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2월 16일
2월 2일부터 5일까지 소련 주재 미국 대사 해리먼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해리먼이 하지를 야단치러 온 줄로 생각했다. 3상 회담에서 신탁 통치 제안 책임을 소련에게 뒤집어씌우는 남한 상황 때문에 스탈린에게 불려가기까지 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사흘씩이나 한국에 머물렀다는 것이 좀 이상했다. 소련 주재 대사라면 장관급 거물인데, 일개 군단장을 야단치려면 도쿄에서 불러다가 맥아더가 보는 앞에서 야단치는 게 맞다. 그런데 하지가 왕 노릇하는 한국까지 찾아와 사흘씩 머물다니….
알고 보니 해리먼은 하지를 칭찬하고 격려해 주러 왔던 모양이다. 모스크바 3상 회담을 계기로 국무성의 전통적 다변주의(국제주의)에 대한 일방주의(국가주의)의 도전이 고개를 들었고, 주 소련 대사관이 그 첨단에 있었다. 냉전 논리의 출발점으로 회자되는 조지 케넌의 '장문 전보(Long Telegram)'가 나온 것도 이 시점의 일이었다. 원고지 100매 분량의(5500 단어) 긴 보고서를 전보로 보냈다는 사실이 화젯거리가 되어 붙은 이름이다.
1946년 2월 22일 주 소련 미국 대사관의 공사 고문(minister-counselor) 조지 케넌이 워싱턴 재무부로 보낸 장문 전보는 재무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소련이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창설에 협조적이 아닌 이유를 묻는 질문이었다. 장문 전보 모두에 케넌은 이렇게 적었다. (이하 장문 전보 내용에 관한 참고는 <Wikipedia> 'X Article' 조에서)
2월 3일과 13일의 재무부 284호 문서에 대한 답변에는 우리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기에 너무나 복잡하고 미묘하고 기이한 문제들, 우리 국제 환경 분석에 너무나 중요한 문제들이 개재되기 때문에 짤막한 답변으로는 위험할 정도의 지나친 단순화를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다섯 개 장으로 이뤄진 답변을 보내는 것을 가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통신망에 큰 부담을 드리는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만, 관련된 문제들이 너무나 중요한 것이고, 특히 최근의 상황 진행으로 보건대 이 문제들에 관심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그 관심을 즉각 쏟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당시 42세의 동유럽 전문가 케넌이 작성한 이 보고서는 외교 문서로서는 이례적으로 문화적·사상적 배경까지 포괄하는 폭과 깊이를 갖춘 것으로서, 소련이 본질적으로 팽창주의 성향을 가진 국가라는 점을 소련과의 관계에서 고려해야 한다는 요지였다. 종전 후 소련과의 관계에 불만이 미국에서 늘어나고 있던 상황에 겹쳐져 이듬해의 '트루먼 독트린'으로 공식화될 냉전 정책의 뇌관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장문 전보에서 케넌은 소련의 국가 성격 다섯 가지를 지적했다.
소련은 자신이 자본주의와 항구적 투쟁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련은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 체제는 실현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소련은 자본주의 세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자기편으로 이용하려 한다.
소련의 야욕은 러시아인의 세계관이나 경제 현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인의 역사적 서방 혐오증과 피해망상증에 근거를 둔 것이다.
소련의 국가 구조는 국내외 현실의 객관적이고 정확한 파악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소련 권력은 이성의 논리에는 무감각하면서 힘의 논리에만 극히 예민하다"는 그의 결론을 국가주의자들은 반갑게 받아들였다. 후에 케넌이 자기 논지를 냉전주의자들이 곡해한 점이 많다고 불평하기도 했는데, 1946년 당시의 국가주의자들이 케넌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국제주의자들을 공격하는 데 이용하기 바빴을 것은 빤한 일이다.
루스벨트 시대 미국 대외 정책을 지배하던 국제주의가 퇴조하고 국가주의가 득세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현실이었다. 일본과 한국 '현장'의 미국인들은 국제주의를 어서 벗어날 필요를 앞장서서 느끼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베닝호프와 랭던 등 한국 신탁 통치 정책을 준비하던 국무성 관리들이 하지의 고문으로 부임한 후 맥아더와 하지의 국가주의 입장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인 데서도 알아볼 수 있는 사실이다.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가 주한 미군 사령부를 맥아더 사령부에서 떼어내려 애쓴 것은 신탁 통치안과 관련해 하지가 말도 안 되는 개판을 친 데 대한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런 시도가 먹혀들지 않고 하지가 스스로 사의를 표했음에도 유임된 것은 국제주의 노선이 약화된 결과로 보인다.
