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월 21일
3상 회담 결정에 대한 "일반 한국인의 입장은 소련과 통하는 것"이었다고 어제 썼다. "일반 한국인"이라 함은 한민족의 통일된 독립국가가 세워지기 바라는 마음을 가졌고, 그 마음을 개인적 이해관계 때문에 크게 굽힐 이유가 없는 한국인을 말한 것이다.
한민족의 통일된 독립국가가 세워지기 바라는 마음을 '민족심'이라고 하자. (중국 조선족이 '민족주의' 대신 '민족심'이란 말을 쓰는 것은 정치적 조건 때문이지만, 우리가 흔히 '민족주의'라 말하는 것을 '민족심'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한 때가 많은 것 같다.) 민족 구성원 가운데 민족심을 전혀 안 가진 사람은 극소수다. 그런데 민족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민족심이 강하고 약한 편차가 크다. 아주 강한 사람은 그를 위해 목숨을 던지기도 하고, 아주 약한 사람은 조그만 이해관계 앞에서도 민족심을 접어놓을 수 있다.
해방 공간처럼 가변성이 큰 상황을 바라보며 도덕적 기준을 적용하려는 유혹을 쉽게 받는 것은 다른 적절한 기준을 명확히 세우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도덕적 평가는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나는 도덕적 평가를 역사 공부의 궁극적 목표로 보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다. 다만 이것이 목표이지, 방법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않으려 애쓴다. 충분히 확실한 이해에 이르기 전에 도덕적 기준을 섣불리 떠올리지 않으려 애쓴다.
통일 민족국가 건설을 등진 이승만과 한민당, 그리고 대다수의 경찰관과 자본가들에게 '반민족 행위자' 딱지를 붙이는 것이 이 작업의 목적이 아니다. '반민족'이란 기준으로 그들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끝내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들 중에 극히 사악한 인물도 몇몇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주변 사람들을 위해줄 줄 아는, 나름대로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런 '보통사람'들이 자기 사회의 파멸을 불러오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많은 '보통사람'들이 이 사회의 파멸을 불러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지나 않은지 살펴보기 위해서는 '반민족' 집단 속에서 '보통사람'의 모습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서북청년회에서 활동한 바 있는 1920년생의 손진은 자신이 '반민족'의 길로 나선 관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같은 민족끼리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냐는 말들도 많이 하는데, 내 말은 같은 민족이 아니라는 게 아니에요. '국민'과 '민족'을 구분해야 된다는 거지요. 만일 민족만 놓고 생각할 것 같으면 같은 민족인데 제2차 세계 대전 때 미국에 살던 일본 놈들이 미국 국민으로서 싸운 건 어떻게 설명할 거냐는 말입니다. 민족이 내 생명, 내 재산을 보호해주는 게 아니에요. 국민이죠. 국가가 망하면, 일제 때 봤잖아요. 그때 우리가 어디 민족이 없었어요? 주권을 빼앗기니까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을 길이 없는 거예요.
'민족끼리'라는 건 북한이 주장하는 거예요. '공산주의'라는 게 원래 민족이 없어요. 그런데 왜 그걸 써먹는가 하면, 남한에 먹혀들어가니까 써먹는 거예요. '적'이라는 게 뭐겠어요?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적 아닌가요? (<8·15의 기억>, 44쪽)
이 관점은 손진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서북청년회 같은 조직에서 회원들의 자연스러운 민족심을 억누르기 위해 퍼뜨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근년 뉴라이트 이론가들이 민족을 부정하며 국가를 앞세우는 것도 같은 틀이다.
이런 관점을 내세우기 위해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는 것이 뉴라이트 세계관의 핵심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 발전하면서 키워온 공동체 의식을 부정하는 이런 관점은 인간을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손진과 같은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이런 관점에 포섭될 수 있었던 것은 공동체 의식에 기초를 둔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희망이 흐려진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수 집단의 이익을 위해 사회를 '공익' 관념이 희박한 야만 상태로 몰아넣는 이 전략이 지금도 신자유주의의 기조로 통용되고 있다.
