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2월 15일
1월 초순에서 걸친 4당 또는 5당 회담을 통한 통일 전선 결성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좌익에서 중도에 걸친 정당·단체들이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에 착수했다. 민전은 이후의 활동 방향으로 보아 좌익 단체로 보는 것이 마땅한데, 결성 당시에는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를 제외한 전 조선인의 대표 기구를 표방했다.
<조선인민당 외 29개 단체, 민족통전 문제 토의>
민중의 대망이 컸던 4당 내지 5당 회의의 결렬 경과를 보고하여 민족 통일 전선 결성 문제를 구체적으로 토의하기 위하여 조선인민당과 조선공산당 및 기타 각 정당 단체 대표자 회의를 개최한다는 것은 旣報한 바와 같거니와 동 회의는 左記 29개 단체 대표 60명 참석으로 예정대로 19일 오후 6시 시내 관훈정 실업자동맹회관에서 개최되었다.
회의는 洪南杓 사회로 개회되어 임정과 인공 及 조공과의 교섭 전말 及 4당 내지 5당 회의 경과에 대한 金午星의 보고가 있었다. 다음 토의 사항으로 민족 통일 전선 결성 문제에 들어가 만장일치로 민주주의민족전선을 발기하기로 결정하고 그 준비를 금후 구체적으로 급속히 전진시키기로 되었다.
그리하여 참가 각 당 각 단체에서는 광범 강력하게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한 것이며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선언 기초와 아울러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성격 의의에 대한 계몽 사업 준비까지도 부대 실행하도록 하게 하였다. (<서울신문> 1946년 1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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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공위의 예비 회담 성격을 가진 미·소군 대표 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였다. 불원간 열릴 미소공위 본회담에서는 임시 과도 정부 수립 방안 논의가 있을 것이고, 한국인들의 의견 접수도 어떤 방법으로든 이뤄질 것이었다. 이 과정에 참여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한국 정치인들에게 초미의 과제가 되어 있었다. (미소공위에서 논의한 1차적 한국인 정권을 흔히 '임시정부'라고도 하는데, 이 글에서는 기존의 임정과 구분하기 위해 '임시 과도 정부'라 한다.)
미군정은 애초에 서울을 장악하고 있다는 이점을 활용해서 자기네 마음에 드는 조직이 한국 전체를 대표하게 되기 바랐다. 11월 20일에 나타난 랭던의 '정무위원회' 구상에 따라 이승만의 독촉이 임정과 공산당을 포괄하는 대표성을 확보하기 바란 것도 그런 목적을 위해서였다. 임정이 전 민족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박헌영의 공산당이 이북의 '분국'에 대해 '중앙'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해가 바뀌어 분단 점령이 반년을 바라보는 시점에 와서는 이남에 존재하는 조직이 이북 주민까지 대표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제 현실적으로 볼 때 이 논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미·소 중 한 쪽 추천을 받고 다른 쪽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이북에서는 인민위원회 체제가 자리 잡고 있었고, 정당들도 서로를 인정하며 안정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대표 선발 방법에 문제가 적었다.
반면 이남에서는 점령군과 주민의 사이가 멀고 주요 정당들 사이에도 서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한민당과 공산당은 서로를 '민족 반역자'로 규정하고 합작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4당 및 5당 회담은 전국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남 전체를 대표할 통일 전선 구축을 위한 마지막 시도였다. 이 시도가 좌절되자 한민당은 이승만을 앞세워 공산당을 배제하고 임정을 포섭하는 비상국민회의 결성으로 방향을 잡았고, 좌익은 한민당을 배제하고 중도파를 포용하는 민전 결성에 나섰다.
민전을 공산당이 조종한 조직으로 통상 간주하는데, 적어도 결성 단계에서는 인민당이 공산당 못지않은 역할을 맡았다. 미군정의 탄압 때문에 민전이 투쟁적 노선으로 쏠리며 인민당이 위축되고 공산당의 역할이 커진 것이었다. 2월 4일 민전 준비위를 인민당 당사에서 연 후 인민당은 이런 성명을 냈다.
인민당에서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성격에 대하여 4일 다시 천명하는 동시에 동 전선 결성에 있어서의 다음과 같은 4대 원칙을 발표하였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속칭 소위 좌익 계열의 단체나 개인만으로 그 성원을 삼는 것이 아님은 누차 성명한 바와 같거니와 아당은 이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그 현실적 주장을 요약 명시함으로써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요청이 무엇인가를 밝혀 두고자 한다. 조선 민족 통일 공작을 자율적으로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칙적 조항의 엄숙한 약속을 요청하고 이 요청에 응하는 단체나 개인이면 누구든지 우리 전렬의 전우가 될 것을 기대한다.
