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계속 보고 있기가 오글거려 곧 채널은 돌려 버렸지만 생각해 보면 긴 15분이란 시간 동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찾아봐야겠다고 저녁때쯤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즉자적인 반응은 "듣기 싫어~!"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지닌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던가. 나아가 "묻지 마, 반대, 그냥 싫어!"가 되는 건 곤란하다는 생각도 한 몫 하였다.
웹상에서 검색하니 출력하면 2쪽이 훌쩍 넘어갈 정도로 빼곡한 기자 회견문이 바로 뜬다. 오세훈 시장님도 우리와 같은 한국어를 쓰시는 사람은 맞았다. 이렇듯 의사소통의 기본 도구인 언어의 동질성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세훈 시장님의 기자 회견문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 오세훈 서울시장은 21일 주민 투표와 서울시장 직 연계 방침을 밝혔다. ⓒ연합뉴스 |
꼼꼼히 읽어 본 오세훈 시장의 기자 회견문 안에는 너무나 주옥같은 단어들이 너무도 많았다. '지속 가능한 복지' '참된 복지' '정치적 합의' '나라는 걱정하는 진심' '충심(충성스런 마음(忠心)은 아니고,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참된 마음(衷心)이란다-덕분에 한자 공부 한 번 더 했다.)' '선거의 순수성' '대한민국의 미래' 등등. 옳지 못한 용도로 꿰어 맞추어 진 것이 아니라면 이 얼마나 소중하게 쓰일 단어들인가?
사실 우리는 근사하고 좋은 단어들을 하나씩 하나씩 빼앗겨 왔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3년 전 이명박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로 '녹색 성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녹색이 바로 그러했다. 이번 경축사에 쓴 '공생'이라는 말은 어떠한가? 본래의 뜻을 따지자면, 쌍용자동차의 노동자들도 외쳤던 "함께 살자"는 의미가 아니던가.
한 때, 녹색이라는 용어를 표명하는 것만으로도 진보적일 수 있던 시대가 있었지만, 이제는 녹색이라는 단어의 활용법 중에는 성장이란 단어의 수식어로서의 전력을 지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미 경합의 대상이 되어 버린 녹색이란 기표(記標). 이명박 대통령의 녹색 성장이 나온 이후, 녹색은 계속 쓰자니 꺼림칙하고 안 쓰고 버리기엔 아직까지 채 드러내지 못한 여러 의미의 겹을 가진 단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속수무책 좋은 단어, 근사한 단어들을 빼앗겨야 하는 것일까?
하나의 단어가 사회적으로 경합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는 것은 그 단어에 대한 상식 수준의 의미가 해체되고 흔들리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너무도 자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상식인데, 그 상식에 도전하는 의문을 표명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이다.
물론 사회가 변화는 만큼 상식이란 것도 늘 고정된 상태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녹색이 공생이 복지가 그런 상태로 흔들리게 내버려 둘 노릇은 아니지 않은가. 때문에 경합의 대상이 되어 버린 단어를 되찾기 위해서는 그 단어를 채우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한 '적극적인 실천과 지속적인 용어활용'을 통한 의미의 재전유가 필요할 것이다.
주민 투표를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상황(투표하자고 근무지 이탈할 수는 없으니까)이란 것을 전제하고 말하지만, 나는 '투표 거부' 방침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쁜 투표에 투표 거부로 맞서야 한다는 구구한 주장들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투표를 거부하자는 것이 가진 '꼼수적 성향' 때문이다.
고작 아이들 밥 먹이는 문제로 진보와 보수가 갈라야 하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기는 하지만 쉽게 말해, 진보적인 정책을 위해 적극적으로 표를 줄 '진보 진영의 집토끼는 많지 않아요'라고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지 않은가. 선별 복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표에 임해 줄 저쪽 선수들은 큰 교회. 큰 절, 큰 성당, 심지어 큰 회사 회장님까지 힘을 실어주는 상수로서의 큰 덩치가 존재하지만, 휴일도 아닌 평일 무상 급식을 지키기 위해 부러 시간 내고 줄 서서 투표해 줄만큼 우리 편이 될 사람들의 수는 장담 못하는 것이 현재 진보의 사정이다.
