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피랑에서 남망산(72미터)으로 가는 길은 여러 길이 있지만, 나그네는 '덤바우길'을 그중 편애한다. 동피랑 2길 나무 계단을 내려가면 동네 구멍가게처럼 주택가에 들어선 쌍둥이 꿀빵집이 나타난다. 꿀빵집 옆길을 따라 아래로 이어진 길이 덤바우길이다.
원래 이 골목길 아래는 바다였는데 매립으로 육지가 되었다. 매립되기 전 해안에 있던 큰 바위를 덤바위 혹은 '뜬바우'라 했었다 한다. 이 일대 마을은 그 바위에서 이름을 따와 '덤바우골'이라 했다. 안타깝게도 덤바위는 1970년경 도로 확장 공사 때 파괴돼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덤바위에는 통영이 이순신 장군의 유적만큼이나 소중히 보존했어야 할 통제사 '김영' 암각비(巖刻碑)가 새겨져 있었으니 더더욱 애석한 일이다.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떠나게 하고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하게 하는 곳, 통영 전경. ⓒ이상희 사진작가 제공 |
순조 29년(1829년) 이 일대에 큰 화재가 발생해 민가 수백 호가 불타는 참화를 겪었다. 당시 삼도수군통제사는 166대 김영 통제사였다. 불이 나자 김영 통제사는 덤바위에 올라가 몇 날 몇 밤을 지휘하며 화재를 진압했다. 화재가 수습된 뒤 통제사는 집을 잃은 이재민들에게 남망산의 소나무를 베어다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화재로 집을 잃은 백성에게 살길을 열어준 김영 통제사에게 돌아온 것은 상이 아니라 벌이었다. 그 일로 김영 통제사는 파직당했다. 궁궐 건축이나 군사적 목적으로만 사용해야 하는 소나무를 베어 백성들이 집을 짓게 했다는 죄목이었다. 금송령을 어긴 것이다.
김영 통제사는 1830년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처벌을 받았는데 남망산의 소나무를 베어내 백성의 집을 짓게 한 것이 빌미가 되어 <대명률(大明律)> 이율(吏律) 제서유위조(制書有違條)를 위반한 죄를 뒤집어썼다. 제서유위율은 임금의 교지(敎旨)와 세자(世子)의 영지(令旨)를 위반한 자를 다스리는 율법인데 죄인은 장 100의 형을 받았다. 김영 통제사 또한 100대의 매를 맞고 파직을 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와 우포도대장 등을 지냈던 김영 통제사는 후일 복직되어 우포도대장과 좌포도대장 등을 지냈다.
백성을 위해 일했다는 이유로 관리를 파직한 이 사건은 조선이 백성의 나라가 아니라 왕과 사대부들의 나라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통영 사람들은 자신들을 살려준 김영 통제사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바위에 그 내력을 새겼다. 하지만 바위가 파괴되면서 그 비문 또한 사라지고 말았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덤바위 파괴는 개발의 망령 앞에 우리의 문화의식이 얼마나 비루했던가를 보여주는 지표의 하나다. 개발이란 이름으로 사라져버린 이 땅의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은 또 얼마인가. 김영 통제사는 이순신 장군만큼이나 통영 사람들에게 고마운 존재이며 통영을 거쳐간 그 어떤 통제사보다도 통영 사람들을 사랑한 관리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은덕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지금이라도 그를 기리는 비석 하나쯤 세우는 것이 통영 땅에 사는 후손들의 예의가 아닐까!
옛날 영화 속 같은 골목길
동피랑에서 덤바우길을 내려오는 골목 초입, 낡은 집 앞에는 긴 장대에 태극기와 삼색 리본, 수박 무늬 고무공이 매달려 있다. 아마도 점집이거나 무당집일 것이다. 바닷가에 인접한 까닭에 이 동네에도 유난히 무속인들의 집이 많다. 그 집 앞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쭉 내려간다. 가파르고 비좁은 골목. 1960-1970년대를 재현한 드라마 세트장에나 나올 법한 참 오래된 골목이다. 막혔는가 싶으면 뚫려 있고 이 길이 맞다 싶어 가다 보면 막다른 골목이다. 급경사의 골목길 시멘트 바닥에는 미끄럼 방지용 선들이 그어져 있다. 시멘트로 틈이 막힌 석축, 균열이 생긴 그 작은 틈새를 뚫고 풀들이 자란다. 풀들의 놀라운 생명력은 이 비탈지고 강퍅한 언덕에 다닥다닥 붙어서 연명하는 생애들의 비밀과 상통하는지도 모르겠다.
