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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해서 뚱뚱하고, 뚱뚱해서 가난하다!

[철학자의 서재] 그렉 크리처의 <비만의 제국>

뚱뚱한 게 죈가? 요즘 돌아가는 세태를 보건대 죄다. 뚱뚱한 거, 키 작은 거, 얼굴 못생긴 거 다 죄다. 이 중에서도 제일은 역시 뚱뚱함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소망교회'이듯(?) 말이다.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도와 이유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모두가 뚱뚱함을 싫어한다. 이런 마당에 '날씬함? 그건 이데올로기야!' 하고 말하는 건 별 위안이 되지 못한다.

중학교 3학년인 딸아이에게 일반명사 '뚱땡이'가 고유 명사화한 지 이미 오래다. 나 역시 '식스 팩'은 고사하고 '식스 쌍둥이'를 밴 듯한 만삭의 배(腹)를 자랑한다. 우리의 살길은 운동과 다이어트다. 딸과 나는 공감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운동을 했다. 퍽퍽한 닭 가슴살과 냉동 채소를 데쳐 먹었다. 딸도 이걸 먹었다. '그래 우린 할 수 있어. 파이팅!'

며칠이나 지났을까? 집에 들어갔더니 집사람과 아이들이 피자와 치킨을 먹고 있다. 마누라는 캔 맥주까지 곁들여서 요즘 애들 표현대로 '흡입 중'이다.

우리 '뚱땡이'도 치킨을 사정없이 들이밀고 있다. 울화통이 치민다. '딸이 뚱땡이임을 나 알고 저 알고 하늘이 다 아는데 말리지는 못할망정···' 사람이 되길 고대했던 그 옛날 '곰'의 심정으로 '쑥과 마늘' 대신 '닭 가슴살과 냉동 채소'만 먹었건만, 지들은 괜찮다고 딸을 꼬여서 '호랑이'의 후손으로 만들다니! 아깝다. 앞으로 97일만 참으면 되는 거 였는데….

3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는 빈혈과 영양실조를 걱정했다. 어쩌다 아버지가 돼지고기를 사오시면 기쁨 반, 걱정 반의 심정이 되곤 했다. 비계를 도무지 먹을 수 없었다. 발려 놓으면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할 수 없이 도로 입에 넣으면 구역질이 났다. 그러면 이번엔 불호령이 아니라 눈에서 진짜로 불이 번쩍했다. 별 영양가 없는 음식만 먹이다가 오랜만에 기름기를 먹이고 싶으셨으리라. 그런데 진짜 영양 덩어리(?)인 비계를 먹지 않으니 속이 상하셨으리라. 그렇게 눈물 섞인 비계를 구역질을 참아가며 먹고 나면 항상 설사를 했다.

돼지비계를 기름 삼아 전을 부쳤다. 특히 녹두전은 이렇게 부쳐야 맛이 있다. 지금이야 포화 지방이니 뭐니 해서 거의 쓰이지 않고, TV 맛 프로의 '추억의 별미'로나 소개되지만 말이다. 쇠고기를 먹는 것은 더욱 흔치 않은 일이었다. 생일 미역국, 명절 차례 상의 고명이나 산적으로나 맛을 볼 수 있었다.

쇠고기를 불고기로 해먹는다는 건 내겐 거의 일대 사건(一大 事件)으로 남아있다. 누군가의 잔치에서 난생 처음 소불고기를 먹던 날. 그날과 그 장소, 특히 그 맛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너무 먹어서 영양실조에 걸린다!

▲ <비만의 제국>(그렉 크리처 지음, 노혜숙 옮김, 한스미디어 펴냄). ⓒ한스미디어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래, 30여 년 만에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었다. 국내 총생산(GDP)을 보자면, 세계 최빈국에서 아프리카 대륙 전체보다도 많은 나라가 되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말 그대로 우리나라는 '하늘과 땅이 놀라 움직이는(驚天動地)' 변화를 겪었다. 이런 변화의 지향점은 '미국화'였다. '선악개오사(善惡皆吾師)'라 했다. 미국화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으리라. 비만의 제국이 되는 미국화는 나쁜 것이라면 그렉 크리처의 <비만의 제국>(노혜숙 옮김, 한스미디어 펴냄)과 같은 책이 나오는 미국화는 좋은 것이리라. 자신의 문제점을 사실과 가치의 양자를 고려하여 반성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풍토를 지니는 것이 미국화라면 그것은 좋은 것이리라.

이 책은 먼저 팜유와 액상과당(HFCS, High Fructose Corn Syrup, 고과당 옥수수 시럽)이 식품 가공의 주원료로 등장한 이유와 두 물질의 영양학적 문제점을 밝힌다. 표를 얻기 위한 정치적 동기와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이 그 이유다.

