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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 고립된 46인! 그 섬은 천국?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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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 고립된 46인! 그 섬은 천국? 지옥?

[철학자의 서재] 아르토 파실린나의 <유쾌한 천국의 죄수들>

로빈슨 크루소와 천국의 죄수들

로빈슨 크루소는 난파당해 무인도에 혼자 불시착한다. 그곳에서 그가 할 일은 구조되기까지 무조건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중요했다.

훌륭하게 사회화가 된 로빈슨 크루소가 어찌어찌하여 무인도에서 살아남긴 했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심심하다. 외롭다.' 이야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무인도의 적막함이 로빈슨 크루소를 괴롭힌 것이다. 새를 벗 삼아 공을 벗 삼아 무인도를 벗어날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었다. 만약 그런 삶에 만족했다면 굳이 복잡한 사회로 다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웠을 것이다. 자기와 똑같은, 살아 숨 쉬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혼자가 아닌 다른 여러 사람들과 함께 무인도에 가게 된다면, 구조될 때까지 그들과 행복하게 살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콩 한 쪽도 나눠먹자고 한다지만 내 배가 너무 고파 죽을 것 같다면, 그 콩은 아무도 모르게 혼자 먹어야 할 나만의 생명줄일 것이다. 결코 그 누구와도 함께 나눌 수 없는 생명줄 말이다. 혼자라면 이런 고민을 안 할 텐데, 누가 내 옆에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그 사람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제 로빈슨 크루소는 자신의 생존 이외에 다른 것, 누군가와 어떻게 함께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될 것이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고립된 섬에서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려고 한 사람, 그래서 40여 명의 사람들에게 한 번 버텨보라고 무인도에 불시착시킨 사람이 있다. 핀란드의 소설가 아르토 파실린나, 바로 그다. 그는 소설 <유쾌한 천국의 죄수들>(이명 옮김, 노마드북스 펴냄)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여 무인도에 불시착한 40여 명의 사람들이 구조될 때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우리가 유토피아로 규정짓고 현실에서는 절대로 실현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 원시적 공산주의 사회의 모습으로 말이다.

▲ <유쾌한 천국의 죄수들>(아르토 파실린나 지음, 이명 옮김, 노마드북스 펴냄). ⓒ노마드북스
현대 유럽 자본주의 사회를 제 바닥으로 알고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아무 것도 없는 무인도에 불시착했다. 어서 빨리 내 집으로 돌아가 편안한 소파에 몸을 기대고 싶은데, 무인도에서 빠져 나갈 방법이 보이질 않는다. 더구나 본래 살던 생활 습관이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니 이 불편함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정말 막막하기 이를 데 없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역사적 유물론의 전개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대화되면 자체 모순의 폭발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가 멸망하고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했다. 그때가 되면 다들 네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쓰고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이제껏 내 것이라 이름표 붙이고 품에 끌어안고 살던 사람들이, 아무리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대화되어 순리처럼 공산주의로 옮겨가게 되었다고 해서, 내 것 네 것 가리지 말고 다 같이 쓰고 살자고 할 수 있겠는가?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더라도 결국 그 사회를 유지하는, 다시 말해서 정치할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고 그 밑에서 피정치인으로 살아갈 사람들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자본의 그늘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또 다른 무언가에 의해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다른 방식의 관계를 만들어낼 것이다. 여전히 불평등은 남아 있을 것이며, 그로 인해 사람들은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런 악순환으로 인해 공산주의 사회는 결코 현실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저 피안의 세계일뿐이다.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을 보라. 그런 세상이 올 거라고 주장했지만 그들의 지금 모습은 어떠한가? 공산 사회는 그저 신기루일 뿐이라고 여기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그러할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 한 조각은 비워두지 않는가, 그런 세상이 왔으면 참 좋겠다고 말이다. 다 같이 잘 살면 참 좋을 텐데, 그렇게 세상을 다스려주는 게 정치라면 정치, 그거 할 만한 것일 텐데. 왜 그게 안 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다 같이 살아야 할 세상에서 혼자만 잘 살고 싶은 욕심 때문일 것이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싶고 더 많이 누리고 싶은 것, 그것을 위해서 누군가의 등을 밟고 올라가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 그런 게 정치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아닐까.