하지의 개판이 바람직한 개판이라고 본 맥아더가 그를 보호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지가 나중에(1947년 10월) 당당하게 미국이 모스크바 합의를 지키는 대신 "항구적으로 분할된 남한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어야 한다"는 말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커밍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29쪽)
미군정이 6개월째로 접어드는 1946년 2월 시점에서 하지 사령관의 실적은 여러 모로 낙제점이었다. 민생의 가장 기본인 치안과 식량의 두 방면에서 식민지 시대보다 더 열악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있었던 사실은 그 동안의 일기에도 드러나 있다. 경찰력을 갑절로 늘리고도 주민들의 생활은 더 위험하게 되어 있었고, 모처럼의 풍작일 뿐 아니라 쌀의 외지 반출이 막히고도 대다수 주민들이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었으니. 미소공위에서 물자 교환을 의논해도 남한에서 내놓을 쌀이 없으니 미군 측 입장이 꿀리게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 사령부 체제가 유지된 것은 국제주의와 국가주의가 대립하는 미국 정계 상황으로 인해 실용적 기준이 아니라 편 가르기 기준이 작용한 결과였다. 하지가 맥아더의 국가주의를 화끈하게 밀어주지 않고 있다가 행정 실패의 책임을 추궁당했다면 그를 지켜줄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소련의 국가 구조는 국내외 현실의 객관적이고 정확한 파악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케넌의 관점이 미국 쪽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장면이다.
하지가 민생 문제를 소홀히 하고 소련 측과의 대결에만 몰두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기 체면과 지위를 지키는 열쇠가 거기 걸려 있으니까. 1월말 사의를 표명했다가 철회한 후 그는 미소공위 대책 마련에 부심했고, 그 결과물이 민주의원이었다.
미국의 3부조정위원회(SWNCC)가 1월 28일 하지에게 보낸 "한국의 정치 정책" 지침은 이런 내용이었다.
한국 임시 과도 정부의 수립과 원활한 운용을 돕기 위해 주한 미군 사령부는 중요한 민주개혁을 포함해 새 정부가 취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제반 정책에 대해 한국의 여러 당파들이 기본적 합의에 이를 수 있도록 촉구해야 할 것이다. (커밍스 위 책, 234쪽에서 재인용)
"한국의 여러 당파"라 한 것은 이남 정치 세력을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북에서는 모든 정치 세력을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포괄하는 임시인민위원회 체제가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미소공위에 이남 지역 정치계의 요구를 포괄적으로 제출할 통로가 갖춰지지 않고 있는 것이 미국 측의 불리한 점이었다. 그래서 소련 측에게도 승인받을 만한 통합된 통로를 어서 갖추도록 재촉한 것이다.
하지는 이 시점에서 상황을 이렇게 맥아더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북한에 중앙 행정 조직으로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임시인민위원회) 기구들은 일제하 기구가 약간 변경된 것이다. 미군정도 일제하 기구를 답습하고 있다. 따라서 심각한 혼란 없이 양자를 통합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정부는 명백히 러시아인들에 의해 미소공위에서 미국과 협상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또 한국인들에게 러시아도 미군정에 상응하는 기구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아마 북한의 민주적 정당·사회 단체의 자문 기구를 제공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하지장군문서철, 상자번호 123, Tfgcg 305 "하지가 맥아더에게", 1946. 2. 23.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 98~99쪽에서 재인용)
뭐 눈에 뭐만 보인다는 말 그대로다. 이북의 소련군이 이남의 미군과 달리 주민의 자발적 정치 개혁을 지지하고 옹호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이북에서는 식민지 시대와 전혀 다른 정치 조직이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하지에게는 상상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저 정치 조작 작업에서 소련군이 미군보다 앞서 있을 뿐이라 생각하고, 진도 만회에 박차를 가한 결과가 민주의원이었다.
3월 20일 미소공위 개막을 앞두고 미군 측에서 작성한 "한국 정부 구성에 관한 협상 지침"에는 하지의 상황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1월 28일 3부조정위원회에서 보낸 지침에서 상당히 벗어나 미국 중심의 국가주의 입장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미소공위의 미국 측 대표단은 이런 입장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미국 측 대표 중 본국에서 파견된 사람은 하나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하지 사령부 소속이었다.
소련은 처음부터 러시아에 순종적인 인물이 지배하는 정부를 수립하려 하거나 미소 양국이 조기에 철수한다는 조건으로 미국이 만족할 만한 민주 정부를 창설하려고 애쓸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소련이 취한 행동과 미국의 신탁 통치 제안에 대해 소련이 모스크바에서 보였던 첫 반응을 보건대 소련은 후자의 전술을 취할 것이다.
(…) 한국인들은 러시아의 개입에 맞서 영토적 통일을 유지할 능력이 없으며, 통일적 정부를 유지할 능력이 없다. (…) 반면 신탁 통치는 한국인들 사이에 인기가 없다.
(…) 미국의 1차적 목적은 러시아의 한국 지배를 막는 것이고, 한국의 독립은 2차적이다. 그러므로 수년 내에 한국 정부에 완전 독립을 허용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제연합 기구가 침략 방지 기제를 제공할 것이라는 적절한 증거가 없는 한 미국과 소련은 필요하다면 한국에 일정 형태의 영토적 보장을 연장하여야 하며, 한국의 국제 관계에서 필수적인 어떤 특권을 행사해야 한다.
(…) 소련은 미국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싶어 안달이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 격렬하게 반대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어떤 방법도 최소한 고위 차원에서 일정 형태의 위장된 통제가 미국에 의해 수년간 계속 행사되어야 한다는 조건 위에 기초해야 한다. (미소공위문서철, 롤번호 5. 정용욱 위 책 101~102쪽에서 재인용. 밑줄은 본 필자의 강조.)
(☞필자의 블로그 바로 가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