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북핵 문제, 왜 장택상에게 책임을 안 묻나?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북핵 문제, 왜 장택상에게 책임을 안 묻나?

[해방일기] 1946년 6월 23일

대학 등록금을 도화선으로 한국 교육 제도에 대한 맹렬한 반성이 일어나고 있다. 막상 사람들의 관심이 쏠림에 따라 교육 제도의 문제점과 그로부터 파급된 현상들이 다각적으로, 그리고 심층적으로 파헤쳐지는 것을 보고 그 동안 문제를 지적해 온 사람들도 놀랄 지경이다. '총체적 난국'이 아니라 '총체적 망국'을 향한 구조적 문제가 이토록 방치되어 있었다니.

한국 근대화의 '기형(畸形)'이라 할 만한 구조적 문제가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는 분야의 하나가 교육 제도다. 식민지 근대화론에는 두 개의 큰 허점이 있다. 그 하나는 근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만을 놓고 그것이 식민 지배 '덕분'인 것처럼 무조건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에 있어서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식민 지배에도 '불구하고' 근대화가 진행된 것으로 볼 측면이 크다.

또 하나의 허점은 근대화를 '양적'으로만 파악하고 '질적' 문제를 무시하는 것이다. 사회의 필요와 국가의 정책이 부합할 경우 근대화가 순조롭게 진행된다. 국가 정책이 사회의 필요를 잘 따르지 않을 경우 산업화를 비롯한 근대화가 진행되기는 하지만 건전한 구조를 이룰 수 없게 된다. 일본의 조선 지배에는 이런 문제가 있었다.

조선 식민 지배의 교육 부문은 양적인 기준부터 수준 미달이었다. 그 사실은 의무 교육 시행 범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고등 교육의 규모와 구조에서는 식민지 예속성의 유지·강화 목적을 위해 교육의 근대화가 억제된 사실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근대 지식인의 표준적 자격이라 할 대학 졸업생이 식민지 조선에서 배출된 숫자가 불과 300여 명이었다. 경성제국대학이 졸업생을 배출한 1929~1945년의 기간 중에도 일본의 1퍼센트 수준이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근대인 없는 근대화'를 추진한 것이었다.

해방된 조선의 독립 건국 과업에서는 식민지 교육 제도의 구조적 문제점의 극복이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다. 이를 위해 뜻있는 조선인들도 공헌할 길을 다각적으로 모색했지만 역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은 행정권을 가진 미군정이었다. 그런데 미군정의 교육 정책에는 나름대로의 문제점도 있고, 군정에 대한 반감 때문에 오해를 쉽게 사는 면도 있어서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46년 7월 중순 발표된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 방침이 촉발한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안(국대안) 파동'은 미군정에 대한 조선인의 가장 격렬한 저항 운동의 하나였다.

국대안 논의는 의학 분야에서 시작되었다. 서울의 의학 교육 기관으로 경성대학(경성제국대학의 이름을 1945년 10월에 바꿈) 의학부와 경성의전이 있었는데 경성의전은 시설 등 제반 여건이 열악했다. 더구나 1945년 12월 경성의전에 불이 나 일부 건물이 소실되어 군정청에 시설 확충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 요청에 대한 응답이 몇 달 후 경성대학 의학부와의 통합 방침으로 나타났다. 1946년 4월 30일 러치 군정장관의 기자 회견 중에 이런 문답이 있었다.

(問)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전의 합병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셈인가?
(答) 문교부장 핏텐거 중좌의 말에 의하면 합병 문제에 대해서 경의전의 학교 시설과 병원 시설의 불충실한 점과 서울대학 병원 시설이 현재 전부 사용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것을 생각했다. 현재 미 육군 중위 한 명, 조선인 의사 두 명으로 조직된 위원회가 양교 시설을 조사 중인데 동 위원회의 목적은 사실 그대로를 조사해서 보고를 제출하는 데 있을 뿐이고 아무런 결재권도 없다. (<서울신문>, <동아일보> 1946년 5월 1일자)

의과 대학 통합 방침에 이어 여러 전문학교를 경성대학과 통합해 종합 대학을 만드는 방침이 만들어졌는데, 통합 대상 학교에서는 교수와 학생이 모두 반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학교의 전통에 대한 애착도 있고, 군정청의 통합 정책이 필요한 지원을 회피하려는 의도로 의심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6월 18일에 러치 군정장관과 오천석 문교부 차장이 대학 통합설을 부인했다.

서울 안에 있는 각 전문학교 즉 경의전 경제 전문 법전 등을 비롯한 여러 전문학교는 오는 9월 신교육 제도 개혁에 따라서 단과대학으로 승격되는 것이 아니고 이를 전부 경성대학에 합병시키려는 계획을 문교에서 세우고 있다는 풍설이 돌고 있는데, 18일 러취 군정장관은 이 문제에 대하여 "지금까지 내가 아는 대로는 그러한 계획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다"고 말하며 문교부로 조사해 보겠다고 답변하였다. 문교부 차장 吳天錫도 또한 절대로 그러한 계획을 세운 일이 없다고 언명하였다. (<서울신문> 1946년 6월 19일자)

그러나 불과 이틀 후 통합설의 실체가 드러났다.

