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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덟 개 거울에 비친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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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덟 개 거울에 비친 김대중

[철학자의 서재] <김대중을 생각한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물이야, 인물"

"인물이야, 인물" 우리 아버지가 한 말이다. 1980년 서울의 봄 시절에 TV 뉴스 화면에 나온 김대중을 보고 한 말이다. 나는 아버지 말을 듣고 의아했다. 위인이란 돌아가신 분만 계신 줄 알았는데 살아있는 사람한테 아버지가 "인물이야, 인물" 하니 궁금했다. 아버지 말을 듣고 TV 화면을 다시 쳐다봤다.

얼굴이 약간 부은 듯한 김대중 웃는 모습이 서글서글한 표정이었다. 동네 쌀가게 아저씨 인상이었다. 저런 사람이 인물이라니, 위인이라니. 나는 김대중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어쨌든 우리 아버지가 김대중을 좋게 평가했기 때문에 아버지한테 영향 받은 나는 김대중을 좋게 평가했다.

한복 두루마리를 입고 두 손을 높이 들어 두 손을 맞잡은 사진 위에 쓰인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문구도 김대중을 멋있게 보이게 만드는 요소였다. 노태우 정부 때는 김대중이 제안하는 내용을 조순이 진지하게 받아 적는 모습을 TV에서 보면서 김대중이 실력 있는 사람이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통합진보당 사람들이나 노동조합 쪽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김대중, 노무현이 함께 나오는 손문상의 그림을 저들은 증오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저들이 분노하는 데에는 까닭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가장 큰 이유는 노동 정책, 더 크게는 '외환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을 김대중이 받아들여서 그럴 것이다. 재벌 개혁할 수 있는데 안 하고 이 땅 노동자들만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뒤로 김대중을 생각하면 그 당시의 노동 탄압이 그리 심했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외환 위기 처리 과정에서 김대중이 노동계 쪽으로부터 분노에 가까운 욕을 먹을 만했는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노동자 역사 이야기>(이후 펴냄)의 글쓴이 박준성, <길은 복잡하지 않다>(철수와영희 펴냄)의 글쓴이 이갑용의 생각이 <김대중을 생각한다>(삼인 펴냄)에 들어있다면 이 책은 더 균형 잡힌 책이 되었을 것이다. 비정규직이 절반이 넘는 상황이기에 노동계 쪽 사람 글이 없다는 것은 많이 아쉬운 대목이다.

▲ <김대중을 생각한다>(프레시안 기획, 삼인 펴냄). ⓒ삼인
김대중은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되었어야 했다.

"김 대통령은 DJP연합, IMF 외환 위기, 이인제 후보의 독자 출마 등이 모두 겹친 상태에서도 39만 표, 1.5포인트라는 아주 작은 차이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85쪽)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우선 박정희가 1971년 대선에서 부정 투표를 하고서도 김대중 후보가 얻은 표가 너무 많았다는 사실에 겁을 먹고 그에게 꼬리표 붙이기를 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빨갱이다." "김대중은 똑똑하지만 과격하다." "김대중은 거짓말을 잘한다." 그리고 수구 언론이 지속적으로 집요하게 박정희한테서 바통을 이어받아 꼬리표 붙이기를 했기 때문이다. 2012년 총선에서도 <조선일보>는 통합진보당 비례 대표 후보 이석기를 "빨갱이"라고 했다.