팜유는 우리나라에서도 과자, 라면 등 거의 모든 튀김 음식에서 사용 중인 야자 기름이다. '순식물성'인 건 맞다. 하지만 분해·배출이 되지 않고 몸 안에 쌓이기로는 쇠기름보다 더하다. 오래전 우리나라에서 라면의 '공업용 우지' 사용 파동이 있었다. '공업용'까지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이후 '우지'를 대체한 것이 이 기름이다. 근데 이 기름보다는 차라리 '우지'(쇠기름)가 건강에 낫다고까지 한다. (그러면 파동은 왜 벌였던 거야?)

액상과당은 제과, 제빵에서는 물론 거의 모든 가공식품에 단맛을 내는 데 들어가는 물질이다. 설탕보다 당도가 6배나 높다. 게다가 오래 지나도 음식이 신선해 보이도록 하는 효과까지 있단다. 간단히 말해 두 물질은 비만 문제를 일으키는 일등 공신에 속한다.

더 충격적인 것도 있다. 배가 부르다는 것에 기준 내지 한계가 있는 것인가?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처럼 세상을 뷔페(Buffet)로 만들면 사회의 문제점은 사라질 것이라는 데 공감하기도 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인간의) "포만감에는 한계가 없다. 사람은 더 많이, 더 큰 것을 줄수록 점점 더 배가 커지는 것이다."(59쪽) 맥도날드의 경쟁사인 타코벨의 전문 경영인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타코의 평균 가격을 25퍼센트 내리면 (다른 사람들은) 평균 수익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먹는 양에 한계가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리고 내 생각이 옳았다. 일주일 만에 평균 수익은 예전 수준을 회복했다. 세 가지 대신 네 가지를 먹게 한 것이다." (56쪽)

사람들의 상식을 뒤엎는 얘기다. 위(胃)가 늘어난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래도 먹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없단다. 실제로 현재 패스트푸드점에서 제공하는 '세트 메뉴'의 양이나 칼로리는 과거보다 4배 이상이다. 게다가 '세트 메뉴'의 양과 칼로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미국의 비만 행렬에서 아동과 청소년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성인 비만과는 또 다른 원인이 이들의 비만을 부추기고 있다. 부모 세대(이들이 소위 '68 세대'다)의 통제 포기가 그것이다.

"통제를 포기한 것, 자녀들과의 실랑이와 갈등을 피하는 것은 음식에 관련된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1980년대의 육아서들이 대부분 주장한 메시지였다. 그 대부분은 '자율'과 '권한'이라는 중요하지만 불분명한 개념에 근거했다. (…) 이는 체제 순응과 억압과 획일화로 사람들을 '생산 단위'로 전락시킨 과거 세대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되었다. (…) 아이들에게 자신감과 책임감을 심어주기 위해 개인적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70쪽)

크리처에 의하면 "먹는 문제에서 아이들을 일종의 '어린 현자(賢者)'로 생각"한 결과, "아이들의 식욕을 '자연적인' 기준으로 삼아서 먹고 싶은 만큼 먹게 하면 된다"고 한 결과 아이들은 뚱뚱해졌다.

이외에도 이 책은 과체중의 원인을 학교 교육, 매스컴, 빈곤 문제 등을 통해 분석한다. 교육 예산의 문제로 줄어드는 체육 시간. 매스컴의 비만 문제에 대한 의식 결여. 값싸게 공급되는 패스트푸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빈곤층. 이 모든 것들이 미국의 비만 문제를 악화시키는 장치들이다.

비만이 부르는 질병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비만이 오히려 영양실조를 부른다는 점이다. 과식 자체만으로도 건강에는 악영향을 미친다. 게다가 우리가 과식하는 음식이란 것이 몸에 필요한 필수 영양소를 골고루 함유한 음식이 아니라 칼로리만 지나치게 높은 음식이다. 먹어도 먹어도 끊임없이 허기를 느끼게 만드는 음식이다.

과거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영양실조를 걱정했는데 지금은 너무 먹어서 영양실조에 걸린다니. 이런 걸 아이러니라 해야 할지 아포리아라고 해야 할지.

비만은 자본주의 구조의 단면

비만은 시대를 불문하고 있어왔다. 그런데 왜 지금 (새삼스럽게) 비만이 문제인가? 근대 이전에 비만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가 되더라도 개인의 문제였다.

