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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의 '섹시' 대결, 인간 수컷이 할 수 있는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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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의 '섹시' 대결, 인간 수컷이 할 수 있는 일은?

[親Book] 허먼 멜빌의 <모비 딕>

사랑스러운 여자친구에게 원숭이가 섹시하다는 말을 듣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코믹 SF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는 "우리는 영장류에서 가장 성공하고 부자가 된 일족으로, 우리보다 덜 성공한 친척들을 어찌 되었든 보살펴야 한다"(<마지막 기회>, 109쪽)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세상의 이야기일 뿐이다. 친척들이 종종 우리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그저 한번쯤 혀를 찰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속이 쓰리거나 배가 아픈 경우도 있겠지. 하지만 섹시함을 느끼지는 않으리라는 것에 내 돈 모두하고 손모가지를 걸 수도 있다. 몇몇 작가들과 일본의 어덜트비디오(AV) 제작사들은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들 직업의 고유한 세계관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연인의 입을 통해 듣기에 그다지 좋은 주제는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영화감독 주드 아패토우 류의 코미디 영화에서 비슷한 대화를 본 기억이 난다. 친구 집에 놀러간 주인공이 뒷마당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는 금발의 여인을 발견한다. 주근깨 가득한 곱슬머리 주인공의 넋 나간 얼굴과 반짝이는 물방울을 흩뿌리며 풀사이드로 올라오는 글래머러스한 여체를 줌 인하는,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슬로모션이 이어진 후 친구가 심드렁하게 말한다. "사촌이야. 방학이라고 쟤네 엄마가 보냈는데 귀찮아 죽겠어." 그러면 아직까지 그녀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주인공이 한숨을 내뱉듯 중얼거리는 것이다.

"죽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금발'이나 '글래머'가 아니다(원한다면 여기서 잠시 그 단어들의 여운을 즐기셔도 좋다. 나도 그렇게 했다). 그것이 친구의 사촌이라는 사실이며, 정작 친구는 그녀가 아무리 '죽이더라도' 심드렁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할리우드의 도덕률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원숭이에게 섹시함을 느끼는 일은 도덕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공정하지 못한 일이고, 알다시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놀랍도록 문명화된 세상에서 우리에게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할리우드 영화뿐이다. (그들은 가장 화끈한 노인들과 여성적인 마초들과 리버럴한 근본주의자들로 구성된 방대한 자문위원단을 거느리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의 교훈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아름다운 지구촌 마을에 쓰나미 같은 아노미가 밀려올지도 모른다.

발단은 영화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이었다. 근자에 개봉한 대부분의 영화에 심드렁하던 여자친구님께서는 원숭이 친척들에게 참으로 이례적이라 할 만한 관심을 표명하셨고, 나는 여성을 존중하는 현대 남성다운 태도로 "얼마나 멋있는지 나도 모르게 원숭이를 응원하고 있더라"던 친구의 말을 인용하며 그녀의 의견에 무조건적인 동의를 표했던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께서는 혀를 차셨겠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친척들은 우리에게 항상 혀를 차게 마련이니까.

문제는 그녀가 소셜 네트워크 시대를 살고 있는 문화인답게 "심지어 원숭이가 무척 섹시하게 느껴질 정도"라는 한 트위터리안의 평을 인용하면서부터다. 당황한 내가 남자친구로서의 본분도 잊은 채 이러저러한 간투사("아아, 으음, 호오" 등등)를 내뱉으며 진화의 장구한 역사와 인류문명 전반, 그리고 종족 보존 본능의 본질에 관한 생각들을 정리하는 사이 그녀가 결정타를 날렸다.

"사실 킹콩도 그렇지. 여자들이 원하는 섹시하고도 원초적인 남성성을 갖고 있다고."

세상에, 원숭이 친척들로도 부족해 킹콩이라니! 이 자리에서 굳이 내 키를 밝힐 필요가 있을까? 어느새 하얗게 되어버린 내 머릿속에서는 킹콩이 홀로 그 거대한 가슴팍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릴 뿐이었다. 쿵쿵, 쿵쿵, 쿵쿵, 쿵쿵…….

