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부시 따라쟁이 MB의 희생양은 '촛불 대학생'?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부시 따라쟁이 MB의 희생양은 '촛불 대학생'?

[김민웅의 '리브로스 비바'] 마이클 웰치의 <9·11의 희생양>

민주주의는 범죄다

"집회가 시위로 변질될 것이 우려돼서"라고 말한다. 이 나라 집권 세력의 한 중진 인사가 등록금 촛불 집회를 경찰이 막아야 하는 논리로 내세우는 이유다.

언제부터 이 나라에서는 "시위"가 "변질"이라는 단어가 붙는 상황이 되었고, 불법으로 규정되었는가? 이는 자기들 마음대로 금을 그어놓고 그걸 넘으면 불법이라고 으름장을 놓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시민의 정당한 권리를 공격하는 권력의 불법 행위다. 국민과 적이 되는 권력의 변하지 않는 모습이다.

어떤 정부가 국민의 주권을 억압하려 들 때 우리는 그런 현실을 "통제 사회"라고 부른다. 권력이 통제 장치를 강화하면서 내세우는 것은 그 사회의 안전이나 국가의 안보 또는 모두를 위한 질서의 방어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로, 그러한 조처가 안전을 위협하고 안보를 위태롭게 하며 모두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 상황을 가져올 뿐이다. 이른바 "위험 사회"로 그 사회의 구성원들을 몰아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고한 이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게 된다.

"용산 참사"도 이런 논리와 구조가 작동했다. 정당한 권리 주장을 불법으로 몰고, 그런 주장을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이들을 범죄자로 만들어 희생시켰다. 시민의 권리가 공격당하는 상황을 막지 못하면 그 사회는 폭력이 공권력으로 둔갑하고 법은 강자의 이빨이 되며 민주주의는 범죄가 되고 만다. 시민들은 권력의 비밀주의에 포위되고 아차 하는 순간에 사법 권력의 곤봉에 맞아 비틀거리게 된다. 개인의 사적 공간은 이로써 파괴되고 권력은 어디서나 출몰해서 그 개인의 삶을 여지없이 무너뜨릴 수 있다.

오바마는 부시와 한 몸이 되려는가?

{#8961950371#}
▲ <9·11의 희생양>(마이클 웰치 지음, 박진우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마이클 웰치의 <9·11의 희생양>(박진우 옮김, 갈무리 펴냄)은 바로 이러한 민주주의 파산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나오미 울프가 그녀의 <미국의 종말 : 혼돈의 시대, 민주주의의 복원은 가능한가?>(김민웅 옮김, 프레시안북 펴냄)에서 9·11 이후 미국 민주주의가 어떻게 하나하나 해체되어 갔는가를 밝혔다면, 웰치는 같은 현실을 놓고 법 사회학자로서 그 작동의 논리와 구조를 분석해낸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미국의 9·11 이후의 상황이 오바마 정부에 와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보이지 못했고, 그와 같은 상황은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정치 사회적 의지가 굳건하지 못하면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이 책은 9·11 이후 어떤 논리와 장치로 인해 미국의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특히 이슬람계 소수 민족에 대한 증오 범죄가 어떻게 확산되고, 시민의 권리를 짓밟는 국가 폭력이 어떤 과정을 통해 법제화되었는지 치밀하게 짚어낸다. 웰치가 가장 민감하게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러한 틀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양의 처지"가 되어 인간적 고통을 겪고 있는가에 있다.

오바마가 당선 된 이후에도 우리는 미국이 부시 시절의 여러 법제도와 군사적 조처 그리고 인권 유린 장치를 청산하지 못한 채 "제국 미국"의 힘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있다. 오바마의 개인적 한계일 수도 있으며, 그를 둘러싼 시대적 규제일 수도 있다. 문제는 부시 당시에 만들어진 각종 민주주의 파괴 장치가 아직도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웰치는 미국 사회가 냉전 시기 "명백하게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 CPD)"의 논리를 그대로 확장해서 9·11 이후의 미국 사회를 통제하고 있다고 밝힌다. 이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시피 이슬람을 그 위협 요소로 찍고 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그 사회를 공포로 압도하면서 증오 범죄와 국가 범죄를 정당화시키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는 "테러와의 전쟁은 정부의 권력 남용으로부터 모든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주요 민주주의 원칙들의 근간을 흔들어 왔다"고 지적한다.

