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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에 올라가 흔들리는 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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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에 올라가 흔들리는 임정

[해방일기] 1946년 1월 24일

1946년 1월 24일

임정 측에서 구상했던 '비상정치회의'가 1월 21일에 이승만의 독촉을 합류시키며 '비상국민회의'로 방향을 돌렸고, 비상국민회의주비회가 1월 24일 본격적 활동을 시작했다. 오늘은 비상국민회의 이야기를 쓰려 하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가 작동이 안 된다. 기사 제목까지 검색이 되는데, 기사 내용이 뜨지 않는다. 관련 기사 제목만 뽑아 놓고 내용 인용은 못하겠다.

1946년01월04일 김구, 통일정권 수립문제에 관해 비상정치회의 소집 등 성명 발표
1946년01월17일 임정, 비상정치회의 소집 결정
1946년01월20일 비상정치회의주비회 개최
1946년01월21일 비상정치회의주비회, 독촉을 합류시켜 비상국민회의주비회로 개칭
1946년01월21일 비상정치회의주비회, 조직조례기초위원 선정, 신탁문제 간담회
1946년01월22일 비상정치회의주비회, 미국무성 극동과장 빈센트의 방송에 대한 성명
1946년01월23일 비상국민회주비회, 탈퇴단체의 복귀를 희망하는 성명서 발표
1946년01월23일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 비상국민회의주비회 탈퇴
1946년01월24일 무정부주의총연맹, 비상국민회의주비회 탈퇴성명
1946년01월24일 비상국민회의주비회, 61개 단체에 초청장 발송
1946년01월24일 비상국민회의주비회, 심사위원과 국민회의 소집주비위원 선정
1946년01월25일 독립촉성청년연맹 등 50단체 비상국민회의 지지결의
1946년01월25일 비상국민회의주비회, 비상국민회의에 참가할 61개 단체 발표

12월 초까지 임정 주력이 귀국하자 곧 새로운 활동형태의 필요가 떠올랐다. 그 시점에서 이승만은 군정청과의 교감 하에 모스크바 3상회담 전에 임정을 독촉에 끌어들이려 획책했으나 임정 인사들은 말려들지 않았다. 12월 19일 임정 환영대회에서 김구가 극소수 친일파 민족반역자 외에 전 민족이 통일해야 한다고 외친 것은 이승만이 드러내기 시작한 반공노선을 은근히 반대한 것이었고, 임정 비주류 인사 성주식은 이승만의 반공노선이 이승만 개인의 것이며 임정이 독촉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공개적으로 언명했다.

12월 중순 성주식 등 5인의 임정 비주류 인사의 '특별정치위원회' 구성 제안이 임정의 국내 활동을 위한 방안으로 처음 나온 것이었고, 김구 등 임정 주류도 이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12월 25일 조소앙, 김붕준, 김성숙, 최동오, 장건상, 유림, 김원봉 7인으로 특별정치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다가 신탁통치 문제가 터져 나오면서 임정이 거센 물살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극우파의 반탁운동이 임정 추대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경찰, 군정청 직원 등 실력자 집단이 여기 동조하는 상황에 김구가 크게 고무되었던 모양이다. 조심스러운 모색의 자세를 내던지고 기세를 한껏 올린 것이 12월 31일 군정청으로부터의 정권 탈취 시도라 할 수 있는 '국자' 1-2호의 발포였다. 극우파의 부추김으로 김구가 나무 위에 올라간 것이다.

바로 이튿날 김구와 하지의 충돌 후 임정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국자 제1호의 제1항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관 及 한인 직원은 전부 本 임시정부 지휘 하에 예속케 함"을 실질적으로 취소한 것이다.

'임정 추대'는 함성뿐이었고, 군정청과의 충돌을 이겨낼 실력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함성은 계속되었고, 임정은 차분한 모색의 자세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대장부가 칼을 뽑았으면 호박이라도 하나 베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1월 4일 김구의 '비상정치회의' 제안이 나왔다. 임정의 (임시)의정원은 중경을 떠나면서 실체가 사라졌다. '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민의'에 바탕을 둬야 하는데 형식적으로나마 임정의 정통성을 뒷받침해 주던 민의 수렴기구 의정원이 없었다. 김구는 국내 임정 지지세력을 모아 의회 성격의 기구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1월 7일 '4당 코뮈니케'를 내놓은 4당 회의와 그 이후 신한민족당을 추가한 5당 회의를 비상정치회의 준비회담으로 유도하려는 임정 측의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도에는 좌우 양쪽에서 반대와 저항이 있었다. 임정의 법통을 부정하는 공산당과 인민당은 임정 지지세력 틈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12월 중 '반공' 깃발로 극우파의 주도권을 확보한 이승만은 임정과 김구가 명목상의 권위를 넘어 실제적 주도권을 쥐는 것을 꺼렸다. 서중석은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341쪽에서 이승만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있으므로 비상정치회의가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고 했다.

이 대목에 붙인 <주18>은 이런 내용이었다.

