게 준다. 정부 계획대로 누진제가 완화되면 한 달 평균 약 1만5000원(매월 150킬로와트시) 정도를 내는 가구는 월 평균 4000원 가량 요금이 증가하지만, 10만 원(매월 450킬로와트시) 가량을 내는 가구는 약 9000원 정도 요금이 줄어든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지금도 전기 요금 납부가 버거운 서민층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반면에 한 달에 수천만 원에서 수백만 원을 내는 고소비 가구들은 수백만 원에서 수십만 원의 전기 요금 절감 혜택이 발생한다. 실제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2009년 당시 월 평균 주택용 전기 요금이 2500만 원에 이르고, 이건희 회장도 1000만 원 가까이 난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전반적으로 전기 요금을 낮추는 방향으로 가면 서민 부담을 줄일 수 있지 않느냔 말이 나올 법도 하지만 한국전력 부채가 80조 원에 이른다는 걸 감안하면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다소비 가정에서 줄어드는 금액만큼 저소득층과 서민층에게 더 걷어 벌충하는 방식이 될 수밖에 없다. 두말할 나위 없는 부자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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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다소비 가정에 대한 에너지 절감 유도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진다. 우리는 매해 여름과 겨울이면 피크 전력으로 정전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전력난이 심각한 상황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발전소를 더 짓겠다는 입장이지만, 이미 전기 소비 세계 9위에 이르는 우리가 공급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난센스다.
게다가 새로 짓겠다는 발전소는 대부분 온실 기체 다배출원인 화력 발전소이거나 에너지 갈등의 핵심인 핵발전소다. 지금이 에너지 소비를 최대한 줄여야 하는 시점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지상 명제다. 정부도 이를 인정하고 요금을 지속적으로 올리고 있는 중이지만 한 편에선 오히려 소비를 조장하는 방식을 준비 중에 있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백 번 양보해 공급 관리와 수요 관리 정책이 모순된다는 걸 눈감고 지나치더라도 2011년 순환 정전 사태의 학습 효과가 전혀 없어 보이는 건 안타깝기까지 하다. 그해 여름 400킬로와트시 이상 썼던 다소비 가정의 전력 사용량 비중이 30퍼센트 가까이 됐다는 걸 어떻게 무시할 수 있는가.
그들에게는 지금도 낮은 수준인 전기 요금 탓에 소비 억제 효과가 적은 판에 누진제를 더 줄인다는 건 온실 기체 감축 정책은 포기하겠다는 선언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정부의 요구대로 에너지 사용량을 줄이고 있는 착한 가정에게 인센티브는커녕 요금을 더 내라며 쥐어짜는 게 과연 합당한 일일까.
세 번째. 누진제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형평성이 어긋난다고 주장하는 것도 사실과 거리가 멀다. 전기를 생산하는 과정에는 엄청난 양의 온실 기체와 대기 오염 물질이 배출되고 이를 관리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요된다. 하지만 전기 요금에는 이러한 외부 비용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즉 다시 말해 에너지 다소비 가정들, 쉽게 말하면 부자들이 유발하는 환경 비용을 모두가 나눠서 부담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오히려 환경 비용을 전기 요금에 포함시켜 배출한 만큼 책임지게 만드는 것이 더 공정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현행 누진율이 형평에 어긋난다고 얘기하기 힘들다.
네 번째, 주택용 요금이 아니라 산업용 요금이나 일반용(상업용) 요금이 문제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산업 분야는 국내 전력 소비 비중이 약 52~54퍼센트 수준에 이르는 반면, 요금은 주택용 요금에 비해 훨씬 저렴하다.
물론 주택용 요금도 발전 원가 이하기 때문에 인상 요인이 분명히 있고 생산 단가가 다르기 때문에 산업용 요금이 낮을 수밖에 없다는 점도 인정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서민들에게 돈을 걷어 대기업 요금을 지원하는 교차 보조가 가장 큰 문제다. 산업용 요금을 먼저 현실화해야 용도별 요금 간 불평등도 줄이고, 에너지 수요 저감 효과도 노릴 수 있다.
다행히도 이명박 정부가 지난 1년 반 사이에 전기 요금을 산업용 요금은 네 번이나 올리면서 주택용은 두 번만 올리기에 이 사람들이 웬일인가 했다. 그런데 그건 주택용 요금을 대대적으로 손보기 위한 사전 포석에 불과했었던 것인가.
마지막으로 그들이 말하는 에너지 기본권 혹은 에너지 복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현 정부는 '에너지 복지'라며 월 수천 원 한도 내에서 전기 요금을 할인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구간이 완화되면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저소득층에게는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다. 올 겨울만 해도 얼마 안 되는 에너지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동사로 목숨을 잃은 저소득층의 소식이 왕왕 전해졌다.
에너지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수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다. 우리나라의 에너지 복지법도 에너지는 기본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낮은 전력 소비량 요금은 더 낮춰서 권리를 보장해줄 필요가 있다. 그 경우 에너지 소비량이 증가할 가능성이 있지만 이는 누진제를 강화해 다소비 가정이 줄이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상쇄시켜야 한다. 누진제가 강화되면 평균 소비량을 보이는 가정에서도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에너지 절약을 실천할 가능성이 크다. 에너지 기본권을 보장하면서도 환경 부하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아예 누진제를 폐지하자는 일각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늘어나는 환경 부하를 좌시하기에는 이미 사회적 비용 규모가 너무 커졌다. 게다가 월 평균 요금 5만 원 안팎을 내는 대부분의 서민층은 누진제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낮은 단계 요금은 발전 원가 이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진제를 폐지함과 동시에 자기 발등을 찍는 형국이 되고, 누진제를 폐지되거나 완화되면 다시 복구하기 힘들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그런 누진제 폐지는 언론의 여론몰이가 만들어낸 허상에 가깝다는 생각까지 든다. 누진제 폐지 여론이 정점에 이른 시기가 지난 여름 20~30만 원 전기 요금 폭탄 기사들이 쏟아진 직후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추가 발전소 건설을 막고, 온실 기체를 줄이기 위해서는 전기 요금 제값내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합리적 부담을 용인해야 저들의 폭주를 막을 수 있다. 전기 요금은 그 시작이다.
'초록發光'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한 연재입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이 연재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현재를 '초록의 시선'으로 읽으려 합니다. 이런 시도는 이명박 정부의 '녹색 성장'이 아닌 '초록 대안'을 찾으려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활동의 일부분입니다. ☞바로 가기 :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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