하지만 정치는 그런 게 아니다. 다 같이 잘 사는 것, 다 같이 누리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정치다. 그런 정치가 가능하려면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하는데, 욕심을 버려야 하는데, 욕심 그게 참 버리기엔 아까운 묘한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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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천국의 죄수들>. 제목, 참 그럴싸하다. 그러면 지옥의 시민들도 있나? 당신은 어느 쪽에 살고 싶은가? 천국 아니면 지옥? 천국이 좋긴 한데 죄수라니 그거 참. 어찌되었거나 그 무인도에서 40여 명의 사람들이 살아남았다고 하니, 그다지 나쁜 세상 같지는 않다. 더구나 그곳에 영원히 머물길 원했던 이도 있었으니 뭔가 눈길을 끌 만한 무엇이 있지 않았을까?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경제적으로 빈곤을 겪는 현실보다 더 나은 무엇이 있기에, 죄수라도 좋으니 유쾌한 천국이 되는 그곳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파실린나가 꿈꾸는 그 세계, 그의 표현대로라면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이며,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인 그곳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여기 48명의 로빈슨 크루소가 있다. 여성 26명, 남성 22명. 직업군은 의사, 간호사, 산파, 벌목꾼, 삼림전문교관 그리고 나름 시선을 제공하는 신문기자. 성비나 직업 면에서 그다지 나쁘지 않게 골고루 모여 있다. 나라도 제각각이다.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영국. 이거 말이라도 제대로 통하려나. 하지만 '하필 내가 탄 비행기가 추락할 건 뭐람?'이라 투정부릴 새도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평범한 시민이었던 내가 한순간 로빈슨 크루소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축구공에 말 걸지 않아도 될 만큼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행일까? 차라리 혼자 무인도에 남아 고생하다가 살아남는 게 마음 편한 것 아니었을까?

인간은 정치적 존재라는 말을 내걸지 않아도, 여럿이 함께 고생하는 것이 혼자 고생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무인도에 불시착한 사람들도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함께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회의였다. 단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유로 남의 음식을 훔치거나 공동체에 반항하는 사태들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무질서에서 벗어나 효율적으로 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팀을 구성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예를 들어 먹을 것을 제공할 낚시 팀, 병을 치료해 주거나 예방하는 데 힘을 쓸 위생 팀, 언제라도 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줄 화력 팀 등, 의식주와 관련된 팀들을 만들고 팀장으로 하여금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우리로 치자면 사회 전반이 잘 돌아가도록 행정부/내각을 구성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각자 자기가 소속된 팀에서 맡은 바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써 모두가 함께 사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삶에 필요한 것들이 하나둘씩 만들어지고 그로 인해 생활은 조금씩 편리해지기 시작한다. 먹는 것이 해결되었으니 이제 공동체의 질서를 확고히 해 둘 필요가 있다. 드디어 이 무인도에도 정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정치의 시작은 약속으로부터 출발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사는 것이니 서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약속들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갈등이나 충돌로부터 서로를 보호할 수 있으며,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국의 죄수들이 맺은 약속을 살펴보자. 우선 캠프 관리를 위해 2주에 1회씩 전체 회의를 하며 안건을 공개 토의한 후 투표를 통해 모든 사안을 결정하기로 하였다. 서로의 욕구를 조절하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최선의 방법은 함께 이야기하고 논의하여 결정하는 것이다. 이제 이 캠프에는 최고 의사를 결정하는 기구가 탄생한 셈이다.

둘째, 공동 소유이다. 공동체의 삶과 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행위들을 엄단하고 예방하기 위해 재산의 사유화는 최소한에서만 허용하기로 결정한다.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한다면 남의 것을 훔치거나 피해를 입히면서까지 따로 소유하고 축적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버리고 원래 상태로 돌아가면 돼. 사는 게 뭐야? 빈손으로 와서 헛지랄하다가 다시 빈손으로 가는 거 아냐? 인간은 너무 많은 것들을 손에 들고 있어. 두 손 가득히 불끈 쥔 채 놓질 않아. 한번 움켜쥐면 놓을 줄을 모르지. 인간이 잡아먹는 저 짐승들을 봐. 걔네들이 지 먹을 거 외에 손에 뭐 들고 다니는 거 봤어? 자기 먹을 거 이상으로 욕심내지 않는 짐승들의 그 무소유 정신을 인간들은 배워야 돼!"