1) 친일파 민족 반역자를 제외할 일
2) 삼상회의 결정의 원칙 하에서 민주주의 독립국가 건립에 노력할 것
3) 기성 정부의 법통을 고집치 말 것
4) 명실상부한 단체의 비례대표제를 승인할 것
이에 대하여는 우리 우당인 독립동맹이나 공산당도 전연 이에 동감이며, 우리는 광휘 있는 민족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민주주의라는 부동하는 원칙하에 민족통일과 국가 건립을 기도하여야 될 것임은 물론이나 그 원칙을 상기한 바와 같이 가장 현실적으로 파악하는 데에만 그 실현을 가장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6년 2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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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은 민전 결성을 코앞에 둔 2월 13일 민전 참여를 독려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위의 인민당 성명과 비교할 때 투쟁적이고 대립 지향적인 자세가 분명히 느껴진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30일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에 있어 민족 통일의 촉진을 위하여 정확한 시비를 판정한 뒤에 중립 혹은 고립적인 태도를 버리고 모든 민주주의 요소가 이에 참가하기를 강조하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세간의 일부에서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가지고 좌익 편향 혹은 좌익적이라는 옳지 못한 규정을 내리고 흡사히 이 전선이 일종 과오를 범한 것 같은 인상을 주려고 애쓰는 분들이 없지 않으나 이것은 전연 옳지 못한 견지이며 또한 출발이다.
회고컨대 4당 공동 코뮤니케를 발표해 놓고 또다시 그것을 부정한 자 누구이며 민족 통일 전선 결성에 있어 죄과 분자를 자기 산하에 집어넣고 옹호 정책을 실천함으로써 반동적 혼란을 일으킨 자 누구인가. 이런 구체적 사실을 지적하고 보면 시비는 명백한 일이 아닌가. 여기에서 인민을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 진영의 집결인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다른 편에 비상국민회의가 대립되고 있을 뿐이다.
이 후자는 금일의 미군정을 무조건 절대 지지하면서도 삼상회의 결정을 반대하고 나온다는 것은 대체 무슨 심사인가. 만일 우리가 이 양개 전선을 떠나서 중립 혹은 고립하고 있어 방관 주저하고 양자가 똑같이 옳지 않다는 태도를 취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정당하게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하는 옳지 못한 경향이다.
그러므로 경향을 물론하고 각 당, 각 파, 무소속 등 모든 민주주의 요소는 주저하지 말고 자진하여 적극적으로 이달 15일에 결성되는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가하기를 요구한다. 옳은 일을 하는 자를 돕는 것은 또한 더 옳은 것이요, 이것이 곧 민족을 위함이요, 정의와 민주와 평화와 통일과 독립을 위함이다.
이런 때에 있어서 중립은 고립을 의미하고 고립은 방관이요 그것은 민주주의적 진보진영의 역사적 사업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서울신문> 1946년 2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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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5~16일의 민전 결성 대회에 참여한 정당·단체와 그 대의원 수는 이러했다.
민주주의민족전선 전국 결성 대회는 예정과 같이 15일 오전 10시부터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다. 동 준비위원회 14일 발표에 의하면 작일 정오 현재 동 대회 참가를 정식으로 신청하여 온 정당과 단체는 33단체이며 대표인원은 398명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당 : 조선인민당(대의원 30명), 조선공산당(30명), 조선독립동맹(15명)
노동자 단체 : 전국노동자조합평의회(30명)
농민단체 : 농민조합전국총연맹(30명)
청년단체 : 전국청년총동맹(20명), 조선공산청년동맹(5명), 청년독립동맹(2명)
부녀단체 : 조선부녀총동맹(20명)
종교단체 : 천도교청우당(10명), 유도회(5명)
문화단체
1) 교육단체(19명)
2) 문학예술단체(15명) : 조선문학동맹, 음악동맹, 미술동맹, 연극동맹, 영화동맹, 조선문화협회
3) 과학기술단체(15명) : 조선학술원, 조선과학기술연맹, 조선의사회, 조선어학회, 조선과학연구소, 조선산업노동조사소, 조선보건협회, 산업의학회, 조선생물학회, 진단학회
기타 단체 : 응징사동맹(5명) (<서울신문> 1946년 2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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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으로는 인민당과 공산당이 양대 축을 이루고, 독립동맹이 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서중석은 독립동맹이 그 당시 "민족 통일 전선 형성에 적임 세력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했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 345쪽) 임정에 버금가는 해외 독립운동의 주체로 중국공산당의 통일 전선 정책에 익숙한 독립동맹은 해방 공간에서 좌우 대립을 완화하는 힘을 가진 이례적 존재였다. 독립동맹이 2월 16일 출범시킨 조선신민당은 평양에서 공산당(북조선분국)과 공조 관계를 펼치다가 8월에 북조선노동당으로 합당하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맡은 반면 서울에서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다.
