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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미로'·'헤맴의 미학'…한국 문학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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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미로'·'헤맴의 미학'…한국 문학의 축복?

[프레시안 books] 최제훈의 <일곱 개의 고양이 눈>

폐쇄된 미로에 갇힌 사람은,
얼마나 헤매어야 그 미로가 폐쇄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될까? (179쪽)


네 개의 중편으로 이루어진 최제훈의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의 말미에 실린 평론가 정여울의 해설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스포일러 없는 비평이 가능할까?" 나는 오히려 이렇게 묻고 싶다. "이 소설에 대해 스포일러가 가능할까?" 말하자면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소설 <모렐의 발명>과 그것에 영감을 받은 알랭 레네의 영화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 사이의 차이.

전자가 미로(혹은 림보)에 빠진 주인공을 그리는 전통적인 서사라면 후자는 그 자체로 보는(읽는) 이를 어지럽게 만드는 하나의 미로다. 위의 인용문에서 엿볼 수 있듯이, 최제훈이 의도한 것은 독자를 헤매게 만드는 미로이고, 네 개의 미로가 복잡하게 얽히며 만들어가는 미로이며, 출구 없이 폐쇄된 미로다.

그렇다면 질문. 미로에 대한 스포일러는 가능할까? 이를테면 왼쪽, 왼쪽 다음에 오른쪽 다시 왼쪽, 하는 식으로. 유용한 방법은 아니다. 혹은 아리아드네의 실. 하지만 당신이 직접 미로로 뛰어 들기 전까지 실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미로에서는, 그 실 역시 당신을 얽어매는 또 하나의 장애에 지나지 않는다. 목줄이 묶인 채 빙글빙글 돌던 개가 결국 자기 자신을 옭아매는 것처럼.

그러니 기쁜 소식은 이 글은 결코 스포일러가 될 수 없을 거란 사실이다. 나쁜 소식은 별 도움 또한 되진 않으리란 것. 하지만 그것이 꼭 이 글만의 악덕은 아닐 것이다.

*

자, 이야기를 계속해봐. 잠이 들지 않도록. 이젠 지쳤어. 모르겠어.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도. 이렇게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하면서 버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미…… 글쎄, 최소한 지루하다는 느낌은 가질 수 있잖아. 그리고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니야. 매번 변하고 있어. 조금씩, 조금씩, 쌓여가면서. (11쪽)

▲ <일곱 개의 고양이 눈>(최제훈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낯선 화자의 목소리로 시작하는 '여섯 번째 꿈'은 그러나 낯익은 무대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눈 내리는 겨울, 외딴 산장에 여섯 명의 남녀가 모인다. 법대생, 무명 여배우, 가정주부, 피시방 주인, 레지던트, 스페인어 번역가. 도무지 공통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이들은 연쇄살인범을 다루는 웹사이트 '실버해머'의 회원들.

그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사이트 운영자인 악마의 초대장이다. 너무 직설적이라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아이디와 달리 초대장의 내용은 정중하고 친절하다.

"이번 주말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회원 몇 분만 제 별장에 초대하여 친목을 다지는 시간을 마련할까 합니다. 홈페이지에 차마 올리지 못한 희귀 자료도 공개하고, 재미있는 게임도 준비되어 있으니 꼭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술과 음식은 넉넉히 대접할 테니 몸만 오시면 됩니다. 약도 첨부합니다. 악마." (35쪽)

과연 장식장에는 각종 위스키와 브랜디가 가득하고,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악마를 기다리던 이들은 어색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술을 꺼낸다. 잭 다니엘스 블랙, 카뮈 VSOP, 맥켈란 18년산과 조니워커 블루라벨, 거기에 레미 마틴 루이 13세와 리처드 헤네시까지. 약속과 달리 넉넉한 음식은 보이지 않지만 저마다 풀어놓는 이야기를 안주삼아 술잔을 들이킨다.

그것은 물론 그들의 유일한 공통 관심사, 바로 살인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잭 더 리퍼, 존 웨인 게이시, 해럴드 시프먼, 에드워드 게인, 에드먼드 켐퍼, 테드 번디…. 위스키의 브랜드와 살인자의 이름을 함께 늘어놓는 최제훈의 방식. 말하자면 그들은 잭 더 리퍼를 안주로 잭 다니엘스를 마시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연쇄살인범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어. 모두들 무엇엔가 마음을 빼앗기고 싶어 하잖아. 그래야 자기 마음을 물끄러미 오래 들여다볼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남는 건 단순한 취향의 문제 아닐까? 배스킨라빈스 매장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것처럼. (20쪽)