좁은 골목을 내려오면 대형 마트 옆에 초라한 슈퍼마켓 하나가 손등의 상처 딱지처럼 붙어 있다.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겨우 숨이나 끊어지지 않았을 터다. 대형마트 뒷길을 따라가면 동호탕. 긴 굴뚝을 가진 오래되고 낡은 동네 목욕탕이다. 목욕탕집은 한때 부의 상징이기도 했으나 이제는 퇴락하고 영락하여 언제 막이 내릴지 모르는 무대 같다. 동호탕 골목을 빠져나와 강구안 쪽으로 걷는데 할머니 한 분이 빈 고무대야를 얹은 작은 수레를 밀고 힘겹게 길을 간다. 텃밭에서 기른 채전거리라도 팔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건너편 차도에서는 할아버지 한 분이 폐지를 가득 실은 손수레를 끌고 자동차와 나란히 달린다. 세계의 끝에서도 삶은 지속한다.
강구안 주차장 옆길을 따라 남망산 공원에 오른다. 김영 통제사가 소나무를 베어다 백성 집을 지어줬던 그 산이다. 남망산에는 시민문화회관과 조각공원 등이 있어 공연이나 전시회를 보거나 산책 삼아 많은 사람이 찾는다. 통영의 주산은 여황산이다. 통영 사람들은 '안뒷산'이라 한다. 병풍처럼 길게 뻗은 여황산의 동쪽은 '망일봉', 서쪽은 '천함산', 중앙이 '남망산'이다. 통영 사람들은 이 산들에 둘러싸인 비좁은 평지나 산비탈에 기대어 살아간다.
▲덤바우길은 마치 시간 여행자가 과거로 가는 타임 터널 같다. ⓒ강제윤 |
통영 바다의 금광
남망산에는 또 금광 터도 있다. 지금까지 인류는 금을 화성암이나 변성암의 석영맥(石英脈) 속에서 황철석·방연석·텅스텐 등의 광물과 함께 찾아냈다. 통영의 땅에는 중생대 말기 백악기에 분출된 화성암이 곳곳에 깔려 있다. 그래서 남망산에는 일제 말까지 금을 캐던 금광 터가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일본 강점기 때는 남망산 부근 장좌도 주위와 장좌도에서 공주 섬까지 이어진 150미터 해저에서도 금을 캤었다 한다.
남망산과 장좌도 해저에 금광이 생기게 된 내력이 흥미롭다. 물론 신화이고 전설이다. 남망산 아래 충무 조선공사 동쪽으로 튀어나온 작은 동산은 원래 섬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금광을 채굴하면서 남망산과 이어졌고 근래에 항만 매립 공사 후 육지 가운데 동산이 되고 말았다. 이 동산이 장좌도였다.
오랜 옛날 정량동 덤바우골의 갯고랑(개울)에서 아침 일찍 어느 아낙네가 서답(빨래)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졌다. 이상한 예감에 고개를 들어보니 키가 하늘에 닿을 듯 장대한 '마구 할매'가 남쪽 바다에서 통영 해안으로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깜짝 놀란 아낙네가 '마구 할매 온다' 소리치며 빨랫방망이로 하늘을 가리키는 순간 마구 할매 또한 깜짝 놀라 치마폭에 싸고 오던 금덩어리를 모두 다 바다에 내던지고 안뒷산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마구 할매가 얼떨결에 놓쳐버린 금덩어리가 바닷속에 잠기며 섬으로 변해버렸다. 그 섬이 장좌도였다. 그래서 장좌도에 금광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마구 할미'는 창조 여신인 제주의 '설문대 할망'이나 지리산의 '마고 할미'의 변형으로 여겨진다.
▲남망산 아래 강구안 바다는 호수나 연못처럼 아늑하다. ⓒ이상희 사진작가 제공 |
밀수의 추억
공주섬과 밀수에 얽힌 사연도 재미있다.
"통영 항남동 바닥에서 밀수 안 한 사람이 어딨노. 그라고 밀수 제품 한 번 안 써본 사람이 있겠나." (<한산신문> 2010년 2월 16일 김상현 기자의 기사 중)
수산업으로 호황을 누리던 시절 통영은 밀수꾼들의 천국이기도 했다. 무역을 위해 드나드는 배들이 많았으니 밀수의 기회도 많았다. 게다가 밀수만을 위해 전문적으로 한일 간을 오가는 배들도 적지 않았다. 소매물도 산꼭대기에 세관의 밀수 감시 초소가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시절에는 경기가 좋아 사업도 잘됐다. "중절모를 수입해 1주일 장사하면 거제도 땅 세 마지기를 산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통영 가 돈 자랑 하지 말라"는 속담까지 생겼을 것이다. 흔한 표현이지만 통영에서는 개도 돈다발을 물고 다닌다 했다. 거지도 통영 거지는 캥거루 가죽 잠바를 입고 다닌다 했다.
