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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백민석, 그는 왜 절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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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백민석, 그는 왜 절필했을까?

[親Book] 카뮈와 백민석,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

선풍기가 더운 숨을 내뱉던 7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카뮈의 <시지프 신화>(김화영 옮김, 책세상 펴냄)에 대한 짧은 원고를 쓰던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쓰려고 하던 중이었지만. 아무려나, 내게 약간의 재치란 게 있었다면 쓰(려고 하)던 중이었다, 라고 짧게 표현할 수도 있었을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라고 담백하게 표현할 수도 있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나는 카뮈의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과 <반항하는 인간>과 <작가 노트>와 <젊은 시절의 글>과 <시사평론>과 <단두대에 대한 성찰·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와 <결혼·여름> 사이를 발작적으로 오가고 있는 중이었다. 장 그르니에의 <카뮈를 추억하며>와 <섬>을, 스털링 램프레히트의 <서양 철학사>를,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의 <20세기 서양 철학의 흐름>을, 피터 왓슨의 <생각의 역사 2>를, 프란츠 짐머만의 <실존철학>을, 사이먼 크리칠리의 <죽은 철학자들의 서>를 초조하게 뒤적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밖에 기억도 나지 않는 책들을 책장에서 뽑아 방바닥에 던지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내가 그 모든 책을 순식간에 읽어낼 수라도 있다는 듯이. 마감 시간은 이미 넘긴 지 오래였다.

선풍기에서 더운 바람이 불어올 때면, 누구라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픈 심정이 들게 마련이다.

나는 잠시 타이핑을 멈추고, 만약 내가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그 상황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생각해 본다. 마치 내가 언제나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답은 순식간에 튀어나온다. 이런 대답이다.

A :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라는 표현이 전적으로 옳음.

나는 잠시 웃고, 머리를 흔든다. Enter 버튼보다 수백 배는 큰 Del 버튼을 누른다. 모든 것은 제 존재에 걸맞은 크기를 갖게 마련이다. 적어도 머릿속에서는. 어쨌거나 나는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런 사람은 카뮈 하나로 족하다. 그리고 카뮈는 죽었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은 니체였다. 니체도 죽었다. 카뮈는 죽은 니체를 따라, 그러나 자신의 방식으로, 신이 죽은 세상에서의 신학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아니, 신이 혼수상태에 빠진 세상에서의 신학이라고 해야겠다. 그것은 부조리의 신학이다. 그 자신은 겸손을 가장하며, 혹은 귀찮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부조리의 시론'이라고 말했지만, 그건 분명 신학이다.

▲ <시지프 신화>(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책세상 펴냄). ⓒ책세상
그는 평생 신의 존재에 대해 판단하기를 유보했고, 그래서 말년에는 날파리떼 같은 일당들에게 신앙에 귀의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몰라도 한참은 모르는 말들이다. 카뮈가 구했던 것은, 처음부터 신앙이었다. 신앙의 핵심은, 세상의 편견과는 달리, 신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이다. 대부분의 경우 신이란 어떤 종류의 커피 위에 올라가는 생크림이나 마찬가지일 뿐이다. "카페 모카, 그란데 사이즈로, 생크림은 빼고. 다이어트 중이라서…" 카뮈는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단순히 생크림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렇다면 이 기회에 다이어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가 보기에 우리는, 우리들의 정신은, 우리들의 문화는 약간의 다이어트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아랑곳 않고 카뮈를 먹어치웠으며, 그 밖의 많은 것들을 먹어치웠다. 그리고 카뮈는 죽었다. 다시, 그리고 다시. 오늘도 카뮈는 세상의 모든 청춘들의 마음속에 다시 태어나고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것이다. 영원히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처럼. 프로메테우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카뮈에게는 어떨지 모르겠다. 아마 그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장 그르니에는 스승의 현명함으로, 어린 카뮈가 어떤 종류의 명성을 갈구하고 있었음을, 아니 차라리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었음을 간파했다. 그리고 그건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후의 명성을 부인했지만, 바라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의 작동 방식이 시지프의 노동을 닮았다면 더더욱.)

카뮈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사이먼 크리칠리는 철학자들의 죽음을 모은 책에서 카뮈의 죽음을 짧게 서술한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를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시작한다.
"참으로 심각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다. 그것은 자살이다."
카뮈는 50페이지쯤 지나서 이 질문에 답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삶이다."
44세 때 노벨문학상을 받은 카뮈는 슬프게도 3년 후인 1960년 어이없는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의미 없는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이 아마도 카뮈가 대단히 감동적으로 묘사한 부조리의 무작위적인 힘일 것이다. (<죽은 철학자들의 서>(사이먼 크리칠리 지음, 김대연 옮김, 이마고 펴냄), 324~325쪽)

이것이 바로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해, 그의 첫 번째 죽음에 대해, 그리고 오늘도 반복되고 있을 영원한 죽음에 대해 한 마디도 쓸 수 없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에 대해서라면 아무것도 쓸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나 나름대로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하는 노력의 한 방식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사방에서 마감이 나를 죄어들고 있었고, 그 사이로 카뮈가 내게 상기시킨 추억이, 청춘의 시간이 괴롭게 빛나고 있었다. 빛나는 과거란 언제나 괴로운 법이다. 실은 별로 빛나지 않았음을 기억한다면, 더더욱.

