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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서울, 아이들 홀린 테마파크 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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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서울, 아이들 홀린 테마파크 괴담

[프레시안 books] 이진의 <원더랜드 대모험>

이 소년에게는 남들은 다 갖고 있는 그 흔한 게임기가 없다. 만화책을 살 돈도, 친구와 떡볶이를 사먹을 돈도 없다. 풍요, 행복, 안정. 이런 것들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 소년, 승협에게는 너무도 특별한 가족이 있다. 노동 쟁의에 앞장서다가 매번 공장에서 쫓겨나는 엄마 아빠, 심장병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여동생. 엄마는 '머리가 벗겨진 대통령'에게 늘 편지를 쓴다. 내 딸이 심장 재단의 후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제발 도와달라고. 몸이 아파 학교에 가지 못하는 총명한 여동생은, 삶의 마지막 동아줄을 부여잡는 심정으로 치열하게 검정고시 공부를 하고 있다.

소년은 자신의 삶이 거대한 결핍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소년의 눈에 비친 세상은 철저히 불평, 불만, 분노로 가득 차 있다. 그런 승협이가 가장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얼마 전에 개장한 동양제일의 테마파크, '원더랜드 입장권'이다. 그것은 이 지긋지긋한 세계를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천국의 입장권 같은 것이다.

대통령들은 바뀌었지만 공장장들은 바뀌지 않았다. 공장장들은 여전히 엄마아빠에게 줘야 할 돈과 휴가를 주지 않았다. 엄마 아빠가 투쟁하는 동안 나는 나만의 투쟁을 시작했다. 그것은 내 눈에 거슬리는 녀석들과의 투쟁이었다. (…) 엄마 아빠는 매번 공장에서 쫓겨났다. 투쟁에 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 없는 개처럼 떠돌아다니면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질 게 뻔한 싸움을 뭐 하러 하지? 무엇을 위해서? (…) 그래서 나는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한다. (29쪽)

매우 특별한 가족 같지만, 사실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뜨거운 격변기를 거쳐 온 평범한 노동자 가족의 일상이다. 당시 서울 어디서나 지하철로 한 시간 이내에 닿는 거리에 덩그러니 개장하는, 당시 아시아 최고의 실내 테마파크가 어딘지는, 그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골목길에서, 남이 싼 똥 구린내를 맡으며 라면을 먹어야 하는 지옥 같은 단칸방에서 최대한 멀리"(32쪽) 떠나고 싶은 소년. 지긋지긋한 이곳만 아니라면, 이 세상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은, 한 소년에 비친 어른들의 가혹한 세상. 아이는 원더랜드에 가기 위해 친구의 만화책 <보물왕국> 속에 있는 초대권을 몰래 훔치고, 마침내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원더랜드에 입성하게 된다. 아이는 처음으로 '꼭 갖고 싶은 무언가'를 위해 자기 안의 소중한 금기를 깨뜨린 것이다.

▲ <원더랜드 대모험>(이진 지음, 비룡소 펴냄). ⓒ비룡소
그런데 그저 천국처럼 좋을 줄로만 알았던 원더랜드에서는 스파르타 훈련을 방불케 하는 무시무시한 생존 게임이 기다리고 있다. 35명의 원더랜드 입장권 당첨자들끼리 각종 기상천외한 게임을 시킨 후, 최종 우승자를 가려 200만 원 상당의 경품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원더랜드에서 꿈같은 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소박한 꿈마저 잃어버린 채, 피 말리는 경쟁을 시작한다.

구토를 유발하는 무시무시한 바이킹호에서 괴성을 지르며 난해한 종이 접기를 해내고, 거대한 번지 점프 기구에서 추락하면서도 절대로 비명을 지르지 않는 등, 별별 얼토당토않은 게임들을 잘도 견뎌낸다. 소년은 '여기서 나만큼 저 상금이 절실한 사람이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는다. 아이는 만화책 <보물왕국> 한 권을 살 돈조차 없었고, 초대권에 응모할 우표조차 없어 심장 재단에 보낼 편지에 붙일 엄마의 우표를 훔치기까지 했다.