어떤 때는 통영 공주 섬 바다에 일제 '가죽 잠바'가 둥둥 떠다니기도 했다. '가죽 잠바'가 귀하던 시절 일제 '가죽 잠바'를 밀수해 오다 검문에 걸릴 것 같으면 비닐에 잘 싸서 그대로 바다에 던져버렸다. 다음날 찾아가기 위해서였지만 '가죽 잠바'는 바다에 던져진 순간 지나가던 다른 배 차지가 되고 만다. 그러니 분실된 밀수품 때문에 다툼도 많았다.
통영 앞바다에는 일본을 왕래하며 통영의 수산물을 실어 나르는 활어 무역선이 늘 30-40척씩 떠 있곤 했다. 그 배들이 다들 밀수를 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선원들은 시계 없이 일본에 갔다가 돌아올 때는 손목에 일제 카시오 시계를 차고 와서 내다 팔았다. 지퍼가 귀한 시절이라 일제 지퍼도 숨겨 들어왔다. 다른 지퍼들은 툭하면 터지거나 고장 나는데 유독 YKK 지퍼만은 성능이 좋았다. YKK는 세계 지퍼업계의 대표 브랜드다. 세계 지퍼 시장의 50%가 YKK 기술로 만들어진 지퍼를 쓴다.
그 YKK 지퍼가 다 통영에서 조달됐다. 물론 밀수품이었다. 통영에서 밀수한 YKK 지퍼가 공급되지 않으면 서울의 옷 공장에서는 청바지를 만들 수 없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었다. '코끼리 표' 밥통이나 벨벳 등을 밀수해 큰 이익을 챙기는 사람도 많았다. 녹용이나 금괴도 밀수했다. 1964년에는 통영항 녹용 밀수 사건의 상금 문제로 시비가 붙어 부산세관 감시과장이 권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그만큼 밀수는 밀수꾼이나 감시자들에게 모두 황금어장이었다. 그래서 통영에는 일제 때부터 1970년대까지 밀수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한다.
남망산 공원 정상에는 1953년 시민의 성금으로 세운 이순신 장군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조선 시대 무과 시험을 치르던 연무정도 있고 통영 시내를 한눈에 전망할 수 있는 수향정도 있다. 남망산 언덕에는 본래 주민들이 살았었다. 1997년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생긴 것이 시민문화회관이다. 이 언덕에는 또 국내 작가 5명과 국외 작가 10명의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나그네는 문외한이라 그런지 조각 작품들의 의미를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작품이 아니라 설명을 적은 안내판을 보고서야 겨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것이 단지 나그네의 무지 탓이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그네에게는 조각품들보다 남망산 아래 마을의 낡은 건물과 지붕들이 더 예술적으로 느껴진다. 통영에 피난 와 살던 이중섭도 이 남망산을 자주 올랐던가 보다. 그의 그림에도 남망산에서 바라본 통영 풍경이 있다. 일몰 직전 산책을 나와 가만히 앉아서 강구안과 통영 풍경을 바라보면 괜히 설레고 마구마구 행복해지는 뒷동산이다.
*통영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무궁무진하지만 예정했던 대로 이쯤에서 연재를 끝냅니다. 통영에 대한 학위 논문 한 편을 쓴 듯 시원섭섭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애독해 주신 독자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강제윤 합장)
□ 인문학습원 강제윤 시인이 포토에세이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이다>(호미 펴냄)를 출간했습니다. □ 7월 <섬학교> 안내 : '홍길동의 율도국' 위도와 채석강, 내소사, 매창 기행 일시 및 장소 : 7월 6일(토)∼7일(일), 서해 절경 위도 위도는 한때 핵폐기장 유치 논란으로 떠들썩했던 섬이지만 실상은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의 모티브가 됐던 섬으로 먼저 알려졌습니다. 영광굴비의 명성 또한 위도 앞바다에서 잡은 황금 조기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조기 파시 때면 수천 척의 어선 이 몰려와 흥청거렸던 조기의 섬입니다. ☞ 자세한 내용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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