각종 기록과 멋진 플레이를 제시하며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가 최고라고 우기는 야구광처럼,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자기가 좋아하는 살인마가 최고라고 열을 올리던 이들은 여섯 개의 방으로 흩어진다. 아직 오지 않은 악마를 기다리며 잠이 든다. 밤새 내린 눈이 산장을 외딴 섬처럼 고립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그들 중 누군가는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더더욱 알지 못한 채. 그들은 다만, 아침과 함께 맞이한 한 구의 시체 앞에서, 뒤늦게 예감할 뿐이다. 그것이 산장에서 마주하게 될 마지막 시체는 아닐 것임을, 악마가 말했던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제 낯익은 무대만큼이나 익숙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폐쇄된 공간에서 서로 의심하는 사람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 부실한 대책과 불가피한 죽음. 최후가 다가왔다고 느끼는 순간 밝혀지는 비밀 혹은 게임의 규칙. (그것은 진실일까?) 그리고 꿈. 환상과 현실의 경계 자체를 무화시키는 꿈, 꿈, 꿈, 꿈들. 덧붙여 초대장에 적힌 악마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의외의 깨달음. (사람들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공통분모를 알아내기 위해 서로의 신상을 공유하며 친목을 다지고, 홈페이지에 차마 공개하지 못한 희귀 자료를 직접 목격하며, 목숨을 건 게임을 하고, 술을 마신다. 한니발 렉터도 즐겨 먹었던 그 '음식'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의 차지다.) 하지만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질문. 당신에게는 물을 권리가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에 대해서, 책의 뒤표지에 당당하게 적혀 있는 추천사에 대해서. 그러니까 미로는 어디 있냐고. 눈을 감고도 더듬어갈 수 있는, 수백 번은 반복되어온 장르의 클리셰를 다시 한 번 반복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냐고.

대답은 이렇다. 이제 우리는 미로의 입구에 들어선 것뿐이라고. 앞으로 이어질 미로들에서 끊임없이 변주될 인물들과 사건들(꿈, 환상, 죽음 그리고 고립)을 간략하게 보여주는 약도일 뿐이라고. 악마가 회원들에게 보낸 초대장에 첨부되어있다던 그 약도처럼. 혹은 이렇게 말할 수는 없을까? 잠들지 않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는 화자의 입을 빌려 작가는 이미 소설의 초입부터 이렇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리고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니야. 매번 변하고 있어. 조금씩, 조금씩, 쌓여가면서. (11쪽)

그러니까 관건은 반복이 아니라 반복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쌓여가는 변화, 변주다. '복수의 공식'(첫 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스페인어 번역가가 번역했던 아르헨티나 소설의 제목)은 바로 이런 변주를 통해 독자를 본격적인 미로로 끌어들인다. 다섯 명의 인물이 돌아가며 등장하는 짧은 장들로 묶인 두 번째 중편은, '여섯 번째 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전사(前史)인 동시에 후일담이고, 그것과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이며 앞선 이야기를 무화시키는 이야기이다. 각각의 장은 마주보는 거울처럼 서로를 참조하지만, 그 속의 인물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시간은 끊임없이 모습과 위치를 바꾸며 그들을 하나의 인물로, 인과로 포착하려는 독자의 시도를 종내 비웃는다.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기표들처럼, 인물과 사건은 하나의 본질로 고정되지 않은 채 유동성과 불확정성 위에서 유희하는 것이다.

먼저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의 앞에는 복수의 상대가 전신이 마비된 채, 그러나 정신만은 또렷한 상태로 누워있다. 남자는 재킷에 뭉크의 '죽음과 소녀'가 인쇄되어 있는 슈베르트의 동명의 현악사중주 CD를 배경 음악 삼아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왼쪽 팔뚝에 새겨진 흉터의 내력을. 태어날 때부터 앓았던 간질, 잦은 발작으로 쌍둥이 여동생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야 했던 어린 시절, 자연스레 찾아온 죽음에 대한 강박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의대에 들어간 일, '여섯 번째 꿈'이란 영화의 오디션에 응시하기 위해 대본을 연습하던 여동생에 대한 추억, 그리고 찾아온 비극. 집안에 침입해 동생을 강간한 낯선 남자와 그 순간 찾아온 발작. 그리고 여동생의 자살. 남자는 여동생의 유골로 팔뚝을 그으며 복수를 다짐한다. 남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진실. 그게 뭘 바꿀 수 있는데? 진실이 쓸모없다는 건 아니야. 그저 박물관에 걸린 명화 같다고 할까. (…) 어차피 박물관을 나오는 순간부터 다시 때가 타기 시작하지. 그러나 흉터는 달라. 오롯이 나만의 것이지. 내 몸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상처를 잊지 말라고 속삭여주잖아." (83쪽)

다소 뜬금없이 들리는 남자의 말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세 번째 장에서다. 배우 지망생인 여자는 낯선 남자와 함께 모텔에서 눈을 뜬다. 클럽에서 만나 함께 밤을 보낸 남자라지만, 여자에겐 기억이 없다. 왼쪽 팔뚝에 스키장에서 얻었다는 흉터를 가진 남자는 자기가 킬러라고 한다. 아무 감정 없는 상대를 대신 죽여야 하는, 일종의 노동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대상 각각에게 어울리는 사연을 붙이고 살인의 순간에 그 사연을 읊어주는 킬러.

