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2월 24일
1월 19일 새벽 경찰의 학병동맹 습격 사건을 1월 18일자 일기에 적었고, 1월 27일에는 그 사건의 처리 과정을 서술했다. 1월 27일자 일기는 이 작업 시작한 후 가장 길게 쓴 것 같다. 1946년 초의 서울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에 최대한 명확하게 독자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장택상 경기도 경찰부장의 발표와 신문기자회 학병사건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발표를 실은 <조선일보> 1월 29일자 기사를 그 일기에 소개했다. 신문기자회가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린 것은 경찰의 발표에서 상식적으로 수긍되지 않는 점들을 추궁하기 위해서였으니, 특검 역할을 자임한 셈이다. 1월 28일 기자회의 발표는 신중하고 온건한 태도를 지키면서 경찰 발표의 문제점 몇 가지를 정확하게 지적했다. 이 문제점들이 몇 주일이 지나도록 방치되고 있었기 때문에 기자회는 2월 23일 추가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선신문기자회에서는 학병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사건 직후 진상 조사 발표가 있었는데, 금번 제2회로 사건의 진상을 조사 규명하여 23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조선신문기자회 조사 학병동맹검거사건이 있은 지 벌써 1개월이 지났고 그 사건으로 참사한 세 학병의 장의도 이미 치른 지 오래이나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서는 경찰부로부터 중간 보고식의 발표가 있었을 뿐, 아직 결론적인 발표가 없어 일반의 의혹과 여론을 풀지 못하고 있다.
본회에서는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사건 발생 직후부터 가장 공명정대한 입장에서 그 진상을 냉정하고도 철저히 구명하여 당국의 사건 해결에 협력하려고 노력하여 오던 터인 바, 지난번 장 경찰부장 발표(28일부)에 있어서 본회에서도 중간 보고를 공표하여 몇 가지 의문된 점을 지적하고 그 해명을 요망한 바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에 대한 만족할 만한 해답과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으므로 다음에 몇 가지 의혹되는 점과 본회에서 조사한 바를 대략 보고하기로 한다. 학병동맹을 검거하게 된 원인으로(略)
1) 학병이 참으로 서대문로상의 사건에 참가하였던가?
(가) 진술자 白宗先, 李昌雨, 朴泰潤은 현재 유치되어 있으므로 그들 3인을 그들과 함께 참가하였던 학병들과 기자단의 입회하에 대면시켜 확실한 증언을 잡을 것
(나) 학병 측에서는 전연 서대문로상의 사건을 모르고 그 시간에는 학병일의 행사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이것을 취사부가 증언하고 있다)(略)
(다) (略)동맹에서는 白宗先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고 朴, 李는 약 2월 전부터 소식을 모르는 터이었다고 한다.
(라) 白宗先이 납치한 여학생 7명의 성명과 재학 중의 교명 및 최초의 白宗先을 검거한 순경의 성명을 발표할 것
이상의 제점이 정확히 드러나면 서대문로상의 사건에 참가하였던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2) 학병이 과연 무기를 소지하였던가?
(가) 압수한 종류와 수량을 제시함과 동시에 부상당한 경관을 면회케 한 것을 전번의 중간 보고에서 요망한 바 있었으나 아직 없다.(이에 대하여 학병 측에서는 무기라고는 일본도 한 자루 이외에는 없었다고 한다)
이는
경무과장 담, (21일) "공식 발표는 아니다. 무기는 많지 않다."
종로서 수사주임 담, "현장에서는 일본도 한 자루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변소 속에서 부서진 권총 한 자루를 찾아냈을 뿐이다."
종로서 외무주임 담, "19일 아침 일본도 한 자루밖에 무기라고는 본 일이 없고 권총 한 자루가 있다는 말은 들었다.(略)"
취사부 담, "무기라고는 일본도 한 자루밖에는 본 일이 없다. 따라서 학병 측에서 먼저 발사한 일은 없다."
현장에 있던 경관 담, "우리 편의 부상자는 일본도에 코를 베인 사람이 한 사람 있다."
3) 경관대에서 미리 통고를 하였다고 하면 어떠한 형식으로 통고하였는가? (略) 趙炳玉 경무국장은 22일 기자단의 왜 미리 통고를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증거품 인멸, 기타의 염려가 있어서" 하고 말한 일이 있다.