김대중이 잘한 일

2012년 3월 15일 한미 매국 협정이 시작되었다. 1997년 말에 터진 외환 위기는 이 땅 사람들을 겁먹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생겨난 결과는 너무도 참담하다. 사회 양극화가 더 심해졌다. 자살률이 더 늘어났다. 비정규직 노동자 수는 50퍼센트를 넘어섰다. 하지만 한미 매국 협정이 불러일으킬 재앙은 외환 위기 때문에 생긴 재앙을 훨씬 넘어선다. 노무현과 이명박이 이 협정에 대하는 태도는 거의 비슷하다. 아홉 가지가 같고 한 가지만 약간 다를 뿐이다. 이 지점에서 김대중의 뛰어남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김대중 대통령이 가장 잘한 것은 무엇일까? 이건 후임자인 노무현 대통령의 결정적 문제와 연결되는 것인데, 그 시절에도 미국과의 BTI 논의가 있었는데, 한미 FTA 논의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풀어주고 시작한 '4대 선결 조건'을 보면서 그는 BTI 논의를 아예 접어버렸다. 실무자로 정부에 참여하면서 본 것 중에서 미국 앞에서 당당한 외교를 했던 그가 놀라웠다." (275쪽)

우석훈은 김대중 대통령이 가장 잘한 일로 'BTI 논의를 아예 접어버린 일'을 꼽는다. 나는 우석훈 생각에 동의한다. 한미 매국 협정이 불러올 끔찍스러운 결과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에 못지않게 잘한 일을 든다면 남북 통일 방안을 만들어낸 것이다. 박세일은 햇볕 정책도 흡수 통일 정책도 틀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박세일은 햇볕 정책을 뛰어넘는 남북 통일 방안을 내놓지 못한다. 그저 햇볕 정책을 비판만 할 뿐이다.

김대중은 1970년대 초부터 3단계 통일 방안을 끊임없이 다듬고 연구하고 또 다듬은 사람이다. 2000년 6·15 선언으로 뜻을 이룬 이상주의자이면서 현실주의자이다. 2004년에 민주노동당이 의무(무상) 교육, 의무(무상) 의료를 열심히 주장하다가 어느 순간 잊은 것을 볼 때, 이는 진보 정당 지도자들이 배워야 할 사실이다.

수구 언론 월급쟁이들은 '햇볕 정책으로 북한에게 돈을 퍼주기만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서독이 동독에 퍼준 돈에 비하면 그 돈은 새 발의 피다. 남한은 북한에 진짜 퍼주어야 한다.

"남한 GDP의 0.05퍼센트에 불과한 대북 비상업적 경제 지원으로 미루어 북한에 대한 공공 투자는 지금보다 10배 이상은 늘어야 한다. 통합된 지 20년이 되어가는 독일의 경우 여전히 구동독 지역에 대한 재정 지원이 GDP의 5퍼센트가 넘는다(남한의 100배). 그러나 이러한 대북한 공공 투자는 그것이 현대건 삼성이건 재벌이 주도해서는 곤란하다." (<한미 FTA 하나의 협정 엇갈린 '진실'>(시대의 창 펴냄), 269쪽)

남북 통일 문제에 대해서 오랜 기간 공들인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김대중은 이명박이 남북 긴장을 불러일으킬 때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2006년 서울대학교에 가서 젊은이들에게 강연했다. 그는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사실을 힘주어 말했다. 아주 재미있는 말을 섞어가면서 말이다.

"전쟁이 나면 왜 20대가 전쟁터에 나가야 하나요? 전쟁 결정은 40대 이상이 내려놓고, 막상 전쟁에 나가는 것은 20대 젊은이들이에요. 전쟁을 결정한 40대 이상을 전쟁터에 내보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134~135쪽)

이 지점에서 아쉬운 생각도 든다. '4대 선결 조건'을 보면서 'BTI 논의를 아예 접어버린' 통찰력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도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왜 김대중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이 성급하게 이끌어나가려는 한미 매국 협정을 맺지 말라고 조언하지 못했을까? 남북 통일 방안에 대해서는 깊이 연구했지만 한미 매국 협정에 대해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잘 몰랐을 것이다. 조금 알더라도 그 피해가 끔찍스러울 것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이해영 못지않은 한미 매국 협정 전문가 우석훈이 한 말을 들어보면 이해가 된다.