그래서 나는 주먹을 꼭 쥐고 책장으로 걸어가 백민석을 집었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그래봤자 마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 페이지, 다만 한 페이지씩 읽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마감에 눈이 부셔서, 아니, 언제나 평범한 플라이 볼을 놓친 후 변명을 늘어놓는 '피너츠' 팀의 외야수 루시 반 펠트가 말한 것처럼,

추억에 눈이 부셔서.

*

"형, 그거 알아요? 형은 참 좆같은 거."

후배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왕십리의 어느 곱창집이었다. 나는 물론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자 문득 자신이 좆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실은 좆같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제법 철학적이고도 성가신 의문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타닥타닥, 커다란 빗방울이 곱창집의 포장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래서 내 인생도 좆같지."

녀석의 말에 따르자면 내 인생이 좆같기 때문에, 자기 인생도 좆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고작 스물여덟 살에 다른 사람까지 좆같이 만들 수 있는 인생이라면 실은 좆같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제법 철학적이고도 성가신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스물일곱에 다른 사람 때문에 좆같아지는 인생이라면 정말 좆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묵묵히 술을 마시고, 곱창을 뒤집었다. 양념도 변변치 못하건만 곱창 맛이 퍽도 맛이 있었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술을 사주었을 뿐이다. 그전에도 사주었고, 앞으로도 사줄 것이다. 한 학번 후배였던 녀석은 당시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직장인이었다. 평생 술을 얻어먹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단 말이다. 술뿐만이 아니다. 신입생 시절부터 녀석에게 빌려주고, 때론 그냥 주었던 그 모든 책, 책, 책들. 이를테면 스무 살의 내가 읽고, 스무 살의 녀석에게 주었던 <시지프 신화>, 혹은 내가 입에 침을 튀며 이야기하던, 백민석을 비롯한 몇몇 작가들의 소설 같은 것들.

그러니까 바로 그런 책들이 문제라는 거요, 녀석이 말했다. 말이 좀 짧았지만 나는 구태여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그 순간 나는 술도 사주고 책도 권하고 말버릇도 참아내는 훌륭한 선배였다. 녀석은 계속해서 그 책들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가치관이 그렇게 박혀버렸고, 그래서 결국 요 모양 요 꼴이 되었다고 했다. 자기는 이렇게 만들어 놓고 나만 쏙 직장인이 되어 자본의 단물을 빨아먹고 있다고 했다. 어쩌면 마지막 말은 내가 다른 선배에게 했던 말인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 어쨌거나 녀석은 제 인생을 나더러 책임지라고 했다.

"그래, 네 말대로 나는 좆같을지도 모르지." 내가 말했다. "그리고 나 때문에 너까지 좆같아졌는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너를 책임진다면, 나는 더 이상 좆같은 놈이 아니잖니? 좆같은 놈은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나는 네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거고. 하지만 네 입장에서도 알지도 못하는 인간에게 인생을 맡길 수는 없는 일이겠지. 그러니까 나는 너를 책임질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내가 카뮈에게 배운 것이었다. 그때 나는 아직 조금쯤은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녀석은 웃었고, 우리는 건배를 했다. 녀석 또한 카뮈를 읽었고, 역시 얼마간은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

처음엔 <내가 사랑한 캔디>로 시작했다. 이어 <목화밭 엽기전>을,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를, <죽은 올빼미 농장>을, <헤이, 우리 소풍 간다>를, <불쌍한 꼬마 한스>를,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을 읽었다. 1995년에 처음 시작되어 2003년에 막을 내린 백민석이라는 세계를, 출간 순서와 상관없이, 내 맘대로, 다시 한 번 방문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제법 슬픈 일이었다.

<러셔>는 읽지 않았다. 나는 <러셔>를 한 번도 읽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그건 '다시' 읽을 수 없는 텍스트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의 소설에 대해 이제 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글쎄.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백민석은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노력하는 독자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읽고 좇던 모든 책의 흔적을 그는, 구태여 광고하지 않지만(작가 후기에서 커트 보네거트의 이름을 언급한 <불쌍한 꼬마 한스>의 경우를 제외하면) 그렇다고 숨기지도 않는다. 그의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그러니 그의 책 뒤에 실린 해설들이 오늘의 시점에선 하나같이 헛소리처럼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노력하는 독자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보다 많지 않다. 그리고 해설을 쓰는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노력하는 독자가 아니다. 그들은 다만 직업적인 독자들일 뿐이다. 직업적인 독자들에 대한 롤랑 바르트와 모리스 나도의 대담을 기억할 것.