뭉크의 '죽음과 소녀'가 걸려 있는 샛강모텔 314호에서, 그런 남자에게 여자는 즉석 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간질을 앓는 쌍둥이 남동생의 이야기를. 도둑의 침입과 포박된 상태에서 동생이 일으킨 발작, 결국 토사물에 기도가 막힌 동생의 죽음을.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남자는 말한다.

"좋아. 다음번 작업 때 써먹어야겠어."
"페이소슨가 토마토소슨가 부족하다며?"
"어차피 각색을 할 거야. 주인공도 남자로 바꿔야 하고." (136쪽)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작가의 반문. "진실. 그게 뭘 바꿀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흉터다. 악착같이 달라붙어 끊임없이 속삭이는 흉터. 때론 쌍둥이의 모습을, 때론 나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흉터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처음과 끝이 맞닿은 소설 속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며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다. '복수(復讐)의 공식'은 '복수(複數)의 공식'이 되는 것이다. 반복할수록 더욱 복잡해지는 그런 공식이.

그리하여 세 번째 소설, '파이(π)'에서 복잡함은 최고조에 달한다. 에셔의 '서로 그리는 두 개의 손'을 닮은 이야기는 M에 대한 소설을 쓰는 '나'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나'에 대한 소설을 쓰는 M의 이야기이고, 바에서 만난 M을 따라온 한 여인의 이야기이며 또한 그 여인이 매일 밤 M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속 하루라는 인물의 이야기이다.

어디 그뿐인가. 산장에 갇힌 '실버해머' 회원들의 이야기는(일본어 번역가이기도 한 M은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을 번역했고 지금은 '여섯 번째 꿈'이라는 소설을 번역 중이다) 종종 이야기를 침범하며 죽음에 대한 불안을 환기시키고, 그밖에도 앞서 나왔던 많은 모티프들은 (나비, 쌍둥이 남매, 발작, 흉터, 죽음, '죽음과 소녀', 샛강모텔 314호 등등) 끊임없이 변주된다.

더 이상 이 소설을 요약하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지금까지 시도한 요약 또한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간단없이 밀려오는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무너지고, 소설 안과 소설 밖의 경계 또한 무너진다. 이제 남은 것은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뿐이다. 그리고 거기엔 어떤 출구도 없다.

"완성되는 순간 사라지고, 사라지는 순간 다시 시작되는 영원한 이야기. 무한대로 뻗어나가지만 결코 반복되지 않는 파이처럼." 그녀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게 바로 당신이 갈망하는 단 한 편의 완벽한 미스터리 소설 아니었어?" (282쪽)

*

아직 한 가지의 질문이 남아있다. 복잡한 미로는 좋은 소설인가? 이 글을 쓰면서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의문. (뒤표지에 적힌 "벼락처럼 찾아온 한국 문학의 축복", "한국 소설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던 낯설고 진귀한 물건" 같은 추천사의 진위 여부에, 벼락이 치면 따라오는 천둥처럼 주목받는 신인의 작품에 으레 따라붙기 마련인 형식적인 찬사들에 나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글쎄, 이렇게 생각해보자. 미로가 좋은 소설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좋은 소설이 된 미로들을 알고 있다. (이 자리에서 카프카나 보르헤스 이야기를 꺼내는 건 적절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

둘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단일한 주체와 서사의 붕괴. 사라진 진실과 그 자리를 차지하는 환상. 고정된 의미에 안착하지 않는, 추론이 불가능한 사건. 그 안에서도 끊임없이 글을 써야하는, 그리하여 쓰인 결과물 안에서 스스로 길을 잃어야 하는 작가의 운명. (두 작품의 중심에 소설가가 자리한다는 사실, 종종 그들이 쓰는 인물과 그 자신 사이의 경계가 무너진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결국 미로.

둘 사이의 차이는? 폴 오스터는 미로 속에서 탈출구를 찾아 헤매는 인물을 통해 포스트모던의 서사를, 서사의 불가능성에 대한 서사를 다소 애통하게 그려낸다. 이때 그가 만든 미로는 인물이 처한 곤경을 인물과의 동일시, 혹은 관음증적 시선으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라는 행위 자체로 함께 경험하도록 하는 공감의 양식이 된다. 등장인물과 우리가 함께 겪고 있는 곤경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반면 최제훈의 미로는 유희의 장, 인물과 서사가 미끄러지고 변주되며 한바탕 난장이다. 겨울이면 펼쳐지는 시청 앞 아이스링크의 풍경이 그러하듯이. 최제훈에게 곤경은 이미 곤경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기정사실, 인간의 조건이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로라는 건 모순된 공간이죠. 탈출하기 위한 곳이면서 동시에 헤매기 위한 곳인데, 그 두 가지가 합해져야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도 미로와 같지 않을까요."

(불가능한) 탈출에 대한 강박에 빠져 좌절하는 우리들에게 최제훈은 헤맴의 미학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동시에 익숙한) 윤리학이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나는 아직 하나의 질문에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 글에서 어떤 결론도 내릴 생각이 없다.

폐쇄된 미로에 갇힌 사람은,
얼마나 헤매어야 그 미로가 폐쇄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될까?
그걸,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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