"한미 FTA라는 사건은 2006년 1월 18일 갑자기 출현했다. 아주 소수의 전문가 혹은 외교관을 제외하면 어떤 일이 진행되는지 모르고 있던 일이다. 경제학자들은 물론이고 정치적 변화를 분석하는 정치학자들이나 사회의 흐름을 지켜보는 사회학자들은 물론 국제 협상 특히 통상 환경을 분석하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한미 FTA는 거의 '초자연적'인 현상이었다."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우석훈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 3쪽)

IMF 사태를 잘 처리했다고 볼 수 있나?

대체로 김대중은 대통령 일을 잘해냈지만 외환 위기(IMF 사태) 처리에 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이 책에서도 여러 사람이 김대중이 외환 위기를 빠르게 잘 처리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박노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은 작정하고 외환 위기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했다.

"외환 위기 당시 박영철 금융연구원장은 "미 재무부는 위기를 아시아로 확대하지 않고 타이에서 문제를 끝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미국이 동아시아의 금융 위기를 방조함으로써 이 지역에 구조 개혁과 시장 개방을 관철하고 미국 자본의 투자 기회를 확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세계무역기구(WTO)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약속했던 자본 시장 개방이 더디게 진행되자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국에 외환 위기 가능성을 경고하거나 동남아의 위기가 한국에 확산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을 이유가 없었다. 1980년대의 라틴 아메리카에서처럼 위기를 한국의 시장 개방을 가속화하는 데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일설에 따르면 1997년 7월 CIA는 한국에 50여 명의 요원을 급파해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샅샅이 조사하고 돌아갔고 같은 시기에 한국에 상주하는 15명의 CIA 요원들도 매우 바쁘게 움직였다고 한다. (…) CIA는 8월에 이미 한국의 외환 위기 가능성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에 외환 위기와 관련해 어떠한 경고도 하지 않았고 외환 위기의 확산을 적극적으로 막지도 않았다."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지주형 지음, 책세상 펴냄), 171~173쪽)

이갑용은 김대중이 외환 위기를 처리한 방식에 대해서 분노한다.

"나는 IMF보다 김대중 정권이 더 미웠다. 민주노총 위원장 때 캉드시 IMF 총재를 만났다. 우리는 IMF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너희가 뭔데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노동 시장 유연화를 강요하며 구조 조정과 정리 해고의 고통으로 몰아가느냐"는 항의였다. 캉드시는 민주노총에 "그건 너희 정부에 가서 따지라"고 했다. IMF는 재벌 개혁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실제 IMF가 요구한 구제 방안에는 재벌 개혁이 있었다. 재벌이란 집단은 자본주의의 앞잡이인 IMF가 보기에도 자유주의적 시장 질서에 맞지 않는 문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 시장의 유연화는 IMF의 요구 사항에도 있었다. 그건 가장 강도 높게 주문한 주요 요구 사항이 아니었다.

"김대중 정권이 IMF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는 굴욕적인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한 비판이 있었듯, 한국 정부는 위기를 넘기는 것에 급급해 IMF가 어떤 집단인지, 이 국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헤아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득권층을 건드리지 않고 약자들의 희생을 이용해, 정리해고와 같은 강제 구조조정을 통해서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다." (<길은 복잡하지 않다>, 208쪽)

기득권층을 건드리지 않고 약자들의 희생을 이용해, 정리 해고와 같은 강제 구조 조정을 통해서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다는 이갑용의 이 말에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IMF보다 김대중 정권이 더 미웠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김대중이 IMF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는 굴욕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그의 말에도 동의할 수 없다.

이갑용은 한국 정부가 위기를 넘기는 것에 급급해 IMF가 어떤 집단인지, 이 국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헤아리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당시에 미국과 캉드시는 국난의 원인이 무엇인지 헤아릴 시간을 주지 않았다. 한미 매국 협정에 관해서는 이 나라 통치자가 협정이 무엇인지 헤아릴 시간이 있었다. IMF 사태는 김영삼 정권의 무능으로 인해서 이미 터진 일이었다. 이 나라 곳간에 외국 돈이 바닥난 상태였다. 미국 꼭두각시 캉드시 IMF 총재가 칼 들고 자신들 말 듣지 않으면 우리나라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던 상황이었다.