김성수가 1월 14일 비상정치회의 소집을 지지하는 담화를 내자 이승만은 이에 크게 불만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우익진영이 찬성하는 비상정치회의를 박사님께서 외면하신다면 박사님은 스스로 자기 기반을 버리시는 형세가 될 것입니다."라고 장덕수는 이승만을 위협하였다고 한다.(이경남, <설산 장덕수> 339쪽 등)

좌익과의 사이는 한강이고 이승만-한민당과의 사이는 샛강이라고 김구는 생각한 것일까? 1월 21일 독촉과의 합류, '비상국민회의'로의 선회 결정은 좌익 참여의 포기였다. 1942년의 좌우합작 이래 한국독립당에 이어 임정의 제2당이던 민족혁명당의 김원봉과 성주식, 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 그리고 무정부주의총연맹의 유림이 비상국민회의로의 선회에 반대하여 탈퇴했다. 의정원에 이어 임정의 국무회의마저 궤멸의 위기에 빠지고 임정의 상징적 가치는 크게 훼손되었다.

비상국민회의 결성에 좌익을 참여시키지 않았다는 비주류 측의 불만에 대해 김구 측은 좌익 정당과 단체에도 초청장을 보냈다고 응수했다. 그러나 비주류 측은 결성 의논 과정에 좌익이 참여하지 못한 이상 좌익 측에 주체적 입장을 허용하지 않은 것임을 지적했다. 주비회에서 탈퇴한 임정 비주류 인사들은 비상국민회의에 대항하는 통일전선으로 좌익에서 준비하고 있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도 참여하지 않을 뜻을 서둘러 밝힘으로써 중립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비상국민회의에 참여한 안재홍은 2월 13일의 방송 연설에서 입장을 이렇게 밝혔다.

나와 및 국민당은 '건준'과 '중앙협의회' 이래 민족전선 통일을 위하여 상응한 노력을 줄곧 계속하여 온 편이나, 혹은 세력 독점을 꾀하는 편과 마찬가지 권력을 자기편에서 많이 쥐겠다고 책동하는 등 착종한 관계 중에 결국 불성립되었고, 1월 상순 임시정부에서 '비상정치회주비회'를 발기하는 즈음에서도 세칭 4대정당의 회합과 뒤를 이어 5정당의 간담에 적극 참여하고 또 알선도 하여 민족-공산 양 진영의 협동에 의한 건국공작을 원만 행진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역시 불성공으로 마쳤습니다.

민족전선 통일도정에 있어 일부의 세력이라도 불참가-비협동의 결과로 되어서는 아니되겠으나, 위에 말한 국내정세가 매우 절박하여 건국구민의 대업이 하루 이틀을 바쁘다고 다툴 뿐 아니라, 조선을 싸고도는 국제정세도 역시 하루 이틀을 다투어 가면서 급격하게 추진되고 있는 이때, 원만 협동을 기다린다고 해서 앉아서 민족성패의 긴박한 시기를 놓칠 수 없으므로 단연 비상한 방법을 취하기로 되어, 경성에 있는 민족주의 3정당과 평양에 있는 조선민주당까지 협동하고 다른 해외에서 들어온 혁명단체와 국내에 있는 종교 제집단과 연결하여, 임정에서 소집하는 '비상정치회의'를 지지하되,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결성되어 있는 '독립축성중앙협의회'의 사업을 거기에 합류시키어, '비상국민회의'로 명칭을 변경하고, 이 박사와 김구 조석을 두 영수로 추대키로 중의가 일치하게 되어, 과도정권 건설방법에까지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임시정부에서 소집한 '비상정치회의'가 '비상국민회의'로 발전되고 과도정권 수립에까지 간 것은, 스스로 그들 각 개인으로서의 정권욕을 떠나서 건국대업에 매진하는 것으로 해석할 바요, 3-1운동 이래 27년 동안 민족해방운동의 전통은 누가 신정부를 조직하든지 당연 건승될 바로서, 이 점은 민족통일 도정에 일단의 광명을 준 것이 의심 없습니다. (<민세 안재홍 선집 2> 91-92쪽)

완전한 통일전선을 바라지만 절박한 국내외 정세 앞에서 더 이상 시일을 천연할 수 없기 때문에 비상국민회의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통일전선 결성을 위해 지극한 정성을 쏟아 온 안재홍조차 완전한 통일전선을 포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극좌와 극우가 그 동안 보여 온 성향으로 보건대 양측을 포괄하는 통일전선 결성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모양이다.

일간 안 선생을 또 한 번 찾아가 물어봐야겠다. 이 시점에서 극좌와 극우의 포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면, 왜 극좌와 극우를 함께 배제하는 길은 찾지 않았는지? 왜 극우파가 주도하는 비상국민회의에 참여해서 그 성세를 키워주는 데 들러리 역할로 나섰는지? 중도파가 앞장서는 제3의 길은 이미 막혀 버린 것이었을까?

(필자의 블로그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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