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고 사는 기자와 같은 이들에게 2010년 프랑스의 사회학자 미셀 팽송과 모니크 팽송-샤를로 부부가 펴냈던 <부자들의 대통령>(장행훈 옮김, 프리뷰 펴냄)은 언뜻 지루한 책으로 비춰진다. 히로세 다카시(廣瀨隆)가 쓴 20세기 자본사 <제1권력>(프로메테우스 펴냄)을 읽는 것 같이 인명 사전의 느낌도 나고, 나열되는 프랑스의 무수한 기업, 지역, 제도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인터넷 검색창을 띄워야 한다.
그럼에도 책을 도중에 내려놓지 않았던 건 고령의 사회학자들이 자국의 대통령을 '비판'하는 방식 때문이다. 25년 동안 프랑스 부유층의 생활상과 집단 사고를 연구했던 두 저자는 그간 프랑스에서 양심이 남아있던 언론인의 보도 내용을 차곡차곡 배열하고 그 행간에 담겨있는 의미를 자신들의 전문 지식을 활용해 보충했다.
저자들은 감정 섞인 정치적 비난보다는 쉽게 지나쳤던, 또는 잊혔던 사실들을 끄집어내 니콜라 사르코지와 그를 친구로 둔 소수의 자본가들이 정치와 산업을 주무르는 과두 권력을 어떻게 생성했는지 담담하게 묘사한다. 이 '지루한' 서술이 가지는 장점은, '5년 사이클'에 익숙해져 비난의 아드레날린을 분출하기 바빴던 이들에게 진짜 대항해야할 '적'의 실체를 알려주는데 있다. 이를 깨닫게 되면 노학자들이 결론에 가서 내지르는 호소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르코지의 뻔뻔함은 어디서 나왔나?
▲ <부자들의 대통령>(미셀 팽송·모니크 팽송-샤를로 지음, 장행훈 옮김, 프리뷰 펴냄). ⓒ프리뷰 |
대통령이 된 지 두 달 만에 그가 내린 조치는 조세 상한선을 60퍼센트에서 50퍼센트로 낮춘 것이다. 여기에 세무사나 이해할 수 있는 복잡한 면세 조항은 점점 늘어나 부유층은 추가 감세 혜택을 받았다. 이 조치로 높은 세금을 피해 이민을 간 부자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반면에 일반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산업재해 보상금이 소득으로 간주돼 세금이 부과됐다. 이후 프랑스 국고 수입은 27퍼센트 줄어들었고 정부 부채는 20퍼센트 늘어났다.
사르코지는 재벌들의 친구였을 뿐 아니라 언론사 간부들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는 공영 방송의 광고를 폐지하고 민영 방송사에 광고를 몰아달라는 업계의 요청에 따라 '공영 텔레비전 개혁'을 추진한다. 공영 방송 경영진에 자발적인 광고 폐지를 압박했고, 공영 방송 사장을 자신이 선호하는 인물로 교체하기도 했다.
대통령에게 공영 방송 사장 임명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의회 심의를 거치기도 전이었다. 민영 방송의 보도국장을 방송사가 아닌 엘리제궁에서 발표하는 해프닝도 빚어졌다.
사르코지는 '자기 사람'을 챙기는 데는 철저했고, 공익과 사익을 구분하지 않고 처신했다. 뇌이 시장과 오-드-센 도의회 의장 시절 밑에 두었던 측근을 마구잡이로 요직에 임명했고, 재벌 친구들에게 비공식적으로 훈장을 남발했다. 자신의 20대 아들을 프랑스 파리 인근 기업 밀집 지역을 관리하는 데팡스공공개발위원회 사장에 앉히려다 여론에 밀려 철회하기도 했다. 친구들의 사업을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 행정상의 '꼼수'를 부리는 시도도 빠지지 않았다.
토건족의 이익을 만족시키는데도 충실했다. 인구 밀집 지역인 파리를 더 확장시키기 위해 '위대한 파리' 구상을 밀어붙였다. 대통령의 친구들은 파리에서 대형 건축물 사업을 하고 싶었고, 문화제에 대한 규제는 조금씩 허물어져 갔다.
<부자들의 대통령>은 이러한 사르코지의 행동이 별로 은밀하지도 않았으며 되레 당당하고 뻔뻔했다고 말한다. 국민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것은 그의 화려한 언변이다. 사르코지는 들리기엔 그럴 듯하지만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들을 쉴 새 없이 내뱉었으며, 그 안에서 자신의 입장을 수시로 바꿨다.