관립 전문학교를 서울대학에 전반적으로 편입시키지나 않나 하는 문제에 대하여 문교부 당국에서는 아직 이 문제를 방금 편입시키는 것이 좋을지 어떨지 각 학교에 참고 자료를 모으고 있는 중인데 그 결과가 좋으면 실시할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교부로서는 편입하는 정책으로 각 학생을 수용할 수 있을는지 질적으로 향상할 수 있는지 또 학부형의 부담과 학교 당국의 경비를 감소할 수 있을지를 고려 중이다. 그래서 문교부 밑에 있는 여러 학교에 대하여 참고 자료를 수집하고 있는데 그 결과로서 편입되는 것이 좋으면 군정장관의 허락을 얻어 실시할 터이다. (<조선일보 1946년 6월 20일자)

의과 대학 통합은 7월 5일에 확정 발표되었다.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전 양쪽에서 항의가 계속되었지만 군정청은 아랑곳 않고 통합을 강행했다. 문교부장 핀텐거 중령은 경성대학 의학부 학생들의 반대 진정서에 이런 회답을 보냈다.

경성대학 의학부 학생 제위에게

경성의전과 대학과의 합동에 관한 제위의 간절한 서간에 대답하노라. 당시에는 차건은 아직 연구 중이었으므로 논의함을 거부하였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대강에 관한 결정을 보았고 이 문제에 관해 모든 사람은 우리들이 취할 행동 이유에 찬성할 것으로 믿는다. 제위의 의견에 의하면 작은 두 학교가 한 개의 학교보다 의사를 더 많이 양성할 수 있다 하나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검토하여 보자. 많은 사람과 많은 산업을 가진 비교적 큰 면적을 가정하자. 완전히 2단위로 분리될 때 인민이 더 번창하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인가? 혹은 큰 1단위로 될 때 번창하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인가? 가령 38선에 따라 분할이 생길지라도 제위는 2개의 소단위를 주장할 것인가. 2단위가 1단위보다 더 좋으면 왜 다시 쪼개어 4개로 만들지 않은가.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의전을 각기 2개로 분할하여 더 작은 4학교로 할 때에 더 많은 의사를 양성할 것인가?

그 대답은 명백하다. 즉 모든 설비를 평등히 나눌 수 없으니까 어떤 점에는 편리하나 일편 어떤 점에는 불편을 느낄 것이다. 현재 경의전은 그 설비에 비하여 학도 수가 많다. 그런데 대학의 설비는 학생 수에 비하여 병원·학교에 있어서 여유가 있다고 믿는다. 고로 한 학교로 합동하면 서로 분리된 것보다 더 우수한 의사를 다수 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현재 양교는 문교부 하에 합병되어 있다. 고로 별다른 사태가 없다면 조선의 복리를 위하여서는 1교에서 타교에 설비를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양교의 시설은 조선의 것이고 어느 단체나 교수단 또는 학생에 속하는 것이 아닌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조선의 이익을 위하여서는 어떤 소 단체의 이익을 무시함을 주저하지 않는다. 두 학교를 한 관리 하에 두면 운용상 능률이 향상하는 동시에 문교부의 직접 처사보다 친히 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양교는 동일한 수준에 있지 않다. 전자 동일한 수준에 있었더라면 금년에라도 즉시 합병하여 많은 의사를 양성할 것이다. 그러나 양교는 수준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경의전 현 재적자가 그 과업을 종료할 때까지 학급을 각각 별개로 유지 아니할 수 없다. 경의전이 대학에 학문적으로 동일 수준에 빨리 도달하면 할수록 의사 양성 수는 더 속히 증가될 것이다.

재정 문제에 관하여서는 아무도 언급한 일이 없다. 이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가장 미약한 이유의 하나이다. 크고 굳세고 좋은 설비와 우수한 교수진을 갖춘 대학 의학부는 전기 불충분한 2교보다 일층 더 우수하고 더 다수의 의사를 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합동은 신학기부터 시작될 것이다. 완성하기에는 3년을 요할 것이다. (<서울신문> 1946년 7월 10일자)

핏텐거 중령이 "큰 단위"를 말하는 것은 '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 얘기다. 학생과 교수들이 반발한 1차적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경성의전은 교사 소실 등의 이유로 시설 확충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는데, 미군정은 지원 대신 학교를 없애겠다는 것이었다. 학교의 전통과 정체성에 아무런 배려도 없었고 대상 학교 구성원들과 아무 협의도 없었다.

의과 대학이 너무 작은 규모만 아니라면 '규모의 경제' 원리가 작용할 여지가 별로 없다. 일본인들이 의전과 대학 의학부를 따로 둔 것은 어느 쪽도 너무 작은 규모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누구나 인정했듯이 의학 교육을 크게 늘릴 필요가 있다면 당장 비용이 조금 더 들더라도 별개의 의과 대학으로 키울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군정청이 통합안으로 쏠린 것은 당장의 편의만을 위한 결정이었다.

