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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선 한반도, 희망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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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선 한반도, 희망은 없는가?

[해방일기] 1947년 9월 5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1947년 9월 5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김기협 : 미소공위는 이제 길이 막혀버린 것 같습니다. 1946년 5월 무기정회 때는 진행이 늦어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지, 언제고 다시 열릴 것을 기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회담이 중단될 경우 다시 열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미국이 조선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겠다고 벼르고 있으니까요.

선생님과 합작위 여러분들은 미소공위를 민족 독립을 위한 최선의 통로로 여겨 왔습니다. 최선의 통로 정도가 아니라 거의 유일의 통로처럼 중시해 왔습니다. 이제 미소공위가 막혀버리면 조선 독립은 어떤 길을 걷게 될까요?

안재홍 : 비관적인 판단을 너무 서두르지 맙시다. 미소공위는 두 나라 사이의 회담인데, 최근 한 달 동안 미국 쪽에서 회담을 끝내 버리려는 태도를 보여 온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소련 쪽은 회담을 지키려는 태도지요. 미국이 일방적으로 미소공위를 파기하는 것은 모스크바 3상 결정이라는 국제 조약의 파기이기 때문에 쉽게 결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전쟁도 불사한다는 극단적 결정이 아니고는 미소공위를 파기할 수 없습니다. 자기네에게 유리한 쪽으로 소련의 양보를 얻어낸다면 회담장으로 돌아오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김기협 : 미국이 원하는 소련의 양보가 어떤 것일까요?

안재홍 : 제일 중요한 문제가 협의 대상 범위죠. 협의 참가가 곧 건국 방안에 대한 발언권으로 연결되는 것인데, 미국은 좌익이 너무 우세하게 될 것을 걱정하는 겁니다. 한국민주당 등 반탁투위 소속 정당-단체들을 미국인들은 가장 확고한 우익으로 여기는데, 이들이 빠질 경우 이북의 확고한 좌익 정당-단체들과 균형이 안 맞으리라는 거죠.

김기협 : 소련 측이 그 단체들을 무조건 제외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반탁투위 탈퇴를 조건으로 받아주겠다는 것 아닙니까? 반탁투위의 미소공위에 대한 적대 행위가 분명한 이상 미국 측에서도 그 단체들에게 반탁투위 탈퇴를 종용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안재홍 : 맞아요. 그 일만 본다면 미국 입장에 무리한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협의 대상 범위에 대해 전반적인 불만과 걱정이 있기 때문에 일종의 기세싸움처럼 매달리는 겁니다.

이북의 협의 대상 단체들은 모두 소련 측 입장을 지지할 것으로 미국인들은 생각합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럴 것 같고요. 그런데 이남의 단체들은 입장이 각양각색이에요. 미국이 어떤 입장을 내놓더라도 일부 단체들은 반대할 것이 분명하죠. 이북 단체의 전부와 이남 단체의 일부가 소련 측을 지지하면 미국 입장이 불리하다는 점을 미국인들은 걱정합니다.

김기협 : 그런 걱정이라면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고 해야겠네요. 소련군은 이북에서 민족 자치 활동을 지원해주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이 연합전선으로 체제를 정비하면서 소련군과 협조적 관계를 굳혀 왔습니다. 반면 이남에서 미군정은 자치를 억압하고 친일 경찰을 비롯해 민족 정체성이 약한 집단을 등용해서 일본의 뒤를 이은 '이민족 통치'에 나섰기 때문에 민족주의자들이 갈수록 등을 돌리게 된 것 아닙니까.

뭐 눈에 뭐만 보인다고, 이남에서 좌익을 경찰력으로 탄압하는 미국인들은 이북에서 소련군도 우익을 탄압하기 때문에 우익 세력이 미미한 줄 생각하죠. 하지만 소련군 우익 탄압의 대표적 사례로 입에 오르내리던 조만식 씨가 자유로운 상태에서 미소공위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6월 말 평양에 간 미국 대표단이 확인하고 오지 않았습니까?

남북을 통틀어 조선인의 민심이 소련보다 미국에 더 반감을 갖게 된 것은 바로 2년간의 미군정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협의 대상이든 뭐든 정당한 방법으로 조선 민의를 수렴한다면 미국에 대한 불신이 크게 나타날 수밖에 없죠. 그렇다면 미국 측은 조선인의 민의 표출 자체를 꺼리는 입장 아닌가요?

안재홍 : 민주주의국가를 표방하는 미국으로서 민의 표출을 가로막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미국 제안이 총선거의 조기 실시로 중점을 옮기는 것도 그 때문이겠습니다.

김기협 : 총선거 조기 실시는 몇 달 전부터 이승만 씨 등 반탁 세력 일각에서 미소공위를 대신하는 방안으로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민족주의자들은 그 주장이 미국과의 결탁으로 이남의 분단 건국을 획책하는 게 아닌가 의심해 왔죠. 작년 10월의 입법의원 선거를 떠올리면 '선거'라는 말 자체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제대로 된 선거를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독립을 앞당기는 길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안재홍 : 제대로 된 선거를 할 수만 있다면야 물론 좋은 일이죠. 그러나 소련의 동의와 협력이 필요합니다. 소련의 협력 없이 미국 혼자 주선하는 선거라면 작년 입법의원 선거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 없죠. 이북 지역까지 시행할 길도 없고요.

