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일과 반복되는 일상에 파묻히다 보면 학문 연구자임에도 전공에만 몰두할 뿐 문학 작품을 접할 기회도 부족하고,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예술·문화에 동참하는 일 또한 번거롭고 사치스럽게만 느껴진다. 다른 이들은 보다 여유 있고 충만한 삶을 살길 바라지만 대한민국의 많은 중, 장년들이 필자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한때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으며 실존과 고독, 상실에 공감하고 힘을 얻던 때가 있었으나, 아이들이 <해리 포터>를 즐기듯이 스릴과 모험이 넘치는 '소설'을 읽는 여유를 바라는 것이 이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서평을 쓰는 일이 아니었다면 3권이나 되는(혹은 그 이상일) <1Q84>(전3권, 양윤옥 옮김, 문학동네 펴냄)의 하루키를 다시 만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랜만에 읽는 장편 소설이라 이 책에 몰입하는 데만 2주 이상이 걸렸다. 그러나 처음 몰입이 힘들었을 뿐 인간과 현대성에 대한 통찰로 가득한 2000쪽가량의 모험담은 쉼 없이 읽혔다. 그리고 일상의 지배와 자명함을 잠시 보류한 채 이제 하루키처럼 하나의 달이 아닌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려 한다.
개인과 전체, 선과 악, 현실과 비현실, 완전과 불완전 등 이분법적 세계의 구분 가능성에 대해 의심해 볼 것. 이것이 제목 안의 Q, 즉 'Question mark'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상실의 시대>, 현대인의 고립과 고독
▲ <1Q84 1>(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상실의 시대>(정확하게는 <노르웨이의 숲>)에서부터 <1Q84>까지 하루키 소설에는 자극적인 성관계와 충격적인 폭력이 자주 등장하며, 재즈, 캔 맥주, 비틀즈, 피츠제럴드, 스파게티 등 현대를 상징하는 기표들로 내용이 가득 차 있기에 그 장식들을 배치하고 연결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학생 운동을 겪으며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상황에 실망하고 하루키는 이념보다는 자본주의를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비합리적인 현실성을 고발하고, 허구와 환상으로 가득 찬 세계 속으로 도피하려는 것인가?
물론 초기 하루키 작품들 속에는 개인주의와 감상주의의 면모가 다분히 있으며, 타인과 적극적으로 교감하고 소통하려는 섣부른 시도보다는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채 내면에 머물고자 하는 경향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소설을 관통하는 보다 근본적인 의지는 세계의 심층에 대한 해명과 이를 통한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의 문제이다.
이를 위해 먼저 인물들이 처한 시대적, 감정적 상황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서술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인물들은 아무리 주변부 인물이라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꿈틀거린다. 한 평생을 NHK 직원으로 조직 안에서 살다 혼령이 되어서도 문을 두드리며 밀린 세금을 독촉하는 아버지, 볼품없는 외모 때문에 사람들에게 따돌림 받으며 자신을 자립시킨 용의주도한 추적자 우시카와, 재일외국인으로 유능한 보호자이자 킬러라는 상반된 역할을 떠맡는 다마루 등 <1Q84>에서도 우리는 선명하고 압도적인 캐릭터와 마주치게 된다.
하루키는 현대인의 고립과 단절, 그리고 고독과 체념에 대해 누구보다 예리하게 진단한 작가로 유명하지만, 단지 그것에 머물거나 안주한 베스트셀러 작가는 아니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 자신의 방식대로 진단하는 것, 그리고 무시하거나 체념하는 대신 치유와 회복의 가능성에 대해 모색해보는 것, 사실 무뚝뚝하고 건조한 문체 속에는 세계와의 대결이라는 승부사로서의 끈질김과 치열함, 그리고 현대인이 처한 막다른 상황을 돌파하려는 용기가 숨어 있다.