마침내 아픈 여동생이 끓여준 라면을 먹고 하루 종일 죽을힘을 다해 싸운 소년이 우승의 영광을 쟁취하게 된다. 하지만 어른들이 소년에게 쥐어준 것은 '상금'이 아니라 '경품'이었다. 소년은 어른들의 복잡한 속셈과 지저분한 상혼을 알아채지 못하고, 당연히 '상품'은 '상금'이려니 오해했던 것이다.

"나 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벌써부터……학생이 돈이 어디 필요하다고?"
나는 욱한 마음에 쏘아붙였다.
"학생은 돈 없이도 살 수 있는 줄 알아요?"
(…) "엉? 돈이 왜 필요하냐고!"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 질렀다.
"우리 동생 수술비가 필요하다고요!"
(…)"그것 참……."
"여기에는 뭐든 다 있다면서요? 제가 원하는 건 돈이라고요, 돈. 상품 다 필요 없어요. 상품으로 동생 수술시키게요?" (218~219쪽)


아이는 아픈 여동생에게 원더랜드 입장권 하나 멋지게 양보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커다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힘겨운 생존 경쟁을 마치고 나자 비로소 원더랜드보다 더욱 소중한 것, 도망칠 수 없는 자신의 운명, 가족들의 '무사함'을 원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어른들은 게임기도 권하고, 어학 테이프도 권하고, 심지어 제주도 여행권과 다이어트 운동 기구까지 권하지만, 아이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전혀 없다.

아이는 여동생이 가장 좋아할 만한 것, 백과사전과 너구리모양 풍선을 달라고 해서 허탈한 마음으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평소처럼 어둡고 칙칙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 줄로만 알았던 승협이네 집에 놀라운 기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지칠 줄도 모르고 대통령님께 편지를 보냈던 엄마의 기도가 마침내 이루어져, 여동생이 심장 재단의 후원을 받아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소년은 비로소 자신이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원더랜드가 어디였는지를 깨닫게 된다. 엄청난 부잣집도 아니고, 매일매일 행복한 집도 아니지만, 우리 가족이 '무사히' 오늘 하루를 넘길 수 있는 곳. 여동생이 응급실에 실려 가지도 않고, 엄마아빠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는, 우리 가족 모두가 그래도 함께 나란히 누울 수 있는, 이 초라한 단칸방. 여기가 바로 원더랜드였구나. 그토록 '별거 있을 줄' 알았던 원더랜드에는 '별거 없고',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던 우리 집 안에 기적 같은 행복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무시무시한 생존 경쟁의 실체를 너무 일찍 알아 버릴까봐 걱정한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이 가혹한 생존 경쟁에서 강인하게 '살아남기를' 원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그 끔찍한 서바이벌 게임의 법칙 속에서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우정'과 '연대'의 힘을 발견해낸다.

승협은 원더랜드에서 오직 이기기 위한 경쟁을 하면서도, 자기만큼 불쌍한 친구, 아니 어쩌면 자기보다 불쌍한 친구 아리사를 만난다. '흑인 트기'라고 무시당하며, 한국에 살면서도 한국인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소녀 아리사. 오직 외모 때문에 차별받고 무시를 당하고 왕따 당하는 아리사를 보면서 승협은 마음이 아파온다. 어, 이런 건 내 사전에 없는 감정이었는데. 그렇게 승협은 아리사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낀다. 승협은 자신이 '일등'을 하길 바라지만, 소녀도 '자신과 함께' 상품을 타기를 바란다. 나 혼자만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함께 승리하는 삶을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불쌍한 아이들에게 잔인한 서바이벌 게임을 시키는 어른들의 잔혹한 게임 속에서도, 아이들은 아픔과 손잡는 법, 나보다 더 불쌍한 아이의 눈물을 알아보는 법을 배운다.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 왜 우리 집은 부잣집이 아닌 걸까. 왜 세상은 태어날 때부터 불공평하기만 한 걸까. 아이들의 성장통은 바로 이러한 결핍감에서 탄생한다.

하지만 아이들을 진정으로 성장시키는 것도 바로 이 결핍감이다. '세상에는 왜 나보다도 더 불쌍하고, 나보다도 더 아픈 아이들이 이렇게 많은 것일까'를 깨닫게 되면서 우리는 좀 더 나은 어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더랜드 대모험>(이진 지음, 비룡소 펴냄)에는 뼈아픈 결핍을 눈부신 기적으로 탈바꿈시키는, 아이들의 풋풋한 우정과 모험의 불빛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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