나는 궁금했다. 여자들이 원하는 섹시하고도 원초적인 (빌어먹을) 남성성이 도대체 뭔데? 독서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놈들은 책을 읽지 않으니까. 장담하건대 자기 이름도 못 쓸 거다. 그리고 만약 독서가 현대 여성들에게 섹시함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면 맹세코 나는 이런 인생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여자들이 원하는 건 커다랗고 무식한 털북숭이인가? ('털복숭이'는 표준어가 아니란다, 이 원숭이들아!) 나는 배신감을 느꼈고, 평생에 걸쳐 공고하게 쌓아왔던 가치관들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말이나 표범, 사자도 아닌 원숭이라니.

섣부른 오해는 사양한다. 나는 지금 인간이라는 종의 우월성을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솔직히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인류라는 가족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언제나 나를 포함한 인류 전체에 혀를 차왔고, 이제는 혀가 닳아 없어질 지경이다. 내가 영어를 못하는 건 바로 그런 이유다.) 단지 이래서야 보람이 없다고 느낄 뿐이다. 왜 아니겠는가? 진화의 어느 골목길에서 우리와 다른 길을 선택한 게으른 친척들 중 하나가 단지 영화에 출연했다는 이유로 우리보다 더 섹시한 존재가 된다면, 평범한 호모 사피엔스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창세기 3장 17절)어야 할 이유는? 9년의 의무교육 과정, 이어지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7년, 군대 2년과 평생을 일해 주겠다는데도 싫다는 직장, 교양인처럼 보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하는 그 온갖 지루한 책들… 이 모든 게 결국 우리를 덜 섹시하게 만들 뿐이라면 말이다.

나도 지금 내가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어쩌면 아주 지엽적인 한 단어('섹시')에, 그 단어의 상투적인 용례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루마리 휴지를 풀어헤치듯 너저분한 망상의 꼬리를 끊임없이 당겨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 좀 읽는 현대 남성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또 어디 있는가?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말하자면 인류라는 종 전체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정정하겠다. 인류의 절반인 남성들의 미래와 정체성에 관한 문제다. 정확하게는 그 중에서도 책을 읽는 남자들의 문제다. 나는 가끔 문제를 부풀리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할리우드의 자문위원단 만큼이나 진지하다. 비록 그들이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에 대해서는 잘못 판단한 것 같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진화라는 프로젝트 자체가 잘못된 거 아닌가? (그러고 보니 혹성탈출 옆에 붙은 '진화의 시작'이라는 부제도 어쩐지 미심쩍다.) 그토록 고생하며 뭍으로 올라와 책을 잡을 수 있도록 엄지까지 만든 대가가 고작 이런 것이라니, 물고기 조상님들도 혀를 차겠지. 최소한 빠끔거리긴 하실 거다.

그리하여, 언젠가 더글러스 애덤스가 순진한 친척들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나는 오두막으로 들어가 원숭이가 이룩한 가장 멋진 업적 가운데 하나를 찾기 위해 개미떼 사이를 뒤적였다. 그것은 작대기를 잔뜩 짓이겨 걸쭉하게 만든 뒤 넓고 얇게 편 다음 한때 암소 몸에 붙어 있던 무엇인가로 한데 묶어놓은 것이었다." 위의 책, 23쪽) 나 역시 책을 집었다. 내가 달리 뭘 하겠는가? 책 따위는 버리고 온몸에 발모제를 바른 후 어떻게든 섹시해지기를 기대하거나, 섹시는 포기하고 독서나 하면서 멸종되기를 기다리거나다. 하지만 나는 무엇도 포기하기 싫었다. 책을 통해 원숭이보다는 인간 수컷이 더 섹시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고, 나아가 독서라는 행위 자체도 섹시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이런 날을 대비해 밑줄을 잔뜩 그어 놓은 책들을 뒤졌다. 이내 든든한 지원군이 나타났다. 모든 덜 자란 남자들의 친구, 현대 남성의 대변인, 닉 혼비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촌 간의 섹스. 여러분은 찬성인가, 반대인가? 이렇게 묻는 이유는 오로지, 이달에 먼저 읽은 두 권의 책, 메일 밀로이의 <거짓말쟁이들과 성자들>과 멕 로소프의 <내가 사는 이유>에서 그 질문에 아주 크게 찬성했기 때문이다. 토마스 하디나 오스틴의 책에서 주인공들은 사촌지간에 약혼을 하든가 같이 자긴 하지만, 그건 정수기도 없고, 데이트 주선 회사도, 대학 댄스파티도 없던 시대였기 때문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거짓말쟁이들과 성자들>과 <내가 사는 이유>에서 너무나 우울한 점은, 책의 시대배경이 현재라는 점, 후자의 경우는 심지어 가까운 미래라는 사실이다. 내 사촌이나, 모든 일은 집안 내에서 해결하려는 '빌리버' 독자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뜻은 아니지만, 정말 우리에게 바랄 것이 그것밖에 없어야 할까?" (<런던스타일 책 읽기>(이나경 옮김, 청어람미디어 펴냄), 151~152쪽)

