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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몰카' '노무현 굴욕'…이 책은 '선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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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건희 몰카' '노무현 굴욕'…이 책은 '선구자'다!

[장정일의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

변호사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가 나온 게 작년 2월이었으니, 어느덧 이 책이 나온 지 1년이 되어 간다. 책이 나왔을 때, '나도 이 책을 읽었다'는 알리바이에 해당하는 짧은 독후감을 내 독서 일기에 쓴 바도 있지만, 다시 이 책을 펼쳐 놓고 새로운 독후감을 작성하자니, 갑자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글 한 편이 생각난다.

흔히 선구자라면 후세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라고 정의된다. 그런데 보르헤스는 '카프카와 그의 선구자들'(<만리장성과 책들>(열린책들 펴냄), 193~198쪽)이라는 에세이를 통해, 진정한 선구자란 후세(미래)만 아니라, 잊혀진 과거에까지 빛을 던져주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자면, 카프카는 자신의 그로테스크한 작품으로 '카프카레스크'의 기원이 된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가 모르고 지나쳤던 그와 유사했던 작가들과 작품들을 재발굴하게 되는 것이다.

보르헤스에 따르면 카프카가 아니었다면, 레옹 블루아의 <불쾌한 이야기>나 던세이니의 <카르카손> 같은 작품은 영영 조명을 받지 못했거나 비교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문학사 저편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바로 그런 뜻에서 선구자란 후세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일 뿐 아니라, 과거를 다시 구성하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다시 읽는다면서 꺼낸 서두로는 좀 뜬금없이 들리겠지만, 사정이 짐작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 <삼성을 생각한다>(김용철 지음, 사회평론 펴냄). ⓒ사회평론

본래 <삼성을 생각한다>는 내용과 목표가 분명한 책이다. 지은이 김용철은 전(前) 서울지검 특수부 수석검사로 있다가 사표를 냈던 1997년 삼성에 입사했다. 입사 직후 삼성의 지휘부라고 할 수 있는 구조조정본부(비서실)의 법률팀과 재무팀의 이사로 일했던 그는 7년 만인 2004년 사표를 냈고, 2007년 10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지원을 얻어 양심선언을 했다. 그때 발표된 양심선언문을 통해 지은이는 삼성의 광범위한 법조계 불법 로비와 불법 비자금 조성 그리고 삼성의 경영권을 이재용에게 세습시키고자 동원했던 불법과 편법을 조사하라고 촉구했다.

이듬해 벽두에 구성된 특별검사팀은 수사 의지가 미심쩍었던 변호사 조준웅이 떠맡아 그야말로 유야무야 수사를 한 끝에, 부실하고 축소된 공소장으로 삼성을 기소했다. 이후 벌어진 1심에서 노골적인 봐주기로 논란을 빚었던 부장판사 민병훈은 삼성에 무죄를 선고했고, 삼성의 관리를 받은 게 의심되므로 제척(除斥)되었어야 할 부장판사 서기석 역시 2심에서 삼성에 무죄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고(故) 노무현의 영결식이 치러진 당일이었던 2009년 5월 29일, 대법관 양승태·김지형·박일환·차한성·양창수·신영철이 찬성 의견을 내고, 김영란·박시환·이홍훈·김능환·전수안이 반대 의견을 냄으로서 삼성은 6:5로 힘겨운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저 판결에서 재미있는 것은, 무죄 의견을 냈던 신영철의 처신이다. 그는 저 당시 촛불 집회 관련 사건 담당 판사에게 이메일과 전화로 압력을 넣은 불법과 사건 배당을 임의로 해놓고서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했다고 국회에서 위증한 게 드러나 법원 내외로부터 사퇴 압력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신영철은 후배 판사로부터 수모에 가까운 비판을 받으면서도 끝내 대법관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하지 않고 고작 공직자의 재산 등록에 관한 사항이나 처리하는 공직자윤리위원회에 넘겨 구해 준 사람이 바로 대법원장 이용훈이었다.

이용훈은 법원에서 퇴직해 변호사로 일하던 시절 삼성에버랜드 사건을 맡아서 삼성을 변호했었다. 하여 그는 대법원장이면서 이례적으로 전원합의체에서 빠지는 최초의 사례를 남기게 됐다. 그러는 동시에 삼성에버랜드 사건을 맡아 막대한 수임료를 받았던 전력 때문만이 아니라, 과거에 주장했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삼성에 유리한 판결을 끌어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하므로 대법원에서 종결된 삼성의 무죄 판결에 그가 미쳤을 영향은 쉽사리 판단하기 힘들다.

