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북아프리카를 공격하고 있다. 프랑스와 영국의 주도로 미국이 거들고 있는 상황에서 이슬람 지역인 리비아는 공습의 목표가 되어 전란의 현장이 되고 있는 중이다. 리비아 카다피 체제에 대한 내부적 반발이 "지중해 전쟁"으로 확전된 셈이다. 내전과 국제전이 하나로 엉킨 이 현실은 이 지역을 둘러싼 오랜 역사의 기억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것은 유럽의 정체성 논의와 이어진다.
그 역사의 기억은 단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친 식민지 쟁탈전에 국한하지 않는다. 이슬람이 지중해를 장악하면서 로마와 비잔틴을 잇는 동서 교역로가 차단되고, 지중해 연안의 패권이 유럽 내부로 옮겨지게 된 7~8세기의 시기는 고대의 종식과 중세의 시작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는 오늘날 우리가 유럽이라고 부르는 지역의 중심이 형성되는 매우 중대한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대치와 갈등의 역사는 이렇게 길다.
사실 이렇게 시기 구분을 하는 것은 통상 로마가 무너진 3~4세기를 고대가 끝나고 중세가 출발한다고 보는 시각과는 다른 시선이다. 이는 <마호메트와 샤를마뉴>(강일휴 옮김, 삼천리 펴냄)를 쓴 벨기에 출신의 세계적인 중세사가 앙리 피렌의 독특한 역사 해석이다. 그 해석의 핵심에는, 유럽의 역사는 이슬람의 역사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이슬람이 있었기에 지금의 유럽이 있다는 것이다. 이슬람에 대한 유럽의 우월의식이나 지배의 역학은 이로써 설 자리가 없다.
고대의 종식과 중세의 시작
▲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앙리 피렌 지음, 강일휴 옮김, 삼천리 펴냄). ⓒ삼천리 |
프랑크, 알만, 고트 등의 부족들이 사방에서 압박해오고 반달족은 지금의 리비아 지역인 북아프리카 지역까지 석권하는 상황에서 로마 제국은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게 된다. 그러나 이로써 로마 제국의 수명이 다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동쪽에 서기 330년 세워진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거점이 있었고, 게르만은 로마 제국을 점령하긴 했으나 로마 제국의 틀 속에 용해됨으로써 로마의 문명사적 관성은 지속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연결됨으로써, 서쪽보다 우수한 문명적 자산을 가지고 있던 콘스탄티노플 쪽이 로마 제국의 상속자로서 주도권을 갖게 된다. 특히 콘스탄티노플은 라틴적 요소가 지배적인 서로마에 비해, 그리스적 요소가 중심에 놓여있고 대립과 긴장을 반복하긴 했으나 페르시아 문명과의 접촉, 동방 무역의 거점이라는 측면에서 지중해 전반에 걸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메로빙거 왕조의 몰락과 카롤링거 왕조의 주도권
그러나 이러한 구도는 7세기 이후 이슬람의 신속하고 전격적인 등장, 스페인과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정복 쟁의 성취로 결정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고대의 종말과 중세의 기원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쏟아온 앙리 페린이 집중하고 있는 대목이 바로 이 시기의 변화다. 서로마의 해체 과정에서 부상하는 메로빙거 왕조는 이슬람의 도전 앞에서 지중해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는 것을 경험하고, 유럽의 통일성을 확보하는 샤를마뉴의 카롤링거 왕조에게 그 주도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게르만은 로마 제국의 통치력에는 타격을 주었으나 로마 제국의 제도와 틀은 그대로 수용하고 계승하였으며 로마 제국이 유지하고 있던 지중해라는 세계사적 맥락에 결합되어 살아간다. 이는 게르만적 국가의 성립과 로마 제국의 세계사적 연결망이 서로 만나는 과정이자, 비잔틴적 요소의 공급이 여전히 지속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함께 지중해라는 교역망은 지중해 연안 지역의 주도권을 그대로 보존하게 하는 동시에 이 해역의 군사적 경계선을 지키는 것은 곧 로마 제국 이후의 유럽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 기반이었다. 그러나 이슬람의 확장과 정복 전쟁에 의한 지중해 주도권의 이동은 그와 같은 유럽의 정체성 형성과정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에 걸친 이슬람의 지배 체제는 서로마 지역이 비잔틴과 단절되는 것과 함께 봉쇄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로써 서로마 제국의 후계 체제는 그 자체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계에 직면한다. 따라서 지중해의 패권을 전제로 전개되었던 메로빙거 왕조는, 유럽 내륙 지대의 주도권을 쟁취한 샤를마뉴의 카롤링거 왕조에게 그 유산을 넘겨주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중해에 대한 지배 체제를 근간으로 한 고대 로마 문명의 자산을 더는 누리기 힘들게 되었다는 점에서 고대의 분명한 종식이자, 중세의 시작이 굳혀지게 된 것이다.