"68 혁명 정신이 자본주의의 부도덕함을 불렀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세금 낙원은 끝났다"며 동시에 감세 정책을 추진하는 등 단순히 우파 인물이라고 치부하기엔 이해가 되지 않는 발언들을 사르코지는 이어나갔다. 화려한 '말발'을 좋아하는 언론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르코지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책에서 소개한 좌파 정치인 장-피에르 브라르의 다음과 같은 말은 우리에게도 많은 함의를 던져준다.
"사르코지는 우리의 건망증을 이용한다. 그는 놀라운 성과를 약속하는 탁월한 계획들을 발표한다. 그러나 대단한 결과는 고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의 발표를 조금 기억하거나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결과가 실제로 어떻게 나타났는지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의 발표를 기억하고, 결과를 확인하는 이들은 사르코지의 친구들이다. 기업 이사회, 고급 사교장, 혼맥 등을 통해 견고한 네트워크를 구축한 부유층들은 정계와 재계를 오가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반면에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던 프랑스의 시민 사회는 자본주의의 발달로 개인주의가 만연하면서 파편화되고, 진보 진영은 분열 상태를 극복하지 못해 기득권의 네트워크에 저항할 힘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저자들은 개탄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투표'일까?
위에 상술한 사르코지의 행적은 책에서 비교적 쉽게 이해되는 부분을 발췌해 뽑은 것이지만, 이명박 정부의 지난 5년을 비춰보는 거울이기도 하다. 몇몇 사례들은 이명박 정부를 넘어 역대 정권이 저질렀던 '정책적 실패'들을 포괄하기도 한다. <부자들의 대통령>이 묘사한 것처럼 일반 국민들에게 실패로 규정됐던 그 정책들로 인해 혜택을 받았던 세력들이 누구였는지를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1퍼센트'라는 말로 함축되는 이 세력들에 대한 비판은 '계급투쟁'이라는 보수 진영의 비난을 받고 있지만,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익에 철저하고 단합했던 이들은 '99퍼센트'가 아닌 '1퍼센트'였다. 과거 프랑스의 부흥을 이끌었던 계급투쟁을 이제 신자유주의 세력이 학습해 응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 계급투쟁을 비난하는 그들의 화법이 비판받지 않는 건 대중이 사르코지의 화려한 언변에 놀아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저자들은 결론에서 적은 숫자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과두 지배 세력들의 약점이 그들의 힘에 겁을 먹고 있는 서민과 중산 계급 자신들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단순히 그들의 가지고 있는 표의 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이들의 노동과 구매력이 없다면, 소비재와 금융 상품에 주로 의존하는 과두 지배 세력들의 힘은 금방 상실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제는 개인주의의 가면을 벗고, 자신들의 힘을 이용해 계급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저자들은 제안한다. 여기에는 과두 권력을 이루는 개개인의 신상과 그 배후, 그 사이의 상호관계를 추적하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러한 노력 자체가 개인주의를 탈피해 자신이 사회 구성원의 일원임을 자각하는 과정이며, 인터넷의 등장은 여기에 들어가는 노력을 덜어 줄 것이다. 저자들은 그러한 투쟁의 결과가 빨리 올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재선을 노리는 사르코지는 2012년 4월 대선에서 유권자들의 평가를 받게 되지만 우리는 이명박 대통령의 재선을 원하거나, 또는 원하지 않을 기회가 없다. 물론 올해 12월에 치러질 한국 대선에서 어떤 인물이 당선되는가에 따라 과두 권력의 해체를 위해 쏟을 노력과 희생의 정도는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새롭게 등장한 대통령의 화술에 말려 희망을 품고, 바쁜 일상에 쫓겨 그가 내리는 조치들의 의미와 결과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다가 다시 임기 말이 되어 분노하는 과정을 반복할 가능성도 그만큼 많다. 책에 쓰인 다음과 같은 말에 주목하자.
"현재 과두 정권의 위력은 니콜라 사르코지 한 명의 영역을 초월한다. 사르코지는 이러한 인적 네트워크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이들 네트워크의 대변인으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높이 평가받는 주역 가운데 한명이며, 그가 차지하고 있는 전략적 지위에 걸맞는 주역에 불과하다. 만약에 그가 2012년에 재선되지 못하면 권력 네트워크는 그의 진영이나 다른 진영에서 언제든지 그의 대타를 찾을 것이다."
2012년 12월에 표를 던질 후보는 '누구'의 대통령이 될지 우리는 현재 알고 있는가?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