최초의 양심선언문에 언급되어 있었듯이, 세상에 알려진 삼성 비리는 크게 세 가지 범주다. ①첫째, 정·관·법조계 등에 대한 불법 비리 ②비자금 조성 및 탈세. ③경영권 불법 승계.

이 책은 위의 사항 가운데 주로 법조계에 대한 뇌물 비리와 구조조정본부에 의한 비자금 조성 실태 그리고 경영권 불법 승계 내막을 밝히고 있으며, 잠시 요약했던 것처럼 삼성 특검과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짚고 있다. 이상이 이 책의 내용이었다면, 이처럼 명료한 내용에 어울리는, 이 책의 집필 목적 또한 매우 분명하다.

아이들에게 "정직하게 살라"고 권해도 불안하지 않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정직하게 살면 손해 본다"는 생각이 현명한 것으로 통하고 "손해 보더라도 정직해야 한다"는 생각은 순진한 어리석음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운 아이들이 커가는 일을 차마 지켜볼 자신이 없다. (…) 나는 삼성 재판을 본 아이들이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는 생각을 하게 될까봐 두렵다. 그래서 이 책을 썼다. (447~448쪽)

새삼 강조컨대, 본래 <삼성을 생각한다>는 내용과 목표가 이처럼 분명한 책이다. 그러나 세간의 관심은 이건희의 은닉되었던 신상과 소위 '로열패밀리'들이 벌이는 낯선 일화들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간 한국인들은 여러 형식의 '몰래 카메라'를 통해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주로 관음해 왔는데, 재미로 치면 이번 게 최고였다.

이미 이 책이 10만 부 넘게 팔려 나갔기 때문에, 이건희의 생일잔치에 그의 직계 가족은 프랑스에서 막 공수된 푸아그라를 먹고 손님들에겐 냉장 푸아그라를 먹인다는 삼성가의 고약한 손님 접대는 널리 알려졌다. 게다가 공식 행사를 빙자한 약 10여억 원 상당의 생일잔치 비용이 회장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삼성의 회사 금고에서 나온다는 사실도.

또 자신의 전용기를 안전 운항하기 위해 대한항공에서 다섯 명의 베테랑 조종사를 스카우트해 놓고 2명으로 구성된 2개 조를 구성한 다음 한 명은 여분 인력으로 대기 시켜 놓았다는 얘기하며, 온 가족이 명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데다가 이건희가 명품을 만들겠다고 손 댄 사업마다 족족 망해 먹었다, 등등……. 참 낯설었던 한 재벌 총수의 사생활과 언행 가운데, 내 눈을 확 잡아끈 것은 이런 거였다.

이건희가 사장단 회의를 할 때마다 특히 관심을 보였던 것은 부동산과 섭외였다. 영향 력 있는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는 일을 섭외라고 불렀다. (255쪽)

섭외, 즉 뇌물을 통한 불법 로비에 대해 이건희가 가진 관심은 대단했다. 그는 평소 "작은 돈으로 큰 결과가 오게 하는 것"이 로비라고 말했다. 로비에 관한 세부적인 사항까지 지시하곤 했다. 그는 종종 로비 대상자에게 '감동 서비스'를 하도록 주문했다. 결혼기념일, 아이들 생일 등을 꼼꼼하게 챙기고 '꽃다발과 와인'을 집에 보내서 '감동'을 주라는 것이 다. (256쪽)

회장님은 돈 주는 걸 좋아하신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받는 사람에게 '감동'을 함께 전달할 수 있는지를 늘 골몰 하신다. 아깝다. '되돌아올 더 큰 대가(代價)'만 계산하지 않았다면, 이건희는 '포틀래치의 제왕'이 되고도 남았을 사람이다.

<삼성을 생각한다>란 책 전체 속에서 저 두 인용은 매우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위의 두 인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온갖 '비리 백화점'이라는 '삼성 문제'와 지은이에 의해 촉발된 '삼성 재판' 역시 '섭외(뇌물)'가 핵심이라고 본다.

예컨대 삼성의 '무노조 경영' 같은 문제가 그렇다. 무노조 경영을 유지하기 위해 관계 부처와 협조처에 뇌물을 쓰지 않았다면, 대명천지에 그게 어떻게 계속 가능했겠는가? 이 책이 출간된 직후부터 지금까지, 김용철을 욕하는 보수 언론과 그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김용철이 삼성을 죽이려고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이 책이 가리키는 문제의식과 아무 상관없다.