그런데 소련은 모스크바 결정의 철저한 이행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습니다. 소련이 한반도에 미국과 대등한 영향력을 당분간 유지할 수 있게 보장해주는 결정입니다. 그런데 인구 비례 총선거를 분단 점령 상태에서 서둘러 실시할 경우 이남에서 친미 세력이 선거를 휩쓰는 것을 막기 힘듭니다. 대등한 영향력을 가진 상태에서 과도 임시 정부를 먼저 세워놓은 다음에 총선거를 실시하는 기존 방안을 소련이 포기할 것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김기협 : 미소공위 재개 직후인 6월 6일 선생님의 방송 연설 중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현재 미-소 양국은 전 세계적으로 대립되어 있으면서 어디서이고 양보와 협조의 길을 찾으려고 애쓰며 있는데 조선에서부터 협조의 길을 열지 않고서는 두 나라의 관계가 매우 미묘하고 또 험악하게 되겠는 고로 이번의 공동위원회는 비록 다소의 파란곡절이 이 뒤에도 없지 않으리라고 치더라도 반드시 성취시킬 의도에서 열린 것이라고 판단할 바입니다. 그러면 조선의 완전 독립은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 40년래 해내 해외에서 반항 투쟁을 하여온 민족 정신에 인하여 4000년 조국은 기어이 재건설될 것이지마는 이 대업을 완성하려면 반드시 미-소 양국과 중-영-불 등의 세력 균형에 의한 국제 협조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니 될 일입니다. (<민세 안재홍 선집 2>, 188~189쪽)

그 무렵에 양측 대표단이 참 열심히들 일하고 있었죠. 그 모습을 보면서는 미소공위가 반드시 성과를 거둘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소 간의 전 세계적 대립 때문에 마음 한 구석에 불안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두 나라가 "양보와 협조의 길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고 하셨는데, 너무 희망적 관측이었을까요?

안재홍 : 결과적으로 희망적 관측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걱정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조선인만의 불행이 아니라 전 인류의 불행입니다. 미-소 양대국의 불화는 6년에 걸친 세계 대전에서 겨우 벗어난 인류를 또 한 차례 세계 대전의 위협에 도로 던져 넣는 길입니다. 더 이상 전쟁은 있을 수 없다는 인류의 의지가 두 나라의 불화를 가로막아 줄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만, 근래 사태의 진전은 갈수록 걱정스럽군요.

지난 봄 트루먼 독트린이 나왔을 때 이승만 박사는 미국의 분단 건국 후원을 보장받은 것처럼 기뻐 날뛰었지만 나는 큰 걱정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와 터키에서 불리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소련을 위협한 것일 뿐이고 전면적 대결로 나아가리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그 위협이 두 나라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양쪽 다 타협적인 태도로 나올 것을 기대했습니다.

6월 중순까지 미소공위는 정말 더 바랄 수 없이 잘 돌아갔습니다. 6월 23일 반탁 시위 같은 돌발 사태가 큰 문제를 일으키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협의대상 문제가 다시 걸림돌이 되고 말다니….

김기협 : 협의 대상 문제는 핑계일 뿐이고 워싱턴에서 미소공위 좌초 결정을 이미 내린 게 아닌가 하는 관측이 유력합니다. 7월 11일 브라운 대표가 합의 안 된 문제점을 일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할 때는 이미 방침을 정한 게 아닌가 하는 거죠. 그 후 마셜이 몰로토프에게 8월 12일 편지에서 8월 21일까지 미소공위 보고서를 받자고 제의한 것, 러베트 차관보가 8월 28일 몰로토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연합국 대사 회담을 제안한 것, 모두 올 가을 유엔 총회에 조선 문제를 상정하기 위한 수순으로 해석됩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희망적 관측과는 달리 미국이 소련과 전면적 적대관계를 향해 움직여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미국 태도가 이렇게까지 경직되어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안재홍 : 지난주에 웨드마이어 특사와 두어 차례 만나면서 미국 고위층이 조선에 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좀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군인 아닌 일반 정치인들 사이에도 반공 풍조가 생각보다 강한 것 같더군요. 공산주의의 확장에 대한 우려가 정책 결정에 많이 작용하는 모양입니다.

웨드마이어 장군의 사명이 중국과 조선 사정을 살피는 것인데, 이것은 미국 정계에서 두 나라 사정을 묶어서 보는 시각을 반영한 것이겠죠. 그런데 중국 장개석 정권에 대한 미국의 시각이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국민당이 무능과 부패에서 헤어날 전망이 보이지 않으니 공산당 세력이 확장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죠. 중국 문제가 미국인들을 불안하게 만들어 소련과의 대결 노선으로 나아가게 하고, 조선 문제도 거기에 휩쓸리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듭니다.

'해방일기' 사랑방 9월 5일 오후 7시 30분 당산동 해오름평생교육원에서 열립니다. 필자에게 궁금한 점이 있는 분들, 이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분들은 격주로 수요일에 열리는 사랑방에 찾아와 주세요.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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