나는 일기장 대용으로 쓰는 비밀 블로그를 열어 혼비의 글과 함께 72 포인트의 궁서체로(물론 빨간색으로) "옳소! 옳소! 옳소! 옳소!"라고 써보았지만 평소와는 달리 분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잠깐, 이건 단지 사촌과의 섹스를 추천하지 않는다는 뜻이잖아? 이런 주장을 밀고 나간다면 원숭이들이 우리보다 섹시하다는 사실만 인정하는 일이 될 것이었다. 더욱 애틋하게 만들어주는 꼴이다. 그런데 내가 읽은 책 중에 원숭이가 섹시하지 않다고 말해줄 책이 있던가?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모비 딕>(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펴냄)을 들었다. 몇 번이나 '다시' 읽으려 마음먹었지만 한 번도 펴보지는 않았던 허먼 멜빌의 위대한 '고전' 말이다. 바다 그리고 거대한 흰 고래와 싸우는 남자들이라니. 그래, 이보다 더 야성적이고 섹시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을까?

▲ <모비 딕>(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펴냄). ⓒ작가정신
어쩌면 프로이트의 방식을 따라 <혹성탈출>의 침팬지에게 느낀 분노가 킹콩으로 옮겨갔고, 무의식의 지름길을 따라 커다란 원숭이의 상징적 등가물인 거대한 흰 고래에게로 전이된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것들은 또한 커다란 남근을 상징하며… 아니, 아니다. 그만두자. 이건 섹시하지 않다. 거대한 남근을 좇는 건장한 남성들의 이야기라니, 할리우드도 싫어할 것이 분명하다.

라캉과 지젝을 따라 거대한 실제의 침입과 공포 운운할 수도 있겠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누군가 잘 아시는 분이 내게 메일을 보내주면 좋겠다. 나는 잘 모르니까. 나는 단지 거대한 포유류를 혼내주는 이야기를 꺼내 놈들을 벌벌 떨게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종종 이런 일을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소설 공모전에서 떨어진 나의 2005년 작 '아내와 마구로'는 아내가 자신을 떠난 것에 분노한 남편이 아내가 즐겨 먹던 대형어종-참치회-에 분풀이를 하는 내용이었다.)

내가 멜빌에게 기대한 것은 야성미 넘치는 모험담, 거대한 생명과 사투를 벌이는 원초적 남성성의 드라마였다. 나는 아동용 축약본으로도 <모비 딕>을 읽은 적이 없지만, 에이해브가 종내 패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점이 이 책에 그리스 비극의 풍미를 부여했다는 사실 또한. 하지만 나는 패배에는 관심이 없었다. 집요한 추적 과정에서 폭발하는 아드레날린과 남성성의 유산을 찾으면 그만이었다. 호모 사피엔스야말로 원초적 남성성의 정당한 상속자임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승산 있는 게임이었다. 생각해보라. 820쪽짜리 책에서 무언들 못 찾겠는가?

하지만 나는 패했다. 이 두꺼운 책의 한 장, 한 장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과 액션, 테스토스테론의 향기로 가득할 거라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런 걸 기대했던 것도 아니다.