지은이는 이 책을 통해 삼성의 잘못된 뇌물 공여와 그것을 받아 삼키는 온갖 비리 인물들 가운데, 특히 법조인들의 부패를 고발하고자 했다. 무차별적이고 전방위적인 삼성의 뇌물 공세는 대한민국을 속속들이 병들게 한다는 게 이 책의 요점이다. 뇌물은 한 나라의 도덕적 중추인 법조계와 언론계를 부패 시키고, 정치권과 행정부를 움직여 한 나라의 경제 정책을 자신의 입맛에 따라 고치고, 경쟁자들과의 공정한 경쟁을 피함으로써 시장 질서를 어지럽힌다.

모든 일에는 뿌리가 있기 마련이다. 삼성 비리의 뿌리는 비자금이다. 비자금이 없었다면, 삼성이 권력을 매수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비자금은 결국 삼성 임직원들이 흘린 땀의 대가를 빼돌린 것이다. 여기에 더해 삼성은 생산 현장에서 흘린 땀의 대가를 빼돌려 정치인과 관료, 법관, 언론인, 학자를 매수했다. 자신의 노동으로 벽돌 한 장 생산한 것 없고, 백 원짜리 하나 벌어본 적 없는 자들이 자자손손 왕처럼 군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저지른 비리였다. (346쪽)

양심선언이 모태가 되었던 이 책은 삼성과 법조계의 뇌물 사슬을 시작으로, 삼성과 여타 권력 간의 다종다양한 뇌물 사슬을 끊어야 한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대한민국 법조계가 선택한 것은, 스스로에게 '법치의 죽음'을 선언하는 거였다. 다시 말해 이 책은, 현실에서는 패배했다. 하지만 이 책은, 멀리로는 비자금으로 한데 엮인 정경유착의 역사를 돌이켜 보도록 하며, 가까이는 노무현 정권과 삼성의 밀착을 문제 삼게 한다.

이 책에도 잠시 언급되어 있듯이 "삼성은 비자금 없이 지낸 적이 없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부터 정관계에 돈을 뿌려왔던 게 삼성"(345쪽)이다. 그런데 이재용 자신의 입으로 "비자금이나 차명계좌는 모든 기업이 공공연하게 갖고 있는 것인데, 왜 삼성만 문제 삼는 것인지 이유를 모르겠다"(253쪽)고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 재벌(기업)의 역사에서 비자금과 정경유착은 면면히 이어져 온 악습이기도 하다. 그런 뜻에서 <삼성을 생각한다>는 대한민국 우익들이 은폐해 온 '재벌 신화'의 기원을 조명하도록 촉구한다.

실제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예전에 읽은 박태균의 <원형과 변용 : 한국 경제 개발 계획의 기원>(서울대학교출판부 펴냄)과 이병천이 엮은 <개발독재와 박정희 시대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창비 펴냄)을 다시 꺼냈다. 두 책의 필자들은 이념적으로 좌파에 속하는 학자들이다. 그런데 밑줄을 가득 쳐놓은 두 권의 책을 훑어보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이 두 책의 기본적 연구 시각은 정권 담당자(권력자)들의 관점에서, 정권이 재벌을 '드라이브'한 역사를 기술한다. 그래서 정경유착이 암시될 때에도 능동적인 것은 권력이요, 재벌은 수동적으로 묘사된다. 시쳇말로 '힘 있는 놈이 내놓으라니까, 장사치들이 꼼짝없이 내놓았다'는 식이다. 이런 일방적 시각으로는 재벌 쪽의 능동적인 '비자금(뇌물) 운용'에 대해서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거나 드러나더라도 면죄부를 주게 된다.

앞에 거론한 두 권의 책이 그랬듯이, 정경유착에 관한 일반적인 상식은 권력이 재벌에게 '삥'을 듣는 거였다. 하지만 <삼성을 생각한다>는 그런 일반의 상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즉 권력이 주범이고 재벌이 종범인 게 아니라, 그 반대가 진실일 수도 있다는 사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나라 정경유착의 역사를 새로 쓰고, 과거를 다시 구성하라는 임무를 준다.

