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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의 진실 vs 시민의 진실, 나와 너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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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의 진실 vs 시민의 진실, 나와 너의 선택은?

[프레시안 books]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의 <아렌트 읽기>

<아렌트 읽기>(서유경 옮김, 산책자 펴냄)는 "Why Arendt Matters(아렌트가 왜 중요한가)"라는 이름으로 나온 책의 한국어 번역본이다.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은 만년의 한나 아렌트에게서 배운 제자로, 스승의 대표적인 저작이라 할 수 있는 <전체주의의 기원>(전2권, 박미애·이진우 옮김, 한길사 펴냄), <인간의 조건>(이진우 옮김, 한길사 펴냄), <정신의 삶>(홍원표 옮김, 푸른숲 펴냄)을 각각 해설하는 세 개의 장으로 이 소개서를 편성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김선욱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 표명된 아렌트의 입장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한 지식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주목해야 할 아주 중요한 차원이 적어도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그가 진실을 위해서 포기할 수 있는 가치가 어디까지에 이르느냐는 차원이다. 소크라테스처럼 남들이 듣기 싫어하는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기에까지 이른다면, 지식인의 자세에 관해 통속적으로 가장 극적인 상이 하나 쉽사리 만들어진다.

▲ <아렌트 읽기>(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산책자 펴냄). ⓒ산책자
아렌트는 물론 유럽의 반유대주의에 의해서도, 이스라엘의 애국심에 의해서도, 미국 자본주의의 물신숭배에 의해서도 사형을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독일이든 이스라엘이든 미국 자본주의이든, 상대방이 언짢게 생각할까봐 자기가 중요한 진실이라고 믿은 바를 왜곡하거나 은폐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만큼, 아렌트는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부류의 지식인이었다고 자리매김해도 괜찮을 것이다.

한편, 진실이란 항상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질문에 대한 답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즉, 지식인이 진실을 추구한다고 할 때, 그 지식인의 정체는 어떤 질문과 관련된 진실을 추구했느냐에 따라서 규정된다. 아렌트에게 즉각적으로 중요했던 질문은 유대인과 비유대인이 공유할 수 있는 세계의 형태가 무엇이냐는 문제였다. 이 질문은 한 번의 매개를 거치고 나면 곧, 자연적이든 문화적이든 개인이나 집단 사이의 모든 차이와 구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인류로서 공유할 수 있는 세계의 형태를 찾아나서는 일반적인 탐구로 전화된다.

아렌트는 그러한 세계의 가능성을 우선 정치의 복원에서 찾았다. 물론 그가 생각한 정치란 권력이나 위신이나 명예나 부를 향한 맹목적인 투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자신의 정신 안에 잠재되어 있는 자율적인 사유의 역량을 계발해서 인간적 삶의 참된 의미를 찾기를 원하는 개인들이 건강한 토론을 통해서 상호 이해의 공통분모를 확대하는 동시에 차이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해 나가는 창조적인 영역이 그가 꿈꿨던 정치의 공간, 즉 공공의 영역이었다.

현대 문명이 물리적 효과성이라는 측면에서, 즉 자연을 착취하는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이룩한 성과를 부당하지 않게 폄하할 길은 없다. 나아가 자연을 착취하는 기술이 언제든 인간을 착취하는 기술로 둔갑할 수 있다는 위험 역시 아렌트 세대의 지식인들에게는 하나의 상식이었다. 현대에는 "무엇이든 가능하다(everything is possible)"고 요약함으로써, 아렌트는 자연적 재앙에 비해 오히려 인위적 재앙에 끔찍함과 악랄함의 규모와 정도와 종류에서 한계가 없어져 버린 상황에 경악을 표현했다.

아렌트가 느낀 경악은 단순히 끔찍함과 악랄함에 한계가 없어졌다는 데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미증유의 살육전, 인종 청소, 금융 사기, 환경 파괴 등 끔찍한 결과를 빚어내는 데 부분적으로 기여하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스스로 악행에 참여하고 있다는 자각 자체를 할 수 없게 되어버린 무사유가 그에게는 더욱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문구는 그 전에 이미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데올로기", "전면적 공포", "관료제" 등, 전체주의의 주요 구성 요소를 요약할 때부터 그의 뇌리를 맴돌던 화두와 연관이 있다.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무명의 보통 사람들을 말살하는 권력의 작용에 무명의 보통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협조하는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는가?!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은 학살당한 유대인에게만 피해를 준 것이 아니다. 학살을 모면하고 살아남은 유대인들,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애국적 독일인들, 학살을 방조하거나 묵인했던 독일인 및 여타 유럽인들 그리고 그처럼 끔찍한 사태에 직면해서 윤리적으로 충격을 느끼는 모든 인류가 피해자인 셈이다.