"나를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라며 짐짓 호방하게 이야기를 시작한 화자는 이내 새파란 풋내기로 판명된다. 젊은 선원의 모험담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책은 이런저런 장난으로 소심한 화자를 골탕 먹인 후 100페이지에 이르러서야 그를 배에 태웠고, 이윽고 멜빌 자신이 '고래학'이라고 불렀던 고래에 관한 일종의 생물학 리포트를 늘어놓더니 이내 당신이 고기잡이 배에 팔려가기라도 한다면 아주 유용하게 쓰일 것이 분명한 포경선의 시스템에 관한 잡다한 지식으로 페이지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100쪽, 200쪽, 300쪽, 400쪽… 그건 그리 섹시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당신이 만약 철학이나 신학을 전공했다면 종교와 신, 그리고 운명에 대한 사색 부분에서 조금 숨이 가빠질지도 모르겠다.) 나는 절규했다. 도대체 멜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호쾌한 남성미와 다듬어지지 않은 야성, 원초적 섹시함은 어디로 사라진 거야?

나는 우울하고 절망적인 기분으로 책의 나머지를 읽어 내려갔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희망은 조금씩,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이 스러져가고 있었다. 나의 야심찬 계획 또한 박살났다. 애당초 침팬지는 반란을 일으키고 킹콩은 금발의 여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는데 사람은 고작 책이나 읽다니, 이래서야 도무지 이길 도리가 없다. 나는 단지 이 모든 고래학과 포경선의 구조와 밧줄을 묶는 법에 대한 책을 계속해서 읽어야 할지 궁금할 뿐이었고, 그럼에도 계속해서 책을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원초적 남성성. 그런 것이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다면 고작 그런 부분이다. 한 번 든 책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읽기. 그건 그리 섹시한 부분은 아니었고, 나는-그리고 나의 독서 유전자를 모두 물려받은 후손은 얼마 못 가 자연 선택과 성 선택 모두에서 소외된 채 진화의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는 패배를 인정했다. 일종의 자포자기, 바다에 표류한 선원이 어느 순간 목마름을 견디지 못해 바닷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게 되는 것과 같은 패배였다. 나는 바닷물 대신 <모비 딕>의 남은 페이지들을 허겁지겁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의 매력 없는 독서유전자 덕분이라고 말한다면 공정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멜빌의 문체 때문이었으니까. 단단한 동시에 경쾌하며 종종 유머러스하고 때론 아름답기도 한 그의 문체는 별 볼일 없는 나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그런 문체라면 웹사이트의 '서비스 이용약관'과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한 장문의 쓰레기도 단숨에 읽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이야기는 느리게나마 꾸준히 앞을 향해 나아간다. 고래와 포경선에 대한 논문에 사이사이로 '피쿼드' 호는 계속해서 바다를 항해하고 주요 인물들을 비롯한 선원들을 갑판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것이다. 상식과 객관적인 시각을 간직한 이슈메일은 이상적으로 구현된 보통사람 그 자체로, 별다른 활약은 없지만 무척 귀여운 화자다. 온 몸에 문신을 새기고 우상을 숭배하는 고귀한 야만인 퀴퀘그는 초반에 비해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 비중이 보잘 것 없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남자가 봐도 무척이나 섹시한 인물이다. (사실 이 친구는 어쩐지 원숭이 친척들과 더 가까워 보이기는 한다. 멜빌 당신마저!) 항해사인 스타벅과 스터브 그리고 플래스크의 평면성은 조금 실망스럽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모비 딕>에는 소설의 역사에 길이 남을 문제적 인물, 에이해브가 있다.

그는 미치광이다. 성격파탄자다. 그렇다고 섹시한 록 스타는 아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운명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람, 철저히 패배하는 영웅, 광기와 숭고가 뒤섞인 인물이다. 치유할 길 없는 내면의 불길에 시달리며 스스로를 파국으로 몰고 가지만, 부서지기 전까지는 결코 물러서지도 패배하지도 않는 인물이다.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지만, 우리는 800여 페이지를 그와 함께 보내야만 하고, 어느덧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튀어나온 듯 광기어린 장광설을 내뱉는 괴팍한 늙은이의 눈물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앞에 놓인 운명을, 그 파국의 의미를 이해하듯이.