주범과 종범이 뒤바뀔 수도 있다는 정경유착에 관한 새로운 관점은, 삼성과 노무현 정권과의 의심쩍은 밀월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이 책이 많은 사례를 제공하고 있다. 이미 황광우에 의해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이 책에 나오는 허다한 단서들은 노무현 정권이 삼성과 유착 관계에 있었거나 최소한 삼성에 포획되어 있었던 사실을 알려 준다.

안기부 'X파일'이 논란이 될 때는 안기부의 후신인 국가정보원에서 국내 정보를 총괄하는 자리에 아예 삼성 임원이 기용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5년 7월 이언오 삼성경제연구소 전무를 국정원 최고정보책임자로 임명했다. 삼성과 노무현 정부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였다. (61쪽)

(삼성전자 법무팀에서 일하면서 이용철 전 청와대 비서관에게 현금 다발을 보냈던 이경 훈 변호사는, 뇌물을 준 명백한 물증이 있지만) 당시 노무현 정부는 이에 대해 제대로 된 해명을 하지 않았다. 이용철 전 비서관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전 비서관에게 돈을 전달한 이경훈 변호사에 대한 조사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63쪽)

노 전 대통령은 삼성에 진 빚이 너무 컸다. 정권 초기 안희정 등 측근들이 구속되는 것을 보며 노 전 대통령과 삼성의 연결고리가 끊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순진한 오해였다. 노 전 대통령은 임기를 마칠 때까지 삼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이건희는 대통령을 우습게 여기곤 했다. (146쪽)


(구조본 실장인) 이학수는 부산상고 후배인 노무현과 인간적으로도 아주 친했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이학수를 '학수 선배'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고 한다. (…) 노무현 정부 정책 가운데 삼성에 불리한 것은 거의 없었다. 대신,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제안한 정책을 노무현 정부가 채택한 사례는 아주 흔했다. 심지어 삼성경제연구소는 아예 정부 부처별 목표와 과제를 정해주기도 했다. (147쪽)

(대선 자금 수사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존경하는 선배'라고 불렀던 이학수를 구속하는 게 간단치 않으리라는 점은 누가 봐도 명백했다. (220쪽)


(노 전 대통령은)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며 집권했지만, 실제로는 재벌 편을 드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삼성과 아주 가까웠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그의 발언은 사실상 삼성에 대한 굴복 선언이었다. 삼성 재벌이 법치와 민주주의를 벗어난 특권 지대에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포한 셈이다. (399쪽)

민주화 세력이 집권했지만 재벌에게 유리한 질서는 오히려 더 견고해지는 것을 지켜본 국민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당연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이루어진 재벌 관련 수사 역시 대부분 노골적인 봐주기로 끝났다. (…) 그리고 최고 권력자 역시 이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2007년 삼성 비자금 등이 공론화되었을 때도, 노 전 대통령은 이 문제를 덮으려고만 들었던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점이다. (400쪽)


카프카의 선구성은, 그가 글을 써내지 않았다면 선대의 많은 글 속에서 "카프카적 특징을 감지"해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들을 조명해 주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김용철은 선구자이다. 그의 <삼성을 생각한다>는 우리나라 재벌의 생존 방식과 그들의 불법 로비 사슬에 얽힌 우리나라의 각종 권력을 새삼 돌이켜 보도록 만든다.

또 이 책의 출간 이후 독자들은 2008년에 출간되었으나 푸대접 했던 두 권의 편저 <한국 사회, 삼성을 묻는다>(후마니타스 펴냄)와 <삼성 왕국의 게릴라들>(프레시안북 펴냄)을 기억하게 되었으며, 이 책보다 한 달 앞서 나온 박일환·반올림의 <삼성 반도체와 백혈병>(삶이 보이는 창 펴냄)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보르헤스의 말처럼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념"만 수정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시간은 불가역이라고 말해지는 터에, 보르헤스의 저 선구자론이 놀라운 것은, 시간의 불가역성을 거슬러 올라가는 발상이다. 그러나 진정한 선구자란, 시간을 앞뒤로 종횡무진 하는 게 아닐까? 보르헤스도 말했듯이 선구자는 과거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우리의 관념"마저도 바꾸도록 한다.

지은이의 양심선언과 <삼성을 생각한다>를 응원하기 위해 뒤따라 나온 또 다른 편저 <굿바이 삼성>(꾸리에 펴냄)은 물론이고, 그 동안 태무심했던 '삼성 공화국' 의 비리에 대해 시민들이 '삼성 제품 불매 운동'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현재의 사태는, 이 책의 지은이가 과거의 조명자일 뿐 아니라 미래의 선구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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