안전 사회가 위험 사회로

이는 대단히 역설적인 결과인데, 왜 그러냐 하면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 사회를 보다 안전하게 만들겠다고 하는 것이나 현실은 더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테러에 대한 공포는 대중의 냉소주의와 결합"해버려 이른바 "경고 피로" 즉 매번 위험을 강조하다보니 피로가 누적되는 상황이 벌어져 권력이 본래 의도했던 대로 되지 않는 사태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부시 당시 만들어진 각종 사회 통제 장치는 계속 살아남아 미국 민주주의가 보장한 시민의 권리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웰치는 "미국 기독교가 악의로 무장"해서 중동 출신 이민자들에게 증오 범죄와 보복적 성격의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현실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목사 빌리 그레이엄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은 9·11 이후 NBC 나이트 뉴스와 나눈 인터뷰에서 이렇게 발언한다.

"그 빌딩으로 돌진한 자들은 감리교도도 아니며 루터교도도 아니다. 이슬람교도들이 이 나라를 공격한 것이다."

"성경의 신은 진짜지만 코란의 신은 가짜"라고 말한 그만이 아니라 TV 전도자로 유명한 패트 로버트슨은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무함마드는 사나운 눈을 가진 광인, 강도, 도적이며 악귀 들린 어린이 변태 성욕자이다."

이런 식이니 이슬람 사원은 증오 범죄의 대표적인 공격 목표가 되고 코란이 기독교인들에게 불태워지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들 이슬람은 악마가 되고 인간성이 부인당하며 열등하고 야만적인 존재로 낙인찍힌다. 희생자를 찾아내서 이들을 비난하고 이들을 희생당하도록 만들어 테러에 대한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이들에 대한 법적 통제가 당연한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 바람에 무수한 중동 출신들이 무고하게 투옥되고 고문당하며 의문의 사망 사건 당사자가 되고 만다. 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테러리스트로 분류되어 구금당하거나 추방된다. 이라크 전쟁 중에 포로가 된 이들에 대한 가혹 내지 살해 행위는 정당한 것으로 옹호된다.

"이라크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수많은 군인들이 스스로 자행한 폭력의 도덕성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한 하사관은 이반 라이트 기자에게 자신이 살인 문제로 담당 목사와 상담을 나눴다고 말했다. '목사는 그가 살인을 즐기지 않는 한, 정부를 위해 살인을 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라고 그에게 말해주었다.' 그의 부대가 바그다드 외곽 지역에 도달했을 때 이 하사관은 자신이 최소한 네 명을 살인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이후 그는 담당 목사가 살인에 대해 자신에게 말해 준 것을 되짚어 보았다. '도대체 성경 어디에서 예수가 자기 정부를 위해 살인을 해도 된다고 말했을까? 나에게 그래도 된다고 말한 목사의 말을 모두 믿을 수 없다' 라이트와 나눈 인터뷰에서 다른 병사는 '우리가 여기서 저지른 일 가운데 딱 반만 미국에서 저질러도 우리는 감옥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기독교가 옹호하는 폭력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독교가 축복하는 폭력의 현실을 본다. 미국의 보수 우파 기독교는 국가를 앞세워 살인 행위에 면죄부를 주고 그것으로 인간 살상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제국에 복무하는 인간을 격려하고 있다.

인권 단체들이 발견한 가혹 행위는 특히 관타나모 수용소에 집중되었다. 관타나모 수용소 철폐는 아직도 지켜지지 않았고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지금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들 다수의 주장에 따르면, 일부 죄수들은 15시간까지 사슬이나 수갑으로 묶여 있어야 했고 유통 기간이 10년 지난 음식을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했으며 도저히 마실 수 없는 물을 마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개를 사용한 가혹 행위에 대한 증언은 이렇다.

"항공기 납치 혐의를 받았던 모하메드 알 카흐타니가 경험한 가혹 행위에 대해 언급하면서 FBI 요원들은 그를 '위협하기 위해 조금 더 공격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개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이 사건과 관련된 기록에 따르면, 알 카흐타니의 심문관은 그가 개처럼 존경심을 표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그에게 말해주었다. '우리는 죄수의 사회적 지위를 개의 지위까지 상승시켜주기 위해 죄수들에게 기다리고 달려오고 짖는 행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때 죄수들은 평정심을 잃기 시작했다."

죄수라는 표현도 옳지 않고, 개의 지위까지 격상시킨다는 발상과 발언도 경악스럽다. 웰치의 고발은 계속 이어진다.

고문자들의 권력 그리고 민주주의

고문에 대한 금지를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 부시 당시 법무부 장관으로 악명을 떨쳤던 존 애쉬크로포트는 이렇게 반론을 편다. 고문은 테러를 박멸하는데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인데 이걸 문제 삼으면 이적(利敵) 행위가 된다는 논리다.