이상의 제 문제는 본 사건을 해결하는 중요한 관건이거니와 다시 한 걸음 나아가 사건의 전체를 놓고 볼 때
1) 과연 경무당국은
(가) 치안을 위하여 신중을 기했던가?(주로 야반에 부근주민에게 끼친 영향)
(나) 학병이라는 젊은 청년학도를 지도하려는 사랑과 위엄을 가졌던가? (略)
(다) 반탁시위 학생군이 허가도 없이 시위를 하고 제1차로 인민보사와 제2차로 인민당, 제3차로 서울시인민위원회를 파괴하고 다닐 때는 一指도 대지 못하고 다시 안국정으로부터 시위를 계속하여 죽첨정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아무런 제지도 내리지 않았던 것과(이상은 모두 그 즉시로 MP와 경찰에 보고하였으므로 그 때 이를 제지 해산 혹은 처리하였더라면 학병참사사건에까지는 발전되지 않았을 것이다) 불과 3명의 청년을 노상에서 검거하여 취조해 보고 그들의 진술을 그대로 속단하고 400여 명의 경관대를 비상 동원하였다는 것을 비교 생각할 때 경찰의 태도가 과연 민주주의적이요 신중하고 공명정대하다고 볼 수 있을까?
(라) 학병동맹을 검거하려거든 400여 명을 동원하여 포위하기 전에 한두 사람이라도 미리 본부에 보내어 책임자를 당국으로 불러다 취조해 볼 수 없었을까? (그렇다면 사건은 이렇게 확대되지 않고 온건하게 처리되었을 것이다)
2) 경찰당국은 학병을 어떻게 보았던가?
(가) 동맹본부를 총격하러 갈 때 경관대에게 각각 15발씩의 탄환을 나누어 주어 결사적 전투를 의미하는 훈시를 하였다고 한다. (학병사건조사위원회 조사 MP의 말에 의한 것)
(나) 참사한 朴晉東 金星翼 金命根 3학병은 총에 맞아 넘어진 것을 그 위에 다시 달려들어 칼로 찌르고 총자루로 때렸다는 것 (검시의 결과와 목격자의 입증으로 알 수 있다)
(다) 학병 측에서 경관대라면 말로 해도 해결할 수 있으니 사격을 중지하라고 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최후로 결사적 돌격대 종로서원들을 출동시켰다는 것(3학병은 이 때 참사하였다) (略)
대략 이상의 보고를 발표함으로써 본회는 현명한 동포대중의 엄정한 비판과 당국의 공정한 처리를 기다려 마지않는다.
1946년 2월 23일 조선신문기자회 학병사건진상조사위원회 (<중앙신문> 1946년 02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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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8일의 1차 발표에서 제기한 문제점에 더 추가된 것은 별로 없다. 다만 논조가 바뀌었다. 1차 발표에서는 경찰 발표를 존중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모순되는 문제점들을 단편적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이번 발표에서는 경찰 수뇌부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학병동맹을 탄압하고 그 실상을 은폐한다는 혐의를 명확히 밝힌 것이다.
1945년 23일 전조선신문기자대회의 선언문에 당시 언론계의 분위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신문이 흔히 불편부당을 말하나 이것은 흑백을 흑백으로써 가리어 추호도 왜곡치 않는 것만이 진정한 불편부당인 것을 확신한다. 엄정중립이라는 기회주의적 이념이 적어도 이러한 전민족적 격동기에 있어서 존재할 수 없음을 우리는 확인한다. 우리는 용감한 전투적 언론진을 구축하기에 분투함을 선언한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 158쪽에서 재인용)
강준만은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이 선언문이 말해 주듯이 언론 분야에서도 중간파가 설 땅은 없었다"며 "중간파가 기회주의자로 몰린 해방 정국의 상황"을 한탄했다. 중도파가 역할을 제대로 맡지 못한 상황을 나도 안타깝게 여기지만, 신문이 '정론지(政論紙)'를 추구하는 자세 자체를 "중립 배격"으로 규정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중립도 하나의 정론 아닌가.
언론의 기능은 사회의 수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일본인의 통치가 갑자기 중단된 시점의 한국 사회에는 '정치'와 '조직'의 인프라에 대한 절대적 수요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언론이 정보 제공이나 엔터테인먼트 기능에 그친다는 것은 가능한 일도 아니고 바람직한 일도 아니었다. 위 인용문에서 "이러한 전 민족적 격동기"라 한 것은 명확한 상황 인식을 보여주는 말이다.
"엄정 중립이라는 기회주의적 이념"이라는 말에도 생각할 점이 있다. 서양의 주요 언론이 선거에 임해 특정 후보나 정당의 지지를 밝히는 관행을 보며 우리 언론계의 '기계적 중립'이 위선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치적 입장을 당당히 밝히면서 보도와 입론의 원칙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자기 입장을 감추는 것보다 언론의 중립 원칙을 더 잘 지키는 길이라는 견해를 나는 지지한다.