일제 말기부터 대한민국 초기까지(1939~1960년) 경찰로 근무한 1916년생의 홍순복은 해방 공간의 경찰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일제 시대에 친일한 사람들을 왜 다시 기용했느냐 말들이 많은 걸로 압니다. 그 문제는 난 이렇게 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북쪽에서는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이미 왜정 때 관여했던 모든 관리들, 또 행세했던 사람들을 숙청했어요. 좌익, 이른바 공산주의 세력들이 집권하면서 그런 식으로 처리했던 거죠.
그런데 남쪽에서는 그것이 아니고, 해방 직후에 어지러운 질서를 잡아나가자면 왜놈 치하에 있던 경찰의 능력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이승만의 정책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병옥, 장택상 같은 분들도 사상적으로 박해받던 사람들이었는데도 자기네를 핍박했던 경찰들을 다시 채용했던 거예요. 그 사람들 아량은 보통이 아닙니다. 왜놈들이 정치적인 목적이 있어서 나쁜 것이지, 일제 때 경찰한 사람들이 행정적인 면에서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요.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 같은 경우도 일제 시대 때 경찰이 되어 일본 사람의 명령에 의해 움직인 건 사실이지만, 민족을 해쳤다든가 하는 일은 절대 없었습니다. 오히려 민족을 보호하고 그놈들의 탄압 속에서 어떻게 하면 평화를 유지할까 걱정했을 따름입니다. 일본 사람들 틈에 섞여서 민족 운동하는 우리 투사들을 잡거나 하는 일은 없었어요. 감히 생각할 수도 없죠.
왜놈 밑에서 일하던 경찰, 행정공무원들도 마찬가지로 다들 민족 정기, 민족 정신을 가지고 있었어요. 해방 후에 복직했던 공무원들 가운데 그렇게 일본 놈을 위해서 충성했던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친일해서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나 조선 사람을 앞장서서 탄압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말입니다. 대개는 마지못해 한 것일 테고, 생계를 위해 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8·15의 기억>, 235쪽)
조병옥의 '아량' 얘기를 보려니 경찰 지휘권을 막 손에 쥔 그가 돈암장(이승만 거처) 경비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성북서 서장을 질책하다 못해 유치장에 넣으라고 호령해서 물의를 빚은 일을 11월 9일자 일기에 적었던 것이 생각난다. 지금의 이해관계를 위해 과거의 적과 손잡는 것을 '아량'이라 하는 것이 꼭 적절한 표현 같지는 않지만, 그 '아량'으로부터 혜택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증언자 홍순복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식민지 시대 경찰을 하면서 민족 모순을 전혀 느끼지 않고 "친일해서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나 조선 사람을 앞장서서 탄압한 사람들"을 예외적 존재로 본다. "우리 투사"들을 잡거나 하는 일은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착한 사람들이 대한민국 경찰에는 많았다. 지금도 많다.
1930년 평양 생으로 1946년 월남해 이북학련에서 활동한 채병률은 이런 증언을 남겼다.
해방 전까지는 우리도 잘 먹고 잘 살았어요. 해방이 되고 소련군, 즉 로스께나 적의대들이 들어와 우리를 쫓아냈잖아요. 그나마 쫓겨서 넘어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서울에 와 보니까 또 공산당을 찬양하고 동경하는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닌가. 괘씸해서라도 이번에는 안 싸울 수가 없더라고요. 우리가 험한 장사를 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게 된 이유가 그들한테 쫓겨났기 때문인데 말이지. 그리고 그들에 대한 적개심은 사상적인 노선이 달랐기 때문이기보다는 단지 '네놈들 때문에 쫓겨나고 못 먹고 못 산다'는 생존권 박탈에 대한 울분이 강했기 때문이었어요. 요즘처럼 이념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지.
여기서까지 쫓겨나면 더 이상 갈 데도 없을 판이니 싸우는 수밖에. 그 당시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김두한이 종종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여하튼 얻어왔는지 뺏어왔는지 우리한테 돈을 줬어. 더 마음에 들었던 것은 한 번도 돈을 세서 주는 법이 없고 호주머니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줬어요. 당시에 5원, 10원, 100원짜리가 있었으니까 100원짜리라도 몇 장 받는 날이면 감격이지. 1원짜리야 열 개 받아봤자 고작 10원밖에 안 됐지만. 아무튼 그 어른한테 우리 이북학련이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8·15의 기억>, 353쪽)
김대중, 김영삼 두 분을 모두 모셔본 어느 분이 두 분이 돈 내주는 방법을 비교한 얘기가 생각난다. YS는 헤아리는 일 없이 한 줌 턱 쥐어서 내주고 적은 듯하면 또 한 줌 턱 쥐어서 내주는 식인데, DJ는 옆으로 살짝 돌아앉아 무릎위에서 꼼꼼히 세어 정확한 액수를 내준다는 얘기.