"당신들의 전술은 테러리스트를 돕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들의 전술이 미국의 단결력을 약화시키고 미국의 결단력을 나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위험한 전술은 미국의 적들에게는 군수품을 제공해주고 있고 미국의 우방들을 망설이게 만들고 있다. 당신들은 악과 대면한 상황 속에서 선의의 사람들로 하여금 침묵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웰치는 이러한 부시 정부의 방식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부시 행정부는 대중의 눈을 가리기 위해 테러와의 전쟁을 이용했고, 이 전쟁을 근거로 하여 자신들이 테러 공격에서 시민들을 보호하고 있음을 부각시켰다. 이렇게 테러와의 전쟁은 부시 행정부의 재집권뿐만 아니라 이들의 권력의 공고화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래서 그는 9·11 이후 미국의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가격한 '애국자법(the Patriot Act)'에 대해 상원에서 유일하게 반대를 표한 위스콘신 주 상원의원 러스 파인골드의 반론을 이렇게 인용하고 있다. 파인골드의 주장은 다소 길지만 읽어볼 가치가 매우 높다. 우리에게 이런 정치인은 없는가라는 자문이 생긴다.

"물론 우리가 경찰 국가에서 살게 된다면 테러리스트를 훨씬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유와 시간을 막론하고 경찰이 당신의 집을 수색할 수 있는 국가에서 우리가 살게 된다면, 정부가 당신의 우편물을 열람할 수 있고 당신의 통화 내용도 도청할 수 있는 국가에서 우리가 살게 된다면, 사유가 불확실함에도 정부가 독단으로 고안해 내 조작된 이야기와 대부분 형편없고 단순한 그들의 의심만 있으면 사람들이 투옥될 수 있는 국가에서 우리가 살게 된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정부는 지금보다 더 많은 테러리스트를 색출해내어 검거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이러한 모습의 국가는 우리가 살고자 하는 국가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의 국가는 각자의 양심에 따라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목숨을 바쳐 꼭 지켜달라고 요구할 만한 국가의 모습도 아니다. 요컨대, 미국은 이러한 모습의 국가와 거리가 먼 것 같다. 우리가 지금 테러와의 전쟁에 관여하고 있는 중대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자유를 수호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만약 미국인들의 자유가 희생된다면 총 한 발 맞지 않고도 전쟁에서 패한 것과 같다."


대 테러 전쟁은 결국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그의 비판은 정확하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자유를 억압한다는 것은 명백한 거짓이자 기만이다. 자유를 억압하면서 자유가 지켜지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이클 웰치의 책은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과 미셀 푸코의 감옥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9·11 이후 미국 사회의 변화를 추적하고 있다. 지라르는 고대로부터 인간 사회는 자신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지목하고 그를 희생시킴으로써 위기 상황을 종료시키는 환상을 제조한다는 것이다. 푸코는 감시 체제가 한 사회의 관리 방식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추출한다. 이 둘을 결합시키면, 통제와 희생자 색출이 하나로 묶여져서 권력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알게 된다. 9·11 이후 미국 사회는 이런 작동 방식이 고스란히 관철되어간 경우다.

그런 까닭에 그의 책은 5장의 "반격 폭력으로서의 증오 범죄"부터 봐도 좋다. 구체적인 현실을 읽고 1장부터 4장까지의 이론적 정리로 돌아가면 이 책의 장점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덧붙여 언급하자면, 역자가 이제 1984년생이라는 점이다. 숫자가 상징적이기도 하다. 조지 오웰의 작품 <1984>를 떠올리게 하는 9·11 이후 현실에 대한 반격이기도 한 이 책을 옮긴 박진우는 이 책을 자신이 골라 읽고 출판사와 이야기도 하기 전에 번역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 세대가 오늘의 현실을 구성하는 논리와 그 핵심에 이렇게 바짝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반갑고 또한 기쁜 일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안전한가? 아니면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는가? 혹시 더 위험해지고 있다면 그 과정에서 누가 희생되고 어떤 통제 장치가 강화되고 있을까? 이 책을 읽고 나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의 한국 사회는 9·11 이후 미국 사회의 변화와 함께 가는 자화상 내지 거울 같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게 된다. 두 사회 내부에 관통하고 있는 원리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9·11 이후 미국 사회의 현실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건 시민의 권리에 대한 권력의 공격에 의한 사회적 안전의 위기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쥐고 있는 권력은 민주주의를 범죄로 만들고 시민의 권리를 불법화시키고 있다. 그런 권력이 바로 범죄이고 불법이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안전 사회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분명하지 않을까? 행동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