히틀러 시대의 독일 애국자들은 민족이라는 대의에 충성한다는 명분 아래 이웃과 자신과 전 인류를 해치는 사업에 열성적으로 동참한 것이다. 이와 같은 집단 무의식, 또는 자기기만은 모든 종교가 때때로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특질이자, 제국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 공산주의 심지어 민주주의를 포함해서 모든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빈번하게 초래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권력이 구조적으로 거짓말을 일삼으며, 따라서 권력을 시민이 진실의 눈으로써 감시하지 않는다면 "악의 평범성"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는 아렌트의 고발은 현대 및 미래의 지구촌뿐만 아니라, 더욱 직접적으로 현재 한국 사회의 각종 현상에 대해서도 심중한 함의를 가진다. 아울러 무사유성이라고 하는 현대 사회의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서 그가 진실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촉구하는 의미 역시 절박한 실천적 제안으로서 다가온다. 하지만 권력이 거짓을 말할 때에는 언제나 "진실"이라는 포장 아래서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렌트가 추구하는 진실이란 단순한 수사적인 표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수사학의 지평에만 국한해서 보면 "진실"이란 기본적으로 각자 진실이라고 믿어 말하는 바에 불과하다. 권력 정치의 공간에서, 그리고 재판정에서 소송이 벌어지는 와중에서, 우리는 이 정당과 저 정당, 원고와 피고가 각자 주장하는 무수한 "진실"들 사이에서 누구의 말을 믿어줘야 할지 혼란에 빠질 때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많다. 심지어 한 때 확고한 진실이라고 압도적인 다중에 의해 믿어졌던 것조차 나중에 권력의 변동에 따라 근거가 무너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러한 상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력감에 빠지도록 이끌어, 진실 자체에 대한 감수성을 망각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뭔가 영원불변한 진실만을 바라보면서 경험 세계에서 논쟁 중인 사안에 관해서는 침묵하는 풍조를 초래한다.

의견과 판단의 영역을 외면하고 "진리로 인도한다고 추정되는 이성에만 매달리려고"(242~243쪽) 하는 철학자들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은 이러한 풍조의 허약함에 관해 정곡을 찌른 것이다. "1914년에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했지 벨기에가 독일을 침공한 것은 아니다"라는 문장은 어떤 면에서 진실이면서 동시에 어떤 면에서 하나의 의견이다.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가 그렇게 서술하고 있으며, 그러한 서술의 진실성을 의심할 만한 합당한 이유가 특별히 없다는 면에서 그것은 진실이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또 다른 가능성을 봉쇄할 수 없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하나의 의견이다.

아렌트의 코즈모폴리터니즘에 관해서는 나로서 동의할 수 있는 면보다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아마도 더 많은 것 같다. 특히 칸트의 공통 감각(sensus communis) 및 정언 명법이라는 발상,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락시스(praxis)라든지 프로네시스(phronesis)라는 관념들을 불러와서 행위하는 삶(vita activa)의 진정한 모습 비슷한 것을 언어적으로 형상화하려고 하는 대목은 일반 명제의 형태로는 결코 정형화할 수 없는 사항을 일반화하고자 했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성공할 수 없는 시도라고밖에 평할 수 없다.

하지만 이와 같은 나의 입장을 논증하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의 입장이 각각 무엇이었는지에 관한 나의 해석이 공정한 해석임을 먼저 정립해야 하는 선결 과제를 풀어야 하는데, 이는 내가 알기로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아렌트 읽기>라는 소개서를 비판적으로 소개하는 현재의 목적을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는 본질보다 지엽에 가까울 것이다.

더군다나 진실을 향한 감수성으로부터 코즈모폴리터니즘을 연결하는 아렌트적 사유의 흐름에 대한 나의 불만을 철저히 묵살하고 내가 그에게 동의하는 한 부분만이라도 충분히 명료하게 부각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짧은 서평이 이룩할 수 있는 지적 공헌의 가능한 최대치에 근접할 확률이 내 불만을 본격적으로 개진하는 경우보다 훨씬 높아질 것이다.

