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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책만 읽는 바보'를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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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책만 읽는 바보'를 위한 변명

[親Book] 에코와 바르트, 김수영이 말하는 '책 읽기'

찬도 변변찮은 밥상이건만, 어쨌든 책 밥을 먹는 입장이라 매일같이 인터넷 서점을 들락거리며 신간 목록을 확인하게 된다. 하루에도 수백 권씩 쏟아지는 책, 책, 책, 책들.

마우스 휠을 바쁘게 돌려가며 표지와 제목, 저자를 일별할 뿐이지만, 꼭 읽어야 할 것 같은 강박을 안겨주는 책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지긋지긋하지만 그렇다. 이미 읽어야 할 책은 산더미. 아무리 산수를 해봐도 이번 생에는 읽어낼 도리가 없는 책들이다. 내겐 물리적인 시간이 없고, 구약의 인물들처럼 장수할 가망도 없건만, 알량한 직업윤리란 놈만은 있어 나를 괴롭게만 한다.

그럴 때는 눈 딱 감고 책을 주문하는 수밖에 없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꼭 읽어야 할 것만 같은 강박을 안겨주는 책을 읽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그 책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종의 '의무적인 독자'들이다. 다시 말해, 동종 업계 종사자들과 까다로운 취향의 독서 애호가들이 짐짓 무심한 척 던지는 "그 책 읽었지?" 같은 질문에 언제든지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때 "이미 사놓았지만 아직 읽진 못했다"는 대답은 언제나 통하는 마법의 주문이나 마찬가지다.

일단 그들에게 읽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다른 중요한 책들에 밀려 미처 읽을 시간을 내지 못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이건 단순히 우리의 교양과 직업적 성실성을 의심의 눈초리로부터 보호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볼 때 사람들은 우리가 읽지 않았고 앞으로도 읽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책에 대해서는, 조금쯤 무시하는 말투로, 공허하고 피상적인 일반론을 늘어놓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가 이미 읽은 책에 대해서는 오히려 방어적인 태도로 평을 아끼며 기껏해야 사소한 세목들에나 열을 올릴 따름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조만간 읽을 책에 대해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마치 여행에서 갓 돌아온 사람이 여행을 준비하는 다른 이에게 자신의 경험을 시시콜콜 늘어놓듯, 그들은 우리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소탈하고 진솔한 평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나 낯모르는 이들의 서평이 구태여 밝히지 않는 부분까지도. 우리는 그의 평을 갈무리해 다른 이들과의 대화에서 써먹을 수도 있겠지만, 대개 이런 평은 책보다 그것을 말하는 상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법.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갖고 있는 해묵은 오해와 편견과 미움과 연민은 잠시 잊은 채 퍽 정겨운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나 벌어지는, 앞으로도 영원히 끊이지 않을 오해와 편견과 미움과 연민의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슬라보예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박정수 옮김, 그린비 펴냄) 권두의 헌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시인의 영혼을 빌려 이렇게 쓴다.

"언젠가 내가 신나게 떠들고 있던 방 안에서 바디우의 / (설상가상, 내가 빌려 준) 핸드폰 벨이 울린 적이 있었다. / 그는 핸드폰을 끄는 대신 공손하게 내 이야기를 끊고는 / 통화음이 잘 안 들린다며 좀 조용히 이야기해 줄 수 없냐고 했다. / 이것이 진실한 우정의 행위가 아니라면 나는 뭐가 우정인지 모르겠다. /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바디우에게 헌사한다.")

무엇보다 읽지 않기 위해 책을 사는 행위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종이 냄새 풍기는 빳빳한 새 책을 손에 쥐었다는 만족은 둘째요, 일단 손에 넣었으니 언제라도 읽을 수 있고 따라서 당장 읽어야 할 것만 같은 부담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이 첫째다. 뿌듯한 마음으로 표지와 목차를 훑어본 후, 읽지 않은 책이 가득한 책장 한편에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으로 당신의 강박은 치유되는 것이다. 그래, 조삼모사다. 하지만 영화 <혹성 탈출 : 진화의 시작>이 멋지게 증명하듯, 인간이 원숭이보다 나아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읽지 않은 책들로 책장을 채우는 일에 청교도적인 죄의식을 느끼는 당신을 위해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이렇게 말한다.