나 역시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노력하는 독자는 아니다. 그러니 나는 그의 소설에 대해 할 말이 없다. 몇 가지 키워드를 늘어놓을 수는 있다. 허물어져가는 공동체와 그 자리를 채운 욕망들. 그러니까 폭력과 섹스. 한국 문학의 평균치를 상회하는 피학과 가학. 죄책감이 불러온 과거의 유령들. 혹은 과거의 유령이 환기시키는 죄책감.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던적' 수법들. 글쓰기의 불가능성. 도무지 구해지지 않는 구원과 어디에도 쓸모없는-다만 등장인물들을 좌절시킬 뿐인 진실들. 그러니까 부조리. 뭐 그런 것들.

나는 그저 독자들이 그의 소설을 읽어주기를, 계속해서 읽어주기를, 그리하여 무슨 말이건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결코 할 수 없는 말들을, 나보다 훨씬 더 근사하게. 그것이 나 나름대로 스스로에게 정직한 독자가 되고자하는 노력의 한 방식이다. 그리고 궁금할 뿐이다. 내가 사랑했던 작가의 절필 이유가. 혹은 이후가. 이대로라면 사라진 시인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야만스러운 탐정들>의 두 주인공들처럼 백민석을 찾는 원정대라도 꾸려야 할 지경이다.

*

어쩌면 백민석의 절필은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노력하는 독자가 맞이하는 당연한 결말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에서 자꾸만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자기지시적인 글쓰기와, <죽은 올빼미 농장>에서 마침내 다다른 불모의 땅을 생각하고 있다. 그의 마지막 소설인(<러셔>를 읽지 않은 나는 그냥 그렇게 말하기로 한다) <죽은 올빼미 농장>은 여러 가지 점에서 첫 번째 장편 소설인 <헤이, 우리 소풍 간다>를 닮았다.

<헤이, 우리 소풍 간다>의 인물들은 절대적 폭력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돌아오는 과거의 유령(들)에 쫓긴다. 그들은 다시 모여 과거를 방문하고, 구원을 희구하지만, 같은 실수를 저지른 후 마침내 파멸한다. 백민석은 그들을 위해 판자촌이라는 '예외 상태'의 지역을 제시한다. 그곳은 강박적인 세계고, 모호하고 불길하지만 치명적인 위협으로 가득한 세계다. 그리고 그것은 외상의 형태로 그들 모두에게(다시 말해 우리 모두에게) 계속해서 되돌아온다.

▲ <죽은 올빼미 농장>(백민석 지음, 작가정신 펴냄). ⓒ작가정신
<죽은 올빼미 농장>의 화자 또한 과거의 유령들에 시달린다. 하나는 '인형'으로 불리는, 화자의 유아기적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올빼미 농장'에서 그에게 편지를 보내는 과거의 낯모르는 유령들이다. 화자는 '전형적인 아파트먼트 키드'라는 수식으로 제시되며, '죽은 올빼미 농장'에서 보내는 편지는 화자가 알지 못했던, 우리 모두가 잊었던 과거로부터의 호출이고, 화자는 얼치기 탐정이자 일종의 대리인으로 기능한다. 이미 황무지가, 쓰레기장이 된 농장의 샘을 다시 흐르게 함으로써, 소외되어 죽어갔던 이들을 위무하고 자기 자신과의 화해에도 성공한다. 그리고 '자장가'라는 이름의 선물을 얻는다. 백민석의 소설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달콤한 과거의 한 조각. 난삽하지만 더없이 직접적이었던 <헤이, 우리 소풍 간다>의 긴장은, <죽은 올빼미 농장>을 통해 추상적이고 간접적인 형태로 해소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야말로 작가에게 계속해서 글을 쓰게 만들었던 내적 충동, 혹은 긴장이 해소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단언하고픈 충동을 애써 참고 있는 중이다.

그럼,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진실로 진지한 태도는, 아마도 예술을, 예술 자체를 포기할 때만 도달하게 될 어떤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던 수전 손택을 따라, 그의 예술관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이라고. 소설을 읽고 또 쓰는 태도에 피할 수 없고 외면할 수도 없는 변화가 생긴 것이라고.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노력하는 독자라면, 그리고 그가 직업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면, 언젠가 '글쓰기의 불가능성'이라는 주제를 대면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처음과 끝이 호응할 수 있도록, 카뮈를 인용하며 글을 끝마칠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 카뮈는 이렇게 썼다.

참으로 진지한 문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절필이다. 소설이 쓸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밖에, '라노베'가 새로운 문학인가 어떤가, 신간의 판매지수가 천 대인가 만 대인가 하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런 것은 장난이다. (<시지프 혹은 소설의 신화>, 3쪽)

주의. 상기 본문에는 가짜 인용과 인용임을 표기하지 않고 인용/수정한 문장들이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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