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바지 위에 팬티를 입을 생각은 못했어도 한번쯤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주먹 쥔 한손은 하늘을 향한 채 동네를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 본 추억이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니리라.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동네마다 악당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세계 평화를 꿈꾸며 보자기를 휘날리던 동네 꼬마 슈퍼맨들은 정말로 많았다.
당시 파란색 전신 쫄쫄이에 덧입은 빨간 팬티는 촌스럽고 어색하기는커녕 진정한 영웅의 상징일 뿐이었다. 영웅은 달라도 뭔가 다르다는 막연한 동경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지금도 떨어지는 패션 감각 때문일까? 슈퍼맨 스타일은 전혀 어색하지도 촌스럽지도 않았다.
그런 슈퍼맨도 복장이 바뀌었다. 민망한 부위를 가려주기라도 했던 빨간 팬티마저 과감히 벗어버리고 위·아래를 구분 짓는 금테만을 두른 새로운 스타일의 슈퍼맨이 등장한 것이다. 근육은 드러내야만 한다는 시대적 요청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너무 오래 입어 낡고 헐어버린 팬티 때문이었을까? 복장이 변한 슈퍼맨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 내 또래 사람들에게 무리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퍼맨의 강력한 힘과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만은 그대로이리라. 진정한 영웅은 어떤 복장을 하더라도 영웅일 것이다. 영웅의 본질은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하고 살아남는 강력한 육체적 정신적 능력에 있다. 복장 따위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화론적으로 상상해 볼 때도 슈퍼맨은 인간 진화의 이상적 모델이다. 완벽한 외모에 강력한 힘, 거기에 하늘을 나는 능력까지… 이렇게 인간의 욕망을 대변하는 완벽한 외계인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진화론적 상상이 어렵다면 영화적 상상력을 동원해 생각해 보라! 그 어떤 외계인이 이토록 완벽한 이상적 인간을 모델로 하고 있는지.
거기에 "강한 자는 언제나 살아남는다"는 묵시론적 암시는 인간이 만들어온 강자가 되기 위한 투쟁의 역사가 정당하다는 논리를 은연중에 진실로 간주하도록 만든다.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델이 되는 영웅이 있어야 하고 그 영웅을 모델로 하여 또 다른 강자가 되기를 꿈꾸는 순환논리,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살아온 길이자 살아가야 할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나 그랬듯이 목에 두른 보자기를 잊어버리고 현실의 인간으로 돌아왔을 때 슈퍼맨의 빨간 팬티는 기억에서 사라진다. 슈퍼맨의 팬티가 빨간 팬티든 파란 팬티든 노팬티든 더 이상 관심 없다. 단지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가길 원할 뿐이다.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더 이상 용기 있는 영웅을 꿈꾸지 않는 인간들, 그러나 이것조차 당연한 자연적인 인간본성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인간들, 프란츠 부케티츠의 <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이덕임 옮김, 이가서 펴냄)는 이러한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불편한 진실
▲ <겁쟁이가 세상을 지배한다>(프란츠 부케티츠 지음, 이덕임 옮김, 이가서 펴냄). ⓒ이가서 |
병역을 기피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선 한 연예인의 "나약한 겁쟁이일 수는 있어도 비열한 비겁자는 아니다"라는 항변은 우리 사회가 겁쟁이보다 비겁하다는 것을 더 나쁜 것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진화론적 입장에서 볼 때 겁쟁이라는 것 또는 비겁하다는 것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며 생물학적 사실과 연관된 인간 본성의 문제일 뿐이다. 우리가 미덕으로 칭송하는 용기나 부덕으로 치부하는 비겁함은 사실 인간의 자연적 본성과는 상관없는 인간이 만들어낸 용어에 불과하다. 또 진화론의 입장에서 비겁함이라는 상징적인 단어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태도를 가리킬 뿐이다. (물론 우리말에서 겁쟁이와 비겁함은 뉘앙스 차이가 있다. 그러나 서양 언어에서는 그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은 것 같다.)
내가 말하는 비겁함은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이다. 나는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비겁함이 충분히 미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용맹성보다는 비겁함이 최소한 위험에 처했을 때에는 더 현실적인 판단에 따른 방식임을 도덕주의자들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21쪽).
그러나 비겁함이라는 것이 아무리 인간 본성이라고 해도, 스스로를 비겁자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특히 용기를 칭송하고 영웅을 찾는 사회에서 비겁함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일 뿐이다. 또한 비겁한 사람을 옹호하거나 같은 편이 된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할 수 없다.