당시 언론의 실상을 더 세밀히 살펴보는 것이 <해방일기> 작업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적당한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되, 1946년 초의 상황에서는 일단 높이 평가할 측면이 두드러지게 느껴진다. 학병 사건 진상 조사도 그렇고, 2월 18일자에서 소개한 13개 언론사의 31절 행사 통합 요구도 사회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대변한 것으로 보인다. '보도 거부'를 무기로 꺼낸 것이 언론의 사명에 비추어 온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 명분은 정당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익을 압박하는 이 요구에 노골적으로 우익을 비호해 온 <동아일보>조차 동참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기자회의 압박에 몰린 장택상은 2월 26일 이 사건을 검사국으로 송국하면서 최종 발표를 내보냈다. <동아일보>는 이 발표문을 3월 5일자에야 게재하면서 "그동안 지면 관계로 이제 계시하는 바"라고 설명했다. 사실에 있어서는 이 발표가 1월 28일의 중간발표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없고 기자회의 지적 사항에 대해서도 제대로 응대하지 않은 무성의한 것이어서 신문들이 게재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러치 군정장관이 경찰에 대한 신뢰를 밝히는 성명서를 2월 25일에 발표한 사실이다. 러치는 사건의 조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월 23일 발표한 성명에서는 경찰에 대한 신뢰를 표명하지 않았고, 그 이튿날에는 검사국이 조사에 나서게 했다. 경찰에 대한 불신임을 밝힌 셈이다. 그런데 그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경찰 최종 발표를 앞두고 경찰에 대한 포괄적 신뢰를 밝힌 것이다.
"나는 조선 경찰을 너무 칭찬하였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직무를 훌륭히 이행한다면 나는 칭찬 아니 할 수 없다. 그동안 4개월간에 세계에 손색없는 경찰로 발전시킨 경찰들은 총검을 불고하고 범죄 수사에 직면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활동한 까닭이다. 이미 수주일 내에 조선 경찰력은 그 존재가 엄연히 나타났다. 순직한 경찰의 유가족에게 동정을 금치 못한다. 하지 중장과 나는 일신의 명예만을 생각하는 욕망을 가지고 그로 인하여 우리를 곤란케 하는 소수 정치가로 머리를 앓고 있다. 그러나 현재 남조선을 통하여 정예한 훈련을 받은 1만8000명의 경찰이 조선을 위하여 정치에는 간섭치 않고 있다는 것을 볼 때 참으로 기꺼운 바이다.(略)
범죄 또는 무질서한 행위는 지나간 몇 주일을 보면 놀랄만하게 감소되었으나 아직도 경찰에 잡히지 아니한 자가 약간 있다. 또 무기를 가진 폭력단이 있으나 그들은 곧 체포될 것으로 믿는다. 경찰관 혹은 관리를 협박한 자도 약간 있었다. 현재는 해산되었으나 전 광복군, 국군준비대의 일부 사람들은 법령이 그들 때문에 공포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최근 서울에서 수 명의 아편 밀매자가 경찰의 경계망에 체포되었다. 범인들은 범죄는 아무 이익이 없다는 것을 벌써 알고 있다. 경찰은 그들의 범죄 체포 기록을 자랑하고 또 자랑할 권리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성적을 계속하여 간다면 나는 그들을 자랑하여 마지않을 것이다." (<조선일보> 1946년 02월 26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신의 명예만을 생각하는 욕망을 가지고 그로 인하여 우리를 곤란케 하는 소수 정치가"란 누구를 가리킨 것일까? 왜 그런 정치가 이야기가 경찰 칭찬하는 중에 나온 걸까? 한 달 전에 경찰 발표를 믿지 못해 검사국에 수사를 지시했던 러치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경찰의 최종 발표를 앞두고 경찰이 "정치에는 간섭치 않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강조할 수 있었을까? 1월 24일 수사 지시를 받은 검사국은 그 동안 뭘 하고 있었을까?
러치는 머리를 앓고 있다고 했다. 하지와 함께. 머리를 앓게 만드는 것은 소수 정치가라고 했다. 경찰의 문제점은 그 소수 정치가의 문제점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고, 그 소수 정치가의 문제점을 억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하지와 함께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2월 26일 장택상의 발표문도 밑에 붙여놓을까 잠깐 생각했다. 그러나 1월 28일 발표문에 보탠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것을 또 붙여놓으면 이 일기가 쓰레기통이 될 것 같아서 붙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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