함께 듣던 사람들도 나도 "그런 면에서는 YS가 통이 크구나" 탄복하며 들었다. 그런데 지금 김두한의 씀씀이 방식을 전하는 채병률의 증언을 보며 다른 측면의 생각이 떠오른다. 받는 사람을 종속적 입장에 묶어놓는 측면이다. 김두한의 마음에 들 만한 일을 열심히 찾아 하는 대가로 김두한의 포상을 받는데, 그 포상은 정기적인 것도 아니고 액수가 정해진 것도 아니다. '횡재'의 성격을 가진 포상이다. 그런 포상을 위해 생활을 바치는 사람들은 자기 생활을 스스로 계획해 나갈 수 없는 '룸펜' 심리 상태에 묶이는 것이다.
아무튼 이 증언은 극우파 폭력 조직에 동원된 사람들의 기본 상황을 보여준다. 해방 전 고향에선 나도 꽤 잘 나갔는데, 하는 자부심은 본인의 도덕적 품격을 뒷받침하기보다 폭력 대상에 대한 적개심을 강화하는 발판으로 작용한다. 생존 조건 확보가 행동의 기본 목적이고, 나아가 호쾌한 씀씀이에 대한 룸펜 식 동경이 그 동기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
세 사람의 증언에서 나는 '보통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어떤 세상에서도 우리가 더불어 살 사람들이다. 민족에게서 덕 볼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국가에라도 매달리는 태도, 경찰이라는 현실적으로 괜찮은 직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합리화하는 태도, 생계를 확보하며 분노도 발산할 수 있는 일거리에 매달리는 태도,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상황에 따라 '보통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태도다. 이런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 싫다면 달나라에 가야 한다.
보통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선택했던 행동을 얼마 후에 후회하는 일이 많다. 그 후회는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다. 해방 공간에서 민족심을 접어놓았다가 전쟁이라는 참혹한 결과가 닥치자 자기 정체성에 대한 믿음의 부족이 불행한 사태를 몰고 온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많았다.
'어리석음'을 후회하는 다른 방향도 있다. 민족심과 인간성을 더 철저하게 등지지 못하는 바람에 손해를 입거나 이익을 덜 봤다는 후회다.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축소시키는 방향의 이런 후회는 사람을 '어리석음'의 경지에서 '사악함'의 경지로 이끌어간다. '보통사람'의 범주를 벗어나는 길이다.
<뉴라이트 비판>(돌베개 펴냄) 작업에서 나는 핏대 올리는 일을 피하려 노력했고, 그 노력은 많은 독자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사실 그 노력이 실패한 대목이 몇 있다. 안병직이 DJ 대북 정책을 어리석고 사악한 것이라고 쓴 것을 봤을 때가 그런 대목의 하나였다. 그런 식으로 그 일을 보는 안병직 자신의 관점이 어리석고 사악한 것이 아니냐고 나는 썼다.
"여우랑은 같이 살아도 곰이랑은 못 산다"는 속담이 있지만, 나는 곰과 살고 싶다. 나 자신도 곰처럼 살고 싶다. 보통사람의 어리석음도 세상 살기를 어렵게 만들지만, 그 어리석음을 벗어나겠다고 사악함으로 나아간다면 함께 세상 살기가 아예 불가능해질 수 있다.
해방 공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 그 어리석음을 모두 고쳐 완벽한 이상향을 만들 욕심이 내게는 없다. 내가 중시하는 것은 보통사람들을 어리석은 행동으로 몰아간 혼란한 상황을 빚어낸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개 보통 넘게 어리석은 사람들이었고, 더러 사악한 사람들도 있었다. 사악함과 그에 가까운 심한 어리석음, 그것을 집중적으로 반성해서 지금의 세상에서 그와 같은 것을 억누를 수 있게 되기를 나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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