그 승부 근성이 <1Q84>에서 정점에 이른다. 따라서 하루키 소설의 판타지, 폭력성, 낭만성 등의 요소는 독자를 즐겁게 하려는 엔터테인먼트 요소라기보다는 이러한 문제의식의 답을 얻기 위한 하루키 나름의 치밀한 장치들로 보아야 한다. 즉 폭력과 숭고, 선과 악, 죽음과 재생, 물질과 정신 등 세계의 근본을 이루는 문제들이 궁극적으로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질문들과 연결될 때 섹스, 폭력, 종교, 판타지 등을 소설 전면에 도입하고 배치한 이유가 설명될 수 있으며, 하루키 소설의 미시와 거시의 전체적 틀이 이해될 수 있다.
오웰의 <1984> 혹은 하루키의 <1Q84>
<1Q84>를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길은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어보는 것이다. <1984>에는 텔레스크린과 같은 기계를 동원해 사람들을 감시하면서, 사회를 지배하는 '빅 브라더'라는 독재자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체제에 묶여 자립적으로 생각하는 능력과 힘을 잃게 되고, 막연한 불안과 무력감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서서히 자멸하고 말 것이라는 것이 1930년대에 진단한 오웰의 암울한 인류의 미래상이었다.
즉, 오웰은 공산주의 체제가 아무리 이상적일지라도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불합리한 체제가 될 뿐이라고 예측했던 것이다. 하루키는 이러한 오웰의 세계관에 경도된 듯하며, 인간을 지배하는 시스템의 위험성에 동의하는 한편, 이를 해체하고 극복하는 모험으로까지 이야기를 끌고 간다. 즉, <1Q84>는 <1984>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러나 만일 빅 브라더가 체제를 지배하고 인간을 조정하는 위험인물이라면 스탈린을 숙청하듯이 이들을 제거하면 간단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1984>에서도 빅 브라더의 실체가 끝내 공개되지 않듯 빅 브라더는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 인간들의 불안과 공포가 만들어낸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실체 없는 실체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세계관이 바뀌지 않는 한 어느 시대나 상황에서도 빅 브라더는 형태를 바꿔 존재할 수 있다. 돈이나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때론 종교나 이념의 형식을 빌려 인간을 규정하고 억압할 것이다. 하루키는 시스템이 곧 인간성의 부산물임을 간파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소시민들의 사유와 내면에 자리한 이러한 심층적인 악에 대해 하루키는 '빅 브라더'가 아닌 '리틀 피플'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공기 번데기를 만들어내는 리틀 피플은 단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상 존재가 아니라 지각하는 자(퍼시버)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인간들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실체다. 나아가 인간과 분리된 개별 실체가 아니라 인간을 이용해 존재하는 기생 실체며, 인간의 이면성 자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선과 악, 허구와 실재, 언어와 행위, 현실과 비현실이 맞물리고 뒤섞여 돌아가는 하루키의 세계관은 이처럼 다층적이고, 다차원적이기 때문에 단지 그의 소설을 추리물이나 판타지, 연애 소설로만 단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열망이 세계를 바꾼다
<1Q84>에서 두드러진 점은 주인공들의 활동성이다. 이제 주인공들은 캔 맥주나 마시며 재즈에 빠져있던 냉소적인 현실의 방관자는 아니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안고 무기력해지는 대신 덴고와 후카에리가, 아오마메와 노부인이 그랬듯이 공유하고 소통하며, 협력하고 대처하는 가운데 새로운 삶의 영역을 발견한다.
이러한 변화가 가능하게 된 것은 시스템으로부터 인간의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하루키의 작가로서의 고민과 책임감 덕분이기도 하지만, 현실에 대한 새로운 세계관을 작가가 정립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세계는 다차원적이고 다층적일 뿐 아니라, 언어가 세계를 형성하고, 존재가 의미를 가질 수 있고, 가짜가 진짜가 될 수 있는 변화 가능한 세계이다.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1984>에서는 체제를 보존하기 위한 방편으로 언어를 축소하고 개념과 표현을 한정시키며 국민을 통제한다. 그러나 <1Q84>에서는 언어의 창조적 능력과 힘이 역이용되어 시스템을 해체하고 새로운 세계를 도래하게 하는 방편이 된다. 주인공 덴고가 수학 강사이면서 대필 작가가 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수는 존재하는 세계를 추상한 것이므로 제자리에 두면 모자이크가 맞추어지듯 논리적으로 정합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거나 세계를 창조하기는 힘든 일이다. 소설의 세계는 세계를 작가의 눈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작가가 어떻게 세계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계는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되거나 창조될 수 있다. 덴고는 애초에 논리적으로 배치하는 데는 강하지만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에는 약했다. 다른 관점을 갖기 위해, 처음에는 지각하는 자(퍼시버)인 후카에리가 필요했으나 그는 곧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게 된다.