이쯤에서 한번 진지하게 물어보자! 지금쯤은 기억에서 잊어진 이름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고(故) 이수현 씨를 칭송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을 희생해가며 타국에서 한 일본인을 구한 그의 용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와 같은 지하철역 공간에 있었으면서도 타인을 구하지도 못했거나, 외면했거나, 바라보고만 있었던 사람들을 단순히 그냥 평범한 사람들로만 치부해야 할까? 그 중에 겁쟁이 또는 비겁자는 없었을까? 군중의 익명성에 두려움을 숨긴 사람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그 사람들도 사실 겁쟁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이야기를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자신이 죽음에 직면할 수 있는 상황에서 타인을 구하는 행위는 왜 어려운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타인의 위험을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답은 비교적 간단하다. 이것이 자신을 보존하려는 생물학적인 본성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대다수는 생물학적으로 겁쟁이일 뿐이다.
진화에서는 겁쟁이가 중요하다
다윈의 '자연 선택'과 '적자생존'만큼 오해를 많이 불러일으키는 개념도 드물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자연은 과연 누구를 선택할 것이며, 그렇게 살아남은 자는 과연 누구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 때문일 것이다. 전통적인 대답은 단순했다. 강자(强者)!
"강자가 선택되고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대답은 도덕주의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다. 도덕주의자들에게 진화론은 인간 사회를 동물 사회와 동일시하는 획책일 뿐이었고, 지금도 그 거부감은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 '강자'라는 대답은 진화론적인 대답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생물학적으로도 공고히 하고 싶었던 사회다윈주의자들의 대답이었을 뿐이다. 도덕주의자들도 별반 차이는 없는데, '용기'라는 덕목으로 강자를 칭송하기는 마찬가지다. 사실 도덕주의자들은 '용기'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비겁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비겁함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음을 확인했다. '용기'와 '용감성'은 철학 사전이나 용어 사전에서 대부분 찾아 볼 수 있으며 물론 4대 덕목의 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한다(10쪽).
'용기'에 대한 예찬은 우리에게 은연중 강자가 될 것을 강요한다. 그리고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한 자는 영웅으로 칭송을 받는다. 베트남전에서 미군 소위의 평균 수명은 17초였다는 통계가 있다. 임전무퇴(臨戰無退)는 군인의 덕목이기도 한데, 다시 말해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과 함께 제일 먼저 뛰어 나가야 하는 소위들이 17초에 한 명씩 죽었다는 말이다.
젊은 소위들은 육체적으로도 건강하고 전투 및 방어 기술을 알고 있으며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아마 생식 능력도 뛰어났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살아있다면 후손을 남길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들의 용기 있는 행동은 그들이 후손을 남길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다시 말해 그들 중 대다수는 죽었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다윈의 '적자생존'의 의미다. 사실 '적자생존'은 단순히 한 개체가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다. 한 개체가 다음 개체로 유전자를 전달하는 과정이 지속적으로 연결될 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인 것이다. 후손을 남길 수 없다면 그래서 유전자를 전달할 수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적자생존'이다.
용감한 소위들은 대부분 '돌격 앞으로!' 외치며 뛰어나가다가 죽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진화론적으로 적합한 개체가 아니다. 그렇다면, 진화론적으로 적합한 개체는 누굴까? 그렇다! 바로 겁쟁이들이다. 전쟁을 피하고 용감한 행위와는 거리가 먼, 그래서 끈질기게 자신의 목숨을 보존한 그 겁쟁이들이 바로 진화의 주역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겁쟁이의 후손에, 후손에, 후손들일 뿐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었다.
오로지 운이 좋았던 덕택에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던 것을.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친구들이 나에 대해 얘기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미워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문학 소년이 되기를 꿈꿔본 적도 없는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시 중에 하나다. 물론 나는 이 시의 문학적 가치를 모른다. 내가 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진화론을 가장 짧고도 극명하게 설명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현생 인류, 호모사피엔스는 정말 운 좋게 살아남은 생명체에 불과하다. 브레히트의 슬픔처럼 운 좋게 살아남은 자는 강한 자가 아니다. 단지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겁쟁이였고 때로는 비겁하기도 했던 인류는 분명 그렇게 운 좋게 살아남아 있을 뿐이다. 인간의 진화에서 어릴 적 꿈꿨던 슈퍼맨 같은 능력은 애당초 필요하지도 않았다. 용기가 있다는 것도 강하다는 것도 그렇게 큰 도움은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너무 허무하다거나 슬퍼할 필요는 없다. 가끔은 겁쟁이로,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면 비겁하게, 그렇게 적당히 평범하게 살아가면 된다. 도덕적인 것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 상황에 따라서는 개인적으로 타협하고 대처할 수 있는 자신의 도덕률을 따르면 된다. 가장 평범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후손을 남겨 '적자생존'할 수 있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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