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번이 1번을 이겼다. 오세훈 전 시장의 히든 카드였던 무상 급식 주민 투표는 '오세훈의 저주'를 낳았고, '안철수 현상'에 힘입어 결국 박원순 씨가 서울 시장에 당선됐다. 유권자는 아니지만 이번 서울 시장 보궐 선거 결과를 여러모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10월 26일이 그리고 이후 박원순 시정이 "시민은 권력을 이기고 투표가 낡은 시대 이겼다"고 우리 역사에 남을지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청춘 콘서트, 무릎팍도사, 주민 투표로 이어지면서 반한나라당, 비민주당, 비진보 정당이라는 재정치화 기운들이 '안철수'로 상징화됐다. 무상 급식과 복지 논쟁으로 함축된 사회 양극화과 사회적 불안정이 기저에 깔렸음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아름다운 동행을 보여주며 '박원순'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야권 단일 후보로 급부상했다. 2002년 대선 당시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철회와 정반대의 행보였지만, 안철수 원장의 한결같은 지지 선언은 지지층 결집 효과를 낳았다.
20~40대의 폭발적인 지지로 '박근혜' 마저 눌렀다. 시민단체의 열성적 지원도 큰 몫을 했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민주당의 역할도 무시 못 할 정도였다. 내년 양대 선거를 앞두고 대리전 양상도 나타났다. 회고적 투표와 전망적 투표가 결합된 복잡한 선거였다고 할 수 있겠다.
몇몇 전문가들이 얘기하듯 이번 선거가 정책 선거가 실종됐다는 지적은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보궐 선거가 언제 제대로 된 정책 선거였나. 도덕성을 갖춘 시민 운동가 출신의 무소속 후보가 기존 정당 후보보다 더 뛰어난 정책 의제화 능력이 있을 것이라는 편견이 있는 건 아닌지. 오히려 박 후보 측의 정책이 현재의 민주당 정책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한 포인트다. 야권 통합 논의가 더욱 급물살을 탈 것이라는 전망이 가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박원순 캠프에게 남은 것은 더욱 험난한 '정치'와 '행정'이다. 선거전에서 빚진 곳이 많은 데다, 실무 행정가처럼 서울시 행정만 챙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2012년이 큰 격랑 속에서도 2014년 지방 선거도 대비해야 한다. 아무쪼록 시민 단체에서 제안한 좋은 정책들이 현실화되도록 꼼꼼히 챙길 것을 부탁한다. 이명박-오세훈 집권 시기의 문제점과 부작용을 개혁할 것이라는 믿음도 저버리지 않길 바란다.
이외에 한 가지 바람이 있는데, 기존 보수-개혁 정당들이 엄두도 내지 못 한 것이다. 바로 '서울 뽀개기'이다. 무엇보다도 서울은 생산과 소비 간의 공간적 분리에 내재된 모순에서 출발해야 한다. 먹을거리, 에너지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것들이 과잉 소비되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적 공간이다. 하지만 시민들의 자생력은, 삶의 터전으로서의 생존력은 극히 낮은 수준이다.
이렇게 '서울 중심주의'는 모든 '시골'의 생명력에 기생한다. 오죽했으면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한재각 부소장이 서울에 핵발전소를 건설하자는 공약을 제안하지 않았겠나. (☞관련 기사 : "서울 핵발전소 건설을 시장 선거 공약으로!") 한강 르네상스 사업이나 양화대교 사업만 막는다고 서울이 진정 잘 살 수 있을까. 이 거대한 도시 기계를 그대로 두면 도시 경쟁력은 키울지 모르지만, 시민들은 이런 저런 부속품으로 끊임없이 작동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서울 시장이 직접 나서서 집권 공간을 나눈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 수 있다. 고양이가 스스로 자신의 목에 방울을 다는 꼴이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역 균형 발전이나 그것의 변형인 세종시만으로 서울 중심주의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서울시의 특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온 마당에 시민 권력과의 사회적 합의에 남은 임기의 일부를 투자하는 것이야 말로, 서울특별시의 '도덕'이자 대한민국의 '희망'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내가 서울 시장에게 기대하는 고도(Godot)이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오세훈 전 시장과 나경원 후보에 거부감을 갖은 사람들에게서 '설마 지겠어,' '지면 정말 대책 없다'는 말을 듣곤 했다. 그만큼 박 후보가 패배할 수 없는 선거판이었고 패배해서는 안 된다는 절실함이 있었나 보다. 이해하고 공감한다. 일단 승부가 났으니 이제 응원할 것은 응원하고 삐딱하게 볼 것은 삐딱하게 보자. 박원순호가 순항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서울시민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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