사유 재산의 철폐. 이것은 공산주의 사회가 현실화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반이자 현실화될 수 없는 높은 장벽이기도 하다. 이 무인도의 삶이 원시 공산주의 사회의 전형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재산을 공유하였기 때문이다.

정치적 행위와 경제적 행위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마련되었으니 이제 필요한 것은 교육, 그래서 이들이 선택한 마지막 약속은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 교육이었다.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만큼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의사소통이 큰 걸림돌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언어는 현실적 강국의 언어가 아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였다.

언론을 막아 정치를 해보려는 현실과는 달리 언론의 육성을 통해 정치를 하고자 하는 것이 이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힘이었다. 정치, 경제, 교육, 이 세 영역에서 그들이 맺었던 약속들이 잘 지켜진다면 이곳이야말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 바로 그곳이 아니겠는가?

바를 정(正), 다스릴 치(治), 그게 정치(政治)

시청률 40퍼센트의 고공 행진을 하며 끝난 어느 드라마에서 임금이 자신의 정치관을 이렇게 말했다.

"정치란 바를 정(正), 둘 치(治), 즉 있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 두는 것이 정치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하나를 버리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 하나를 얻기 위해 천하를 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소중한 것일지라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는 이상적 정치론이다. 그리고 나라의 기강을 썩게 만드는 뿌리들은 과감히 잘라내고 능력을 갖춘 이를 제자리에 두어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정치다. 천국의 죄수들이 공동체를 위해 한 일이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자리를 찾아 제 능력을 발휘하도록 팀을 구성했던 것을 보면, 아무래도 능력을 갖춘 이들을 그 능력이 잘 발휘될 수 있는 자리에 놓는 것이 바른 정치일 듯싶다. 그렇게 보면 정치란 아주 작게는 제대로 된 정치인을 뽑는 것이 될 것이다.

얼마 전 우리는 제대로 된 정치인을 뽑겠다고 판을 벌였다. 한바탕 난장을 치르고 나니 결과는 예상외였다. 자타가 떠들어대던 정치 전문가이며 대권주자라던 3~4선의 중진 의원들이 대거 낙선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그들을 대신할 정치 초보자들이 정국의 변화를 몰고 올 것이라며 새롭게 등장했다. 누군가는 총선 결과의 무한 책임론을 들어 사퇴를 하고 누군가는 권력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자리가 되었다. 내가 던진 한 표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어떤 미래를 꿈꾸게 할지 생각해 보았는가? 우리의 바람대로 이들은 이전의 그들과 다른 새로운 정치의 모습을 보여줄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줄까?

대통령을 뽑든 국회의원을 뽑든, 어찌되었든지 간에 선거는 능력을 갖춘 이를 그에 걸맞은 자리에 두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누군가를 선택하는 하나의 정치적 행위이다. 한 표 한 표가 우리의 미래를 만드는 무한 책임의 한 걸음이지만, 누구처럼 텅 빈 주머니를 불룩하게 만들어 부자를 만들어주겠다는 감언이설에 혹하게 만들어버리는 유혹의 한 걸음이기도 하다. 그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바른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할 텐데, 그러기엔 우리의 욕심은 끝이 없다. 하나를 버리면 다른 하나를 얻을 수 있는데, 꽉 움켜쥐고 그 어느 것도 버리지 않으려는 그 욕심 말이다.

파실린나는 누군가의 입을 통해 죄수들이 살고 있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 이렇게 말했다.

"우리 공동체가 원시 공산주의 체제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우리들 중 몇이나 될까. 우린 기본적으로 서로 분쟁의 소지가 될 만한 게 아무것도 없네. 모든 소유물은 공동 소유이고 기본적인 욕구를 위한 것들도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처럼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지. 노동에 비례해서 분배받거나 무노동 무임금도 아니잖나. 게다가 월세나 보증금도 없는 무료 주택에 살지. 그 비싼 건강 진단과 치료도 무료지. 문턱 높은 은행도 없지.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화폐도 없지."

세상이 이 말처럼 되어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게 정(正)치로서의 정(政)치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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