'까짓것 투표해서 이겨버리자!' 주장하기엔, 무상 급식을 찬성하고 지속적인 전면 확대를 위해 적극적인 투표 실천에 나서도록 더 많은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을 만큼 이쪽은 아직까지 실력도 선수들도 부족하다. 그런 점에서 '투표 거부' 전략은 어차피 낮을 투표율에 기대는 현실적인 선택일수는 있지만 거부만 있을 뿐 능동적인 사후 실천은 약속하는 못하는 투표전략이었다고 판단했더랬다.
하지만 세상사는 모르는 법. 무상 급식을 지지하는 진영의 힘만으로 만들어낸 판은 결코 아니고, 오세훈 시장이 자신의 충심을 드러내기 위해 시장 직을 걸면서 선거판은 크기와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 서울시 무상 급식 지원 범위를 둘러싼 정책 선택 투표가 오세훈 시장에 대한 신임 여부를 가리는 큰 투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귀찮아서 안 하는 투표도 오세훈 시장 불신임이라는 적극적인 실천 행위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던 간에 관계없이 투표를 거부하는 부작위(不作爲)가 적극적인 의미 획득을 하게 되는 역설이 발생하게 된 것인데, 이건 모두 오세훈 시장의 자살골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오세훈 시장이 시장직을 걸면서 생겨난 또 다른 바람직한 변화는 투표 거부를 위해 적극적인 실천에 나서는 모습들이 더욱 확연하게 부상하게 된 것이다. 나쁜 투표 거부 푯말을 들고 인증샷을 찍어 올리는 벗들의 모습을 페이스북을 통해 며칠 전부터 종종 볼 수 있었는데, 8월 23일 벌어진 '모든 서울 지하철 출구 동시다발 캠페인'은 동시간대 동시다발 공동캠페인 숫자로 한국 최고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예정이라고까지 하니 이 어찌 놀랍지 아니한가! 네거티브 전략에서 시작되었지만 투표 거부는 더 이상 네거티브 전략의 틀에 있지 않고 적극적인 작위(作爲)에 또 다른 작위를 얹을 수 있을 정도로 실천적 에너지를 확보한 것이다.
오늘이 지나면 무상 급식은 이제 하나의 시대정신이자 상식으로 더욱 공고해 질 것이라 확신한다. 투표 거부 캠페인의 발랄한 무한 긍정 에너지를 발판 삼아 주민 투표 이후, 이제 무상 급식을 둘러싼 논의는 복지 논쟁의 1라운드를 넘어서 친환경과 로컬화 전략을 중심으로 한 2라운드로 넘어갔으면 좋겠다.
<학교 급식 혁명>(케빈 모건 로베르타 소니노 지음, 이후 펴냄)이란 책의 역자 중 1인으로서 밝히자면, 나라님들 좋아하시는 선진국에서 불고 있는 학교 급식 열풍은 무상이냐 유상이냐 복지 논쟁이 아니라 학교 급식의 질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가 논쟁의 핵심이었다.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사족을 붙이자면, 무상 유상 논쟁은 아니었지만 공공 기관으로서 국가와 지방 정부가 지닌 공적인 구매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저자들은 강조하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의 무상 급식 주장으로 이어질 고리는 충분하다.)
학교 급식 개혁이라는 아이디어는 질 나쁜 재료로 만들어진 정크푸드로 한 끼 때우고 학교생활을 버티는 어린이들의 건강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문제인식이 출발점이다. 이제는 급식 개혁 운동가로 유명해진 영국의 멋진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가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TED 강연에서도 던진 첫 문장이 그러했다.
"내가 강연하는 18분이라는 시간 동안 4명의 미국인이 사망하게 될 것인데, 그것은 그리고 그들이 먹은 음식 때문입니다." 이어서 그는 비관적인 미래를 충격적으로 전망했다. "당신의 자녀는 당신보다 10년 짧게 살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아이들이 먹고 있는 음식은 비만과 부적절한 영양 결핍이 되어 아이들의 수명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인식들이 확산되는 가운데, 조리사, 급식 공급업자, 공무원, 식재료의 구매자와 공급자, 교사, 학부모, 지역 농민, 개혁적인 정치인들이 결합하면서 학교 급식의 흐름은 건강과 환경과 지역과 교육이라는 복합적인 목표 달성을 위한 거대한 도시 전환 프로젝트이자 진정한 녹색국가 만들기 프로젝트로 진화해 간 것이다.
무상 유상 논쟁 오늘로 종지부를 찍고, 이제 우리가 도달하고픈 선진국 스탠더드에 맞게 친환경 지역 먹을거리(local food)를 향한 제2라운드를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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