움베르트 에코는 박학다식하고 재기발랄하면서 통찰력을 갖춘 몇 안 되는 학자의 반열에 든다. (3만 권의 장서를 자랑하는) 큰 서재를 갖고 있는 그는 방문자를 두 부류로 나눈다고 한다. 첫째 부류는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와, 시뇨레 에코 박사님! 정말 대단한 서재군요. 그런데 이 중에서 몇 권이나 읽으셨나요?" 두 번째 부류는 매우 적은데, 개인 서재란 혼자 우쭐하는 장식물이 아니라 연구를 위한 도구임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맞다. 이미 읽은 책은 아직 읽지 않은 책보다 한참 가치가 떨어지는 법이다. 재력이 있든 없든, 장기 대출 이자율이 오르든 말든, 최근 부동산 시장이 어려워지든 말든, 서재에는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과 관련된 책을 채워야 한다. 나이를 먹으면 지식이 쌓이고 읽은 책도 높이 쌓이지만, 서가의 아직 읽지 않은 책들도 점점 늘어나 겁을 먹게 한다. 진정 알면 알수록 읽지 않은 책이 줄줄이 늘어나는 법이다. (<블랙 스완>(차익종 옮김, 동녘사이언스 펴냄), 42쪽)

▲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움베르트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첫 번째 부류에게 "아니요. 저 가운데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어요. 이미 읽은 책을 무엇 하러 여기에 놔두겠어요?"('서재에 장서가 많은 것을 정당화하는 방법',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펴냄) 243쪽)라고 반문한 '시뇨레 에코 박사'는 또 다른 에세이를 통해 이렇게 덧붙이는 걸 잊지 않는다.

책 한 권을 읽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가? 하루에 단지 몇 시간만 독서에 할애하는 보통 독자의 관점에서, 평균 분량의 작품 하나에 4일은 걸린다고 가정해 보자. 물론 프루스트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작품을 읽으려면 몇 달이 걸리지만, 하루 만에 읽을 수 있는 걸작들도 있다. 그러므로 평균 4일이 걸린다고 하자. 그렇다면 <봄피아니 작품 사전>에 실린 모든 작품에다 4일을 곱하면 6만5400일이 된다. 365일로 나누면 거의 180년이 된다. 이런 계산은 틀림없다. 그 누구도 중요한 작품을 모두 읽을 수는 없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책을 읽지 못했는가', <책으로 천 년을 사는 방법>(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펴냄), 31쪽)

에코의 말마따나 그 누구도 중요한 작품조차 모두 읽을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그러니 이제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시 서점으로 돌아가라. 우리에게 강박을 안기는, 그새 출간된, 또 한 권의 책을 선택하라. 그리고 주문하라.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 영혼의 일시적인 평안을 위해. 필요하다면 책장도 골라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우리는 언제나 "인생을 선택하고, 직업을 선택하며, 존나 큰 TV와 세탁기, 차, CD 플레이어, 자동병따개를 선택해"(<트레인스포팅>)오지 않았던가. 비록 그것이 언덕으로 바위를 굴려 올리는 시시포스의 고행처럼 지난하고 덧없는 행위의 반복일 뿐이라도. 솔직히 말해 책을 읽거나 돌을 굴리는 일보다야 돈을 쓰는 것이 훨씬 즐겁지 않은가?

하지만 아직 문제는 남아 있다.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사실. 우리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고, 그것도 잘 읽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책에 대한 강박. 일당 25달러를 받는 탐정보다 나을 것도 없는 현실이건만 우리의 청교도적인 직업윤리는 우리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여기, 그런 우리를 위한 "박학다식하고 재기 발랄하면서 통찰력을 갖춘(취향에 따라 '관능적인'이나 '매혹적인'과 같은 수식어를 추가해도 좋겠다)" 또 하나의 학자 롤랑 바르트가 있다. 롤랑 바르트는 어떤 사람인가? 수전 손택은 이렇게 썼다.