조선학술원, 조선어학회, 진단학회 등 비정치성이 뚜렷한 단체들의 참여가 눈에 띈다. 중도파까지 포용하는 민전의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측면이다. 조선어학회 대표 이극로는 민전의 정당성을 지적, 그 발전을 빌면서 연구실로 돌아간다는 정계 은퇴 성명을 2월 18일 발표하기도 했다. (<서울신문>, 1946년 2월 19일자) 1월 하순 비상정치회의를 떠나며 중립을 표방하고 민전에도 불참여를 선언했던 임정 비주류 인사들이 이 시점에서 민전에 참여한 것도 포용성의 측면이 충분히 확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민전이 현실 문제의 대책에 치중한 것은 이 측면을 강화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현실 대책 중 결성 대회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이 친일파 및 민족 반역자의 규정이었다. 상식적 차원에서 숙청 대상을 가리킨 이 말들이 그 동안 심하게 오용·남용되어 왔다. 한민당도 아무나 싫은 사람 있으면 친일파니 민족 반역자니 욕해 왔다. 민전은 통일 전선을 표방하면서 배제 대상을 정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 8·15 이전 친일파, 민족 반역자
가. 조선을 일본 제국주의에 매도한 매국노와 그 관계자
나. 유작자, 중추원 고문, 중추원 참의, 관선 도부 평의원
다. 일본 제국주의 통치 시대의 고관(총독부 국장, 지사 등)
라. 경찰, 헌병의 고급 관리(경시, 사관급)
마. 군사, 고등 정치 경찰의 악질분자(경시, 사관급 이하라도 인민의 원한의 표적이 된 자)
바. 군사, 고등 정치 경찰의 비밀 탐정의 책임자
사. 행정·사법 경찰을 통하여 극히 악질분자로서 인민의 원한의 표적이 된 자
아. 황민화 운동, 내한 융화 운동, 지원병, 학병, 징용, 징병, 창씨 등 문제에 있어서의 이론적 정치적 지도자
자. 군수 산업의 책임 경영자
차. 전쟁 협조를 목적으로 하는 또는 팟쇼적 성질을 가진 단체(대의당, 일심회, 녹기련맹, 일진회, 국민협회, 총력연맹, 대화동맹 등)의 주요 책임 간부
◊ 8·15 이후의 민족 반역자
가. 민주주의적 단체 혹은 지도자를 파괴 암살하기 위하여 테러단을 조직하여 지도하는 자, 이 단체 등을 배후에서 조종 원조하는 자, 또는 직접 행동을 하는 자
나. 연설, 방송, 출판물 등을 통하여 애국적 지도자와 그 가족에 대한 가해를 선동 교사하는 자
다. 관헌으로서 민주주의적 지도자를 무고히 검거, 고문, 투옥, 학살하며 민주주의적 제 기관을 파괴하는 자
라. 미군정 또는 MP·MG에게 무고하여 이러한 불상사를 야기케 하는 자
마. 패잔 일본 제국주의 及 철귀 일본인으로부터 물품을 대량 매점하고 암흑 시장을 통하여 不絶 계속하고 국민 경제의 교란과 대중생활의 파탄을 초래하는 간상 모리배 (<조선일보> 1946년 2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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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은 민전의 준비위에 이북 인사들이 배치되어 있다가 결성 단계에서는 서울에 와 있던 독립동맹의 한빈 외에 모두 제외된 점을 중시했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 347~348쪽) 준비위 단계에서는 전 조선을 대표하는 기구를 지향하다가 결성 단계에서는 현실 조건에 맞춰 이남 지역을 충실히 대표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래서 이름에 '남조선'을 붙인 민주의원과 이남 지역의 대표성을 놓고 경쟁하는 입장이 분명하게 되었다.
서중석은 민전이 지방에서부터 중앙으로, 밑으로부터 위로 향하는 민주적 조직 방법을 더 적극적으로 써서 영수들이 인선한 우익의 민주의원과 차별성을 더 강조하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 (같은 책 347쪽) 그러나 커밍스는 민전이 서울에서는 인공을 대치하고 지방에서는 인민위원회를 기반으로 삼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36-237쪽) 지방의 정확한 실상은 모르지만 우익 조직에 비해 민전의 민주주의적 기반이 더 튼튼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민전의 결성이 좌우 합작의 한계가 확인되고 미소공위 참여가 필요한 상황에서 결정된 것임을 생각하면 하향식 조직 방법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민주주의적 기반의 확충은 이후의 운영 과정에서 바라볼 과제였다.
14일의 민주의원 발족에 이어 15일 민전 결성으로 양자 간의 대결이 좌우 대립의 초점이 되었다. 민주의원은 고급 승용차 50대를 제공하는 등 미군정의 지원에만 의지할 뿐, 민전과 같은 지방 조직과 하부 조직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통일 정부의 '대신' 자리를 미끼로 끌어 모아 놓은 명망가들의 이 집단이 할 수 있는 일은 3·1절을 공휴일로 정하고 차량 통행을 좌측에서 우측으로 변경한 정도였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 225쪽) 민주의원이 "한갓 고궁에서 한담만 한다는 냉소"를 받았다는 안재홍의 탄식도 민전과 비교하는 관점에서 나온 것이었으리라. (<민세 안재홍 선집 2>, 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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