각 학교의 전통과 정체성을 무시하는 데도 자존심을 넘어서는 문제가 있었다. 식민지 시대 최고의 교육 기관이던 경성대학과 여러 전문학교에는 상당 수준의 자율적 질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비운 자리를 채우는 데 군정청의 입김이 제일 적게 작용한 분야가 교수직이었다. 전우용은 <현대인의 탄생>(이순 펴냄) 144~147쪽에서 경성대학 의학부에서 내부 질서에 따라 교수직이 채워지던 상황을 설명했다.

1946년으로 들어오면서 미군정은 대학의 정치적 기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월 3일 600여 명의 교수·교사들이 모인 집회가 있었다. 반탁 궐기를 위해 누군가가 소집한 집회였는데 참석자들이 회의 성격에 미심한 점이 있다고 유회시켰다. (<동아일보> 1946년 1월 4일자)

그 자리에서 '전국 교육자 대회' 결성이 발의되어 2월 10일에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서울신문> 1946년 2월 9일자), 백남운, 김성진, 이태규, 도상록 등 경성대학 교수들이 중심 역할을 맡았다. 관·공립학교 교수단이 상당한 독립성을 가진 오피니언 집단으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백남운, 김성진, 이태규, 도상록. 나란히 적어놓고 보니 착잡하다. 백남운이 독립동맹과 연계하여 남조선신민당을 창당한 사실은 이미 소개했고, 김성진은 1960년대에 민주공화당의 핵심 간부로 활약한 사람이다. 교토제대 화학 교수로 있다가 귀국했던 이태규는 1948년 미국 유타 대학으로 건너갔는데 1970년대에 박정희의 뜨거운 러브콜을 받은 것이 핵개발을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물리학자 도상록. 북한에서 지금까지 핵개발의 시조로 숭앙받는 인물이다.

얘기 나온 김에 도상록이 경성대학에서 파면당한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도 교수 피검 각 방면서 주목"

양자물리학계의 권위로 학도들의 흠모를 받는 경성대학 이공학부 도상록 교수는 지난 1월 교수회에서 결정하여 학생 데모에 비용으로 쓴 돈에 대하여 책임을 지라고 공금횡령이란 악명으로 며칠 전에 돌연 파면을 당하자 경성대학은 물론 사회 각 방면의 물의를 일으키는 동시에 경성대학 교수들이 학무부에 사실 전말을 상세히 설명하고 재고를 구한 결과 문제는 원만하게 해결될 서광이 보이는 듯하더니 돌연 4일 밤 경기도 경찰부에서 체포 유치하였는데 아직 그 이유는 발표치 아니하나 그 추이는 극히 주목을 끌고 있다. (<자유신문> 1946년 6월 7일자)

이와 관련해 경성대학 이공 대학 교수단에서 6월 7일 발표한 성명을 보면 도 교수의 혐의란 교수회에서 선출된 반탁투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학생 데모에 경비를 지급한 일이다. 이태규 이공학부장은 부장에게 보고 없이 임의로 유용한 것이라 주장하고 도상록 본인은 지급 전에 부장에게 보고했다고 주장해서 진실 공방이 벌어졌는데, 6월 19일에 경성대학 탁치문제위원회 선전부에서 이런 성명을 발표했다.

금반 도 교수 파면 이유로 도 교수가 이태규 부장에게 사전 승인 없이 시민 대회 참가 비용을 사용하였다 하나 이것은 이태규 부장 개인의 주장이고 도 교수는 사전에 승인을 얻었다고 말한다. 설사 사전 승인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1월 11일 이공학부 교수회에서 동 금액은 교수회에 이 부장에게서 일시 차용한 것으로 하자는 이 부장 의견대로 정식으로 결정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필 도 교수 일인에게 처단이 내린 것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더구나 일전에 도 교수는 경찰에 구금까지 되었다가 석방되었으니만치 우리는 조선의 이공학 재건을 위하여 도 교수의 파면 취소를 당로자에게 청원하는 동시에 금반 사건에 관한 항간의 불순한 유언이 시정되기를 기다린다. (<자유신문> 1946년 6월 20일자)


당대 조선의 최고 과학자들이 이런 사안을 갖고 진실 공방을 벌이다가 한 사람은 파면당하고 또 한 사람은 2년 후 한국을 떠났던 것이다. 도상록이 좌익 활동도 아닌 반탁 운동 경비를 댔다는 이유로 경찰에 잡혀가다니…. 지금 북핵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도상록이 남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한 장택상에게도 일부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대학 통합 정책의 기본 동기는 편의주의였다. 그러나 관·공립 학교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억누르려는 의도도 행간에 느껴진다. 통합 대상 학교의 구성원들에게는 정체성의 묵살이라는 모욕감도 겹쳐져서 국대안이 미군정의 어느 정책보다도 격렬한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