그러나 현재의 비만은 개인의 문제일 수 없다. 나아가 비만은 단순히 여러 사회 문제 중의 하나가 아니라 현대 문명의 문제를 드러내는 '대표 단수' 즉 물질적, 육체적 욕망의 추구와 이의 충족이라는 근대 자본주의의 구조가 낳은 단면이다. 자본주의의 최전선인 미국에서 드러난 '뚱뚱함'은 인간 욕망과 충족의 과잉 모두를 보여준다. 한편, 뚱뚱함은 인간의 욕망과 충족은 아무리 추구해도,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소금물임을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경쟁하라고 한다. 끊임없이 욕망을 계발해 낸다. 끊임없이 충족 수단을 개발해 낸다. 그런데 이것이 언제까지 가능한 것인가? 북극 빙하가 녹는다. 열대 우림이 남벌된다.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겠다. 우리나라를 보자. 어렸을 때보다 얼마나 더워졌는가? 추위다운 추위가 있는가?

신과 함께 죽은 물질로 취급되던 자연이 서서히 반격을 가해오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인간 이성의 반성 능력을 회복해야 할 시점 아닌가? 욕망의 끊임없는 추구는 결코 낙원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욕망을 일정한 수준에서 절제함으로써 비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비만 지침서에 나와 있는 개인의 실천 지침이 아니다. 이 사회 전체가 추구해야 하는 지침이다. 그리고 이 지침에 기반을 두고 자연과 관계하는 방식 모두를 바꿔야 한다. 너무 멀리 왔나? 그러나 이렇게 되지 않고는 비만(?)에서 탈출할 희망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를 하고 나니 오히려 공허감이 밀려온다. 인간 이성의 반성 능력을 믿으라고? 자제·절제하자고? 근대의 문제점을 지금처럼 절감할 수는 없었던 칸트조차도 실천 이성의 문제를 놓고는 이런 식으로 얘기했지만 역사철학(혹은 정치철학)의 차원에서는 전혀 다른 얘기를 했다. 인간이 진정한 반성을 할 수 있는 것은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 이후의 탈진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그의 말이 옳다면 욕망의 절제는 더 이상 욕망을 추구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과체중의 원인은 가난

크리처 역시 비만을 둘러싼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처방을 내놓으면서 '자제심'과 '절제'라는 덕목을 빼놓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말하는 '자제심'과 '절제'는 도덕적·당위적 호소의 차원이 아니다.

그는 미국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의 예를 통해 실제로 어떻게 자제심을 발휘하고 절제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매우 구체적이다. 우리나라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므로 간단히 살펴보는 것으로 그치자.

샌안토니오 지역 학생 중 많은 수가 과체중이며, 심각한 질병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보고서가 나온다. 과체중의 원인이 유전적인 것이 아니라 가난에 있음이 밝혀진다. 그리고 이에 대해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대처를 한다. 먼저 식단을 분석하여 지방과 설탕은 줄이고 과일과 채소 섭취를 늘렸다. 방과 후 프로그램을 대중적인 '헬스클럽'으로 바꾸었다. 부모의 참여와 자각을 유도하였다.

아무튼 여기서 가교역할을 한 것은 '학교'이다. 그는 덧붙인다.

"학교는 소비자 교육을 하는 곳이 아니라 시민 교육을 하는 곳이다." (285쪽)

그에 의하면 비만은 가난과 결부되어 있다. 실제로 패스트푸드의 주된 소비층은 저소득층이다. 부자들은 슬로푸드와 유기 농산물을 먹을 수 있다. 비만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찾을 시간과 돈이 있다. 처방에 따라 각종 레저와 스포츠를 할 수 있는 물질적·시간적 여유가 있다.

<시사인> 제207호(2011년 9월 3일자)에 의하면 우리나라 고등학생 중 전문계고 학생의 평균 신장은 가장 작고 비만도는 가장 높다. 가난과 결부된 비만의 문제가 '강 건너 불'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무상 급식에서 건강 급식으로

며칠 전(2011년 8월 24일) 무상 급식 관련 투표가 있었다. 투표 안했다. 100퍼센트 무상 급식이 옳으냐고? 잘 모르겠다. 문제는 100퍼센트냐 50퍼센트냐가 아니라 '보편적 복지'까진 몰라도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이라도 준비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있었다고 본다. 나는 대부분의 베이비붐 세대와 마찬가지로, 현 상태대로라면 늙어서 빈곤에 허덕이다 갈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안했다.

급식 자체와 관련해서도 할 말이 있다. 기왕에 투표 결과가 나왔으니 단순히 밥을 무료로 제공하는 차원에 그쳐서는 안 된다. 나도 학부모지만 급식 실태에 대해 잘 모른다. 학교별로, 지역별로 격차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문제도 재고(再考)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차제에 우리도 급식 식단에 대한 점검을 할 필요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단순한 무상 급식이 아니라 건강 급식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하겠다. 가난해서 키도 작고 뚱뚱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무상 급식이 관철된 이후의 과정을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 두어선 안 된다. 무상 급식이 건강 급식으로, 건강 급식이 먹을거리의 질 제고(提高)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무상 급식을 교두보로 소위 '나비 효과'가 일어나길 기대한다. 너무 꿈이 야무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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