"에이해브는 승강구를 나와 천천히 갑판을 가로지르더니 뱃전 너머로 몸을 내밀고, 깊은 물속을 꿰뚫어보려고 애쓸수록 물에 비친 그의 그림자도 그의 시선에 따라 점점 깊이 가라앉는 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 황홀한 공기에 감도는 상쾌한 향기가 드디어 그의 영혼을 좀먹는 고뇌를 잠시나마 쫓아버린 것 같았다. 그 찬란하고 행복에 찬 공기, 그 상쾌한 하늘이 마침내 그를 어루만지고 쓰다듬었다. 오랫동안 그렇게 잔인했고 가까이 가기도 어려웠던 계모 같은 세상이 이제 자애로운 두 팔로 그의 고집 센 목을 끌어안고, 아무리 잘못을 저지르고 제멋대로 구는 자식일지라도 구원하고 축복할 수 있다는 듯이 그를 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에이해브는 깊이 눌러 쓴 모자 밑에서 바다로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드넓은 태평양도 그 작은 눈물 한 방울 같은 보물은 갖고 있지 않았다." (736쪽)


이제 마지막 무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운명을 마주하고, "아담 이후 지금까지 모든 인류가 느낀 분노와 증오의 총량을 그 고래의 하얀 혹 위에 쌓아 올려, 마치 자기의 가슴이 대포라도 되는 것처럼 마음속에서 뜨거워진 포탄을 그곳에다 겨누고 폭발시"킨다. 그는 결국 패배했지만 중요한 사실은 아니다. 인간은 이기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니까. 그는 해야 할 일을 했고, 그 일을 하며 죽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운명을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그보다 숭고한 죽음을 상상할 수 없다.

멜빌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해야 할 일을 했다, 고. 비록 내가 앞에서 불평을 늘어놓긴 했지만, 그에게는 플롯과는 상관없는 이런저런 소논문들까지도 모두 필요했던 것이다. 그가 하려 했던 것은 고래를 닮은 책을 쓰는 것이었으니까. 당신도 이 책을 읽는다면 아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고래를 다룬 책을 고래 그 자체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죽지도 미치지도 않은 채 너무나 훌륭한 방식으로. 아, 이건 좀 섹시하다. 사실 옛날 작가들은, 특히 걸작을 남긴 작가들은 모두 섹시하다. 애초에 문학이란 여자들을 꼬시기 위해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근대 문학은 그렇다. 근대 문학의 종말이란 소설이 음악 및 기타 예술에 밀려 더 이상 여자를 꼬시지 못하게 된 현실을 고상하게 표현한 것이다.)

결국 나 또한 해야 할 일을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숭이들을 향한 무차별적인 질투와 열등감, 현대 여성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떠는 대신, '프레시안 books'는 물론 여자친구의 심기까지 건드릴 이런 글을 쓰는 대신, 그녀의 손을 잡고 극장에 가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을 보아야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올바른 현대 남성의 자세가 아니던가? 어쩌면 나도 그들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 여주인공과 사랑에 빠질지도 모르지.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우리가 새로 알게 된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새롭게 발견한 원숭이에 대한 우리의 취향에 대한 이야기를, 밤이 새도록. 어쩌면 나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그토록 싫어하던 원숭이 흉내를 내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나의 2004년 작 <나를 사랑하면 원숭이 흉내를 내봐>를 낭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 여느 할리우드 엔딩 못지않게 아름다운 밤이 될 것이다.

차라리 여자친구에게 <모비 딕>을 내밀며, 고래 같은 책을 쓰고야 만 작가의 섹시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호모 사피엔스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를 흥분시키는 책을 통해, 인간 수컷에게도 그럴듯한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이. 하지만 나는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다른 남성에게 섹시함을 느끼는 것보다는 차라리 원숭이에게 느끼는 게 낫다는 생각이 그제야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건 분명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생각이었다. 허먼 멜빌 같은 작가에게 질투심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도무지 극복할 방법이 없을 테니까.

* 이 글은 (본인이 허먼 멜빌의 손자라고 주장하는) 뮤지션 모비(Moby)의 새 앨범 <몽롱한(Destroyed)>을 들으며 작성되었습니다.
* 이 글을 쓰는 동안 한 마리의 원숭이도 다치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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