어린 시절에 헤어져 20년간 만나지 못한 남녀 주인공이 번갈아 등장하면서 사건이 전개되는 것은 도달하지 못하는 평형 세계를 의미한다. 우시카와와 같은 추적자의 변주가 끊임없이 개입하지만 평형 세계를 붕괴시키는 것은 결국 상대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힘이었다. 아오마메에 대한 덴고의 사랑과 열망은 두 개의 달이 뜨는 세계를 창조하여 이곳으로 아오마메를 소환시키며, 사랑이 없으면 거짓 세계일뿐이라며 아오마메가 자신의 세계관을 전환하는 순간에 그녀는 덴고에게 도달하게 된다.
이야기가 현실이 되며, 열망이 행위가 되고, 사랑이 세계의 구조를 바꾸게 되는 순간, '레일 포인트가 전환되듯이' 그들은 만나게 되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해명되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우리가 자명하다고 여기는 이 세계 역시 사유의 산물이다. 선과 악의, 현실과 초현실의, 가상과 실재의 선명한 경계선이 언제 우리에게 있었던가?
사랑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
마냥 청년일 듯한 하루키가 벌써 육순이 넘었다고 한다. 소설가의 연륜 덕분인지, 문제의식 덕분인지 <1Q84>에서 플롯은 더욱 탄탄해졌고, 상상력은 기발하며, 세계관은 더욱 깊고 넓어졌다.
예전 작품들이 고독하고 정적인 인물과 사건의 감각적 묘사에 주력했다면, 이번 책에서는 추리 소설적인 기법을 도입하여 긴장과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며, 구성 또한 다층적이고 정교하며 흐름도 매우 빨라졌다. 그럼에도 <1Q84>가 성공적으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는가의 평가에 대해서는 잠시 보류해야 할 듯하다.
3편으로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일단은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며, 길고 지루하게 되풀이하곤 하는 작가의 설명조의 서술은 절반쯤 줄이거나 정제했으면 싶다. 캐릭터에 침투하지 못하고 비트겐슈타인, 융 등의 학문적, 철학적인 얘기들을 다마루와 같은 킬러에게서 듣게 되는 것은 소설의 리얼리티를 반감할 뿐이다.
조지 오웰은 남녀 주인공이 고문 앞에서 세뇌당해 서로의 관계와 사랑을 부정하고 마는 것으로<1984>를 마친다. 이는 빅 브라더의 힘 앞에서는 어떠한 숭고한 사랑조차도 퇴색하고 만다는 경고였다. 오웰과는 다르게 순수한 사랑의 힘에서 구원의 단초를 찾는 하루키의 작업이 성공적이었나 하는 것에 대해 단정하는 것은 잠시 보류하자. 아직도 덴고와 아오마메의 모험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 <1Q84>의 가치는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을 보여줌으로써 '이 세계, 이 체제가 유일하고 완벽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졌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생계와 생존에 대한 인간의 불안이 유일 불변하는 절대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그 세계에 철옹성 같은 법과 질서, 시스템을 허한다. 완고한 법과 제도, 테두리뿐인 가족 관계와 인간관계 속에서 현대인은 고독하며 더욱더 고립될 뿐이다.
민주주의든 자본주의든 그 어떤 이상적인 제도와 체제든 간에 관심과 저항, 그리고 내용이 없으면 체제는 경직될 뿐 아니라 곧 부패하고 만다. 그러한 체제에 종속되어 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빅 브라더의 손아귀 안에 잡힌 꼭두각시일 뿐이다. 하루키는 문학적 상상력을 발동하여 불완전한 세상을 숙고해볼 것을 요구한다.
사유와 비판의 힘은 일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노란색 달 곁의 초록색 달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간과한 사각(死角)의 영역에 또 하나의 리얼한 세계가 숨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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