내가 동의하는 대목은 이성과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판단과 의견을 논의의 주제로 삼지 않으려는 편견을 아렌트가 서양의 지성사에서 포착해서 비판한다는 점이다.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까다로운 질문들을 가시계의 사소한 일들이라고 치부하면서 회피하려는 태도는 기본적으로 학문이 유한계급의 취미로 전락해도 괜찮을 정도로 지식인이라는 신분이 구조화된 곳이면 어디서나 나타나는 일로서, 서양만의 일은 아니다.

스스로 속했던 지성사적 토대를 되짚어 비판한 아렌트의 자세를 그대로 빌려오면,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이라면 서양식 사유 형식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이 나라의 전반적인 풍조뿐만 아니라, 과거의 전통적 사유에 대해서 향수에 젖은 과잉 방어(또는 조상 숭배)를 벗어나서는 한 걸음도 떼어볼 의지를 보이지 않는 일각의 풍조에 대해서도 잘못을 추궁해야 한다.

"1914년에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했다"는 서술은 일면 진실이면서 일면 의견이다. "이성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의견을 배제했다가는 지식의 소외를 낳는다"는 아렌트의 입장 역시 일면 진실이면서 일면 의견이다. 이 두 가지 진술에 담겨 있는 내용은 물론 질적으로 크게 다르다. 하나는 시공간 상의 한 점에서 발생한 사건에 관한 올바른 보고를 지향하며, 다른 하나는 화자가 자신을 둘러싼 지적 환경에서 발굴해 낸 어떤 깨달음을 표현하고자 한다. 하지만 두 문장 모두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옳거나 그르거나 아니면 옳은지 그른지 모르겠다는 느낌을 자아내며, 그 느낌에 따라 찬성이나 반대 또는 불확정으로 이어진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두 가지는 분명하게 옳다. 첫째, 사실과 관련되는 진실이든 논리적 진실이든, 윤리적 진실이든 형이상학적 진실이든, 진실이 발견되려면 먼저 진실의 후보로서 뭔가 의견이 나와야 한다. 둘째, 인간의 삶이 중요한 계기에서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례에 관한 판단의 문제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대부분이다.

아렌트는 몽테뉴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소재로 삼아 판단과 의견을 제시하는 담론의 본보기를 봤다. 그의 생각에 이는 마땅히 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었지만, 서양의 지성사에서는 철학보다는 정치평론의 전통에서, 그것도 몽테뉴 이후의 계몽주의에서나, 찾아보기가 쉽다.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어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례에 관해 자신의 판단과 의견을 제시하고, 그럼으로써 정치의 공간에서 철학적 탐구의 논리가 나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실마리를 제공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노력이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인간의 조건>과 <정신의 삶>은, 여전히 다양한 사례들을 논평하는 가운데 판단과 의견이 표명된다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노동/제작/행위 또는 사유/의지/판단이라는 삼원적 도식에 따라 인간의 삶과 정신을 이론화하려는 의도가 무반성적으로 표면화되고 마는 아이러니에 해당한다. 영-브루엘은 이와 같은 아이러니를 어느 정도는 감지하면서, 충분히 조심스러운 논조에 실어 몇 군데에서는 지적까지 하고 있다.

"이성과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목 뒤에 숨어서 당대 현실의 사례에 대해 판단과 의견을 내놓지 않고 몸을 사리는 지식인 사회의 풍조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은 누구나 주목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나는 본다. 그런 풍조에 거역해서 철학에서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현실 정치에 대해 목소리 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일관적인 언행의 한 표본이라고 누구나 인정해 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질문은 남는다. 각자 옳다고 생각하는 판단과 의견을 말한 결과로 여러 갈래의 판단들과 의견들이 서로 어긋나고 충돌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그런 와중에서 진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 아렌트와 상관없이 내 의견을 말해 본다면, 진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는 어떤 의견들과 어떤 판단들이 어떻게 충돌하고 어떻게 어긋나는지에 따라서, 그리고 그 의문문의 주어로 자리 잡은 "진실"이라는 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따라서 크게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야말로 일반적인 언표의 형태로는 결코 답할 수가 없는 문제에 해당한다. 오로지 개별적인 주제에 관해 각자가 실질적인 판단과 의견을 제시한 후 누구의 의견과 판단에 더 많은 진실이 담겨 있느냐는 방향의 논쟁이 실제로 벌어진 결과로 진실이 스스로 권위를 행사했는지 아니면 못했는지가 판가름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진실의 정치적 역할에 관한 아렌트의 전반적인 입장과는 동떨어진 것이지만, 내 생각에는 실천적 판단과 의견의 표현을 중시한 대목으로부터는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필연적 귀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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