아쉬운 점은 있다. IMF 사태가 왜 일어났는지, 김영삼이 잘못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김대중이 IMF 사태에 어찌 대응했는지 치열한 논쟁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런 논쟁이 치열하게 이루어졌다면 민주 시민들이 한미 매국 협정이 그렇게 쉽게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되는 것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 시민의 눈이 무서웠다면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그 협정을 그렇게 날치기로 통과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며, 민주당 국회의원 87명 중 47명 역시 날치기 통과를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를 잃었더라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송아지가 또 태어나기 때문이다. 한미 매국 협정 폐기가 정답이다.

다음과 같은 예는 김대중을 변호할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김대중의 경제 고문이었던 유종근 당시 전북도지사는 한 경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리 해고에 대한 당시 김대중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DJ는 외국 자본에 (우리 기업이) 먹히면 안 된다고 하더라. 18일 밤 당선이 확정되고 당선자 성명을 봤는데(반시장 논리가 가득해서) 역시나 생각했다. DJ에게 기자 회견을 하면 틀림없이 IMF에 대해 물을 테니 조심하라고 당부했는데 그 양반은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 되면 안 받아들이더라. 오히려 내게 노동자들을 길거리 내보내면 어떻게 되느냐. 당신은 대학 강단에서만 서 있지 않았냐며. 결국 (기자 회견에서 DJ가) 마음대로 정리 해고를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바람에 시장에 또 충격을 줬다." (<서울경제>, 2006년 1월 10일자, <한국 신자유주의 기원과 형성>, 204쪽에서 재인용)

반면에 이갑용은 김대중의 노동 정책, 김대중이 발 딛고 있는 민주당에 대해서도 분노한다.

"김대중 정권은 노동자에게 끝가지 가혹했다. 심지어 8월 15일 특별 사면 복권 대상자 7000명 가운데 노동 운동으로 구속된 노동자는 1명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우리는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국민회의 또는 민주당은 중산층과 서민의 당임을 자처했지만, 그들의 정책이란 것은 아무리 급진적으로 해석해도 중도 우파,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넘어서지 못한다. 때론 시장 경제조차 억압하는 독재 정권과 만났을 때 이들이 일시적으로 민주의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한 이들은 노동자들이 이들과 연대할 수 있는 지점들이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용산의 재개발이 시작된 건 현 정권 때가 아니었고, 기륭이나 이랜드 투쟁은 지난 10년 동안에 일어난 투쟁이란 것을. 개발 자본, 건설 자본, 재벌 자본들은 자유당, 공화당,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국민회의, 민주당, 한나라당 역대 어느 정권과도 변함없이 동거를 했다. 다만, 편안한 동거였느냐, 조금 불편한 동거였는냐 하는 작은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길은 복잡하지 않다>, 209쪽)

김대중에게 과오는 있었지만 대통령 일을 잘한 사람이다. 이 책에 글을 쓴 스물여덟 명 글쓴이 다수가 인정한다. 김대중은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성치 않은 늙은 몸을 이끌고 이 나라 통일 문제, 민주화 문제를 풀기 위하여 온 몸을 바쳤다. 오죽하면 <오마이뉴스> 대표기자 오연호가 부끄럽다고 말했겠는가.

김대중이 한 다음 말은 이 땅이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는 데 꼭 필요한 말이다. 특히 총선과 대선이 치러지는 2012년 지금 민주 시민들이 꼭 귀담아 들을 말이다.

"이기는 길은 모든 사람이 공개적으로 정부에 옳은 소리로 비판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못 하는 사람은 투표를 해서 나쁜 정당에 투표하지 않으면 된다. 또 많은 사람들이 나쁜 신문을 보지 않고, 또 집회에 나가고 하면 힘이 커진다. 작게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된다. 하려고 하면 너무 많다.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을 할 수도 있다." (<오마이뉴스>, 2012년 1월 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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