그는 꼼꼼한 독서가였지만 왕성한 독서가는 아니었다. 자기가 읽은 것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 글로 썼으므로, 그가 글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마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 프랑스 지식인처럼(그가 사랑한 지드는 예외다) 그도 비세계적이었다. 그는 외국어를 몰랐고 외국 문학은 번역된 것도 거의 읽지 않았다. (…) 그는 독서를 하느라 글을 쓰지 못할 만큼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이 아니었다. ('바르트를 추억하며', <우울한 열정>(홍한별 옮김, 이후 펴냄), 136쪽)

언젠가 그는 모리스 나도와의 대담을 통해 책과 직업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혹은 그 스스로 책과 깰 수 없는 영혼의 서약을 맺은 '의무적인 독자'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힌 바 있다.

모리스 나도 : 모리스 블랑쇼가 비평가란 비(非)독자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잡지나 신문의 편집장은 이런 면에서 제곱의 비독자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독서'하지 않으면서 '독서'합니다. 실제로 진정한 독서란 전자의 독서를 말하죠. 그런데 이 전자의 독서, 현재 내가 종사하고 있는 직업 속에서는 나는 그걸 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나는 독서할 의무가 없는 순간에만 진정한 독자가 됩니다.

롤랑 바르트 : 통상 사람들은 극히 잘 다듬어진 완곡어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책을 보았다고 말하죠. 그들은 그것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보았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일종의 글쓰기의 채취(採取), 즉 한 페이지, 혹은 십 페이지의 채취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나로서는 텍스트와 나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있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정히 단어의 맛, 문장의 맛, 예전에 흔히 문체라고 불리던 것의 맛에 바탕해서 분기되고 분절되는 글쓰기의 관능을 갖고 있는 경우, 이 경우엔 그저 몇 페이지로 충분한 거죠. (<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강 펴냄), 58~59쪽)

▲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롤랑 바르트 지음, 이상빈 옮김, 강 펴냄). ⓒ강
비평가이자 편집자인 모리스 나도는 오직 자신의 입장에서 문제를 서술하고 있지만, 그것은 책에 대한 강박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조건이다. 우리는 책을 잘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그것에서 무언가 말할 거리를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에, 그리고 어서 다음 책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텅 빈 눈으로 글자를 쫓을 뿐이다.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읽지 않은 책을 쌓아두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죄의식을 우리에게 심어준다. 아아, 죄 많은 영혼들이여! 타락한 어린 양들이여!

하지만 그런 이들에게 무턱대고 개인의 수양이나 더 많은 도서 목록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독서계의 여타 '구루'들과는 달리, 바르트의 대답은 명쾌하기만 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거다. 하나의 광산이 무엇을 품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굳이 온 땅을 헤집을 필요는 없는 것처럼, 하나의 라면이 어떤 맛인지 알아보기 위해 마지막 한 방울의 국물까지 마실 필요는 없는 것처럼. 구원은 바로 지금-여기에 존재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읽어내야 하고, 때로는 정복해야 하는 한 권의 책이 아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몸을 던져 그 속에 흠뻑 잠긴 채, 종횡으로 몸을 움직이며 새로운 의미를 직조해나가는, 그것과 하나가 되어 순전한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텍스트일 뿐이다. 그곳에는 어떤 고정된 의미도 없다. 그러니 굳이 그 많은 도서 목록을, 추천 도서를, 혹은 단 한 권의 책을 강박적으로 읽어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내가 만약 헤겔도, <클레브 공작 부인>도, 레비 스트로스의 <고양이>도, <반 오이디푸스>도 읽어보지 않았더라면?-내가 읽지 않은 책, 그리고 내가 읽어볼 시간을 갖기 전에 종종 '나에게 이야기되던' 책(아마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 책을 읽지 않는다). 이러한 책은 읽었던 책과 같은 자격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책은 그 나름의 명료함, 그 나름의 기억 가능성, 그 나름의 행동 방식을 구비하고 있다. 우리들은 하나의 텍스트를 '일체 문자 밖에서' 받아들일 꽤 많은 자유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내가 만약 읽어보지 못했더라면……',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이상빈 옮김, 강 펴냄), 145쪽)

이러한 프랑스적인 고고한 비독서의 전통을 대중적인 맥락에서 다시금 부활시킨 것은 물론 피에르 바야르다. 제목부터 노골적인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펴냄)의 마지막 부분을 그는 이렇게 썼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통찰력 있게 말할 줄 안다는 것은 책들의 세계를 훨씬 웃도는 가치가 있다. 많은 작가들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교양 전체는 담론과 그 대상 간의 연관을 끊고 자기 얘기를 하는 능력을 보이는 이들에게 열리는 것이다.