전환기, 그리고 유럽의 역사적 정체성의 출발
이는 비잔틴과 유리된 로마 교회 그리고 게르만적 요소가 봉건제라는 방식으로 성립되어간 체제의 출발이며, 과거와는 다른 요소의 우세함이 시대적 특징을 만들어가는 시기로의 진입이다. 앙리 피렌은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고 있다.
"고대 전통이 단절된 원인은 급작스럽고 예기치 않은 이슬람의 진출이었다. 이 진출의 결과는 동방과 서방의 최종적 분리였고, 지중해적 통일성의 종말이었다. 서방은 봉쇄되었고, 닫힌 세계에서 자체의 자원으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생활의 축이 지중해에서 북방의 게르만 지역으로 옮겨졌다. (…) 중세로 이행하는 기간은 650년부터 750년까지 꼬박 한 세기가 걸렸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전통이 사라지고 새로운 요소들이 우세해진 것은 바로 이런 혼란의 시기 동안이었다."
이것은 서기 800년 이 지역에 새로운 제국이 성립하면서 완결된다. 구제국은 콘스탄티노플에 잔류하고 있고, 동방의 문명사적 자산은 거기에 머문 채 서구 유럽과의 만남은 훗날을 기약하게 된다. 이것이 십자군과 르네상스요, 근대의 새로운 시작이다.
이렇게 보면 유럽의 중세는 이슬람에 의한 지중해의 봉쇄로부터 자구책을 찾는 과정에서 비롯되었으며, 근대는 그 봉쇄망을 대서양 쪽으로 뚫어내고 다시 동방과 만나면서 이루어진 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뿐만 아니라 자기 내부의 체제적 역량에만 의존했던 유럽이 이런 과정을 통해 지중해를 다시 접수하고 이슬람 제국에 반격을 가하면서 오늘의 유럽이 되었음도 알 수 있게 된다.
어떤 문명사를 만들어 갈 것인가?
그런 까닭에 마호메트와 샤를마뉴는 서로가 서로를 역사적으로 형성해온 상대이면서 그와 동시에 서로가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역사 공동체임도 주시하게 한다. 앙리 피렌은 유럽이 서구 중심주의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역사관을 깨고, 이슬람의 역사와 한 몸이 되어 형성되어온 서구의 고대와 중세사의 특징을 보도록 촉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역사관은 결국 멀리 내다보면, 서로가 삶의 영역을 공유해나가면서 나누어 갖는 문명사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깨우침을 준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서구는 결국 비잔틴과 이슬람의 자산에 마주하면서 새로운 활력을 갖게 되었으며, 자신을 보다 풍요하게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지중해 동부와 이슬람의 존재 없이 유럽의 미래는 또다시 닫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북아프리카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 매우 중요한 문명사적 파트너이다. 그와 같은 상대를 포격하고 파괴하는 것은 지중해의 주도권 쟁탈의 의미는 있을지 모르나 서로가 상호의존하고 공유하면서 만들어나갈 수 있는 미래의 인류적 문명을 빈곤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의 종말과, 어떤 시대의 시작이라는 전환기에 살고 있을까? 이미 타계한 줄로 알았던 서구 제국주의의 좀비적 존재 앞에 불타고 있는 리비아를 보면서, 우리는 로마 제국이 상실한 유산을 되찾겠다는 식의 십자군적 욕망과 반격의 역사를 봐야 하는지, 아니면 새로운 방식의 문명사적 공존을 모색하는 계기를 어떻게든 만들어야 하는지 갈림길에 있다.
카다피 체제의 현실에 대한 논란과 극복과는 별도로, 21세기의 전쟁은 이렇게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리비아에 이르기까지 서구가 이슬람의 운명을 공격하고 있다. 이슬람의 비극은 우리 모두의 비극이다. 지극히 소중한 인간의 생명과 이슬람 문명의 자산이 이렇게 살육당하고 파괴되도록 계속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은 새로운 중세의 시작이다. 암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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