이 책에서 열거한 그 모든 이유들로 인해 앞으로도 나는 다른 사람들의 비판 때문에 나의 길을 저버리는 일 없이, 흔들리지 않고 차분한 마음으로,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해 계속 얘기를 해나갈 생각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236~237쪽)


참으로 꼿꼿하고도 당당한 기상에 감탄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그의 매니페스토는 분명 바르트에게 빚진 바 크지만, 자신만의 개념들을 통해 독서라는 행위 혹은 교양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재기 넘치는 도발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만하다.

▲ <김수영 전집 2 산문>(김수영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지금까지 인용한 이 모든 텍스트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는 읽지 않은 수많은 책을 쌓아두고도 읽지 않을 몇 권의 책을 기어이 추가할 수 있어야 하고, 책을 '잘'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온갖 기표들의 떨림에 몸을 맡길 줄 알아야 하며, 설령 아무 것도 읽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자신의 직관을 느낌을 인상을 과감히 내뱉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우리는 모든 책을 읽지 않더라도, '사실상' 모든 책을 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가장 중대하며 또한 시급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것은 생활이다. 생활을 생각하면 나는 우선 김수영을 떠올린다. 그의 양계(養鷄)와 그의 '매문'과 숫자들로 빼곡한 그의 메모지(담뱃갑)와 그의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과 하얀 '메리야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김수영은 1955년 2월 2일의 일기를 이렇게 갈무리 했다.

귀가 교훈

1) 독서와 생활을 혼동해서는 아니 된다. 전자는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뚫고 나가는 것이다.
2) 확대경을 쓰고 생활을 보는 눈을 길러야 할 것이다. (<김수영 전집 2 : 산문>(민음사 펴냄), 490쪽)


김수영에 따르면 나는, 그리고 이 글은 생활과 독서를 혼동하고 있다. 아니, 생활이 제거된 자리를 독서가 억지로 채우고 있는 셈이다. 물론 나는 책 속에 모든 게 있고, 책만으로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는 거짓말을 반복할 생각이 없다. 나는 단지 우리 앞에 아가리를 벌리고 선 생활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우리를 죄어오는 불안을 피하기 위해 그 많은 책과 책에 대한 강박과 이런 쓸모없는 글을 필요로 했을 뿐이다. 얼마 전 작고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인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쓰려고 하지만, 어떤 때는 사실만 가지고는 이야기가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을 바꿀 수밖에 없다고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고, 그럴 용기도 없는 자 자신이 너무 괴롭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미화시키고, 있었던 일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있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얘기를 쓴다고 했다.
그녀가 말했다.
- 그래요. 제일 슬픈 책들보다도 더 슬픈 인생이 있는 법이니까요.
내가 말했다.
- 그렇죠. 책이야, 아무리 슬프다고 해도, 인생만큼 슬플 수는 없지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하)-50년 동안의 고독>(용경식 옮김, 까치글방 펴냄), 7쪽)

그렇다면 대저 생활이란 무엇이고 또 인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두서없이 떠오르는 몇 가지 것들. 치솟는 물가와 빠듯한 살림, 쥐꼬리만 한 고료와 그나마도 제 때에 주지 않는 빈곤한 출판 산업, 외부 없는 자본주의와 쓰레기가 되어 가고 있는 삶들과 기타 사회학 용어들, 박봉과 가계에 시달리는 사랑하는 이들, 멀어지는 친구들과 늙어가는 부모, 부족한 재능과 그럼에도 남아 있는 나날들…. 어느 하나 적당한 말을 고를 수 없는 나는 그저 다시금 책을 집어 들 뿐이다.

생활은 고절(孤絶)이며
비애이었다
그처럼 나는 조용히 미쳐간다
조용히 조용히…… (김수영, '생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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