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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폭력 경찰'의 뿌리? 바로 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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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폭력 경찰'의 뿌리? 바로 이 사람!

[해방일기] 1946년 1월 18일

1946년 1월 18일

1월 18일 반탁전국학생총연맹(반탁학련)의 폭력 시위가 인민보사와 인민당 서울인민위원회를 습격하고 이를 저지하려는 '좌익' 세력과 충돌했다. 이 충돌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를 반탁학련 측의 삐라와 나란히 올려놓는다. 두 글을 보고 사건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어도 <동아일보>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지는 명료하게 알아볼 수 있다.

반탁, 반탁 오직 자주독립을 염원하여 구랍 29일부터 이 땅에 성난 파도와 같이 일어난 탁치 반대 운동은 마침내 피를 흘리고야 말았다. 18일 밤 탁치 절대 반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는 반탁 운동 학도대들은 무기를 휴대한 반대 단체의 습격을 받아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은 후 유혈의 참사를 이루었던 것이니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강산을 우리의 손으로 찾자고 반탁 학생 성토 대회는 반탁학생총연맹 주최로써 18일 오후 2시부터 개최되어 이 땅 젊은 학도들의 결의를 더욱 굳게 하고 오후 5시경 성황리에 마치었는데 여기에 참집한 시내 남녀 전문대학생, 중학생 약 1000여 명은 결의문과 성토문을 휴대하고 그 길로 바로 소련영사관으로 방문하여 이를 수교하고 뒤이어 미국영사관을 방문하였으나 아무도 만나지 못하여 반도호텔을 거쳐서 조선호텔을 방문하고 여기서 미군 측에 결의문과 성토문을 수교하는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격로된 학도들은 시위행진을 하는 도중에 황금정 1정목 조선인민보사 편집국과 인민당 서울인민위원회를 차례로 습격하고 그 길로 바로 임시정부를 방문하려고 서대문 2정목을 진행하는 중 돌연 권총과 장총을 든 청년들의 습격을 받았다. 무수히 발사하는 탄환을 맞아 피를 흘리며 거꾸러지는 남녀 학생들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신탁 통치는 절대 반대다 우리에게 독립을 달라!' '대한 독립 만세' '김구 주석 만세'를 부르짖으며 행진을 계속하였으나 빗발 같은 탄환으로 말미암아 임시정부를 방문하는 것은 중지되고 말았던 것이라고 한다.

반탁 시위 행렬을 하는 중 습격을 받아 부상을 받은 학생들은 판명된 자만이 40여 명에 달하였는데 그 중 이화여대 李金順(가명 20)양 외 1명과 세의전 李相國(가명 23), 양정중학 李吉俊(가명 18)군 등 4명은 총탄에 중상을 입고 방금 세브란스의전 부속병원에 입원하여 응급 가료를 받고 있으나 유혈이 심하여 모두 생명이 위독하다고 한다.

이 급보를 접한 서대문서에서는 서원 약간 명이 현장에 출동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고 이 곳 종로서에 연락하였던 바 행진에 참가하였던 여학생 수 명을 납치하여 가지고 도주하는 청년 2명을 검거하였다. 취조한 결과 이들은 국군준비대원 백모(23)와 학병동맹 모군으로 판명되었는데 어느 단체의 지시에 의한 행동인지 개인적 행동인지 알 수 없으나 이번 테러에는 약 50명이 장총과 권총을 휴대하고 참가한 모양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46년 1월 20일자)


보아라! 1·18 학생 사건의 진상을

1월 18일 서울 정동예배당에서는 반탁전국학생연맹 주최로 성토 대회가 있었는 바 화랑의 후예의 열화의 기백을 만천하에 공포하니 그 결사적 의기의 다대한 감동과 새로운 결의를 굳세게 한 약2000여의 청중들은 회가 끝나자 애국가를 고창하며 소련영사관에 질서정연하게 쇄도하여 탁치 절대 반대 자주 독립 만세를 부르며 미소공동위원회 수석대표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수교, 미영사관 반도호텔을 거쳐 조선호텔의 미 대표에 보내는 탄원서를 수교, 이어서 만세와 애국가를 고창하며 행진 중 악귀 인민보 앞에 이르자 매국노 가장 공산당의 주구 인민보에 대한 울분은 폭발 극도의 혈분으로 운집한 대중들과 통분으로 궐기한 일부 학생은 드디어 이 마령에 천벌을 내리고 말았다. 이어서 매국노의 소굴 인민당 서울시인민위원회에서도 민중의 격분은 폭발하였다.

때마침 MP는 권총을 난사하여 곤봉으로 민중을 난타하였으나 우리의 응당할 바 매국노를 소탕하는데 있어서 여하한 제재도 도저히 이를 방지할 수 없었다. 특히 애국심에 불타는 여학생들은 우리의 누차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MP의 난타를 받아 넘어지면서도 애국가를 높이 부르며 남학생과 더불어 최후의 순간까지 투쟁하겠다 하여 우리들의 결심은 익익고조할 뿐이었다.

마침내 우리의 행렬이 서대문 2정목 파출소 전에 이르자 돌연 50여 명의 폭한이 나타나 우리의 순국 행렬에 대하여 장총 피스톨을 난사하며 비열무쌍하게도 우리 여학생들에 곤봉난타를 집중 20여 명은 그 자리에서 넘어졌으나 여학생들은 난타로 피를 토하면서도 被彈하여 쓰러져 가는 동지를 끼어안고 꽉 스크럼을 짜고 독립만세와 애국가를 고창하여 성스러운 행진을 계속할 뿐이었다.

오호! 우리의 성스러운 행진에 대한 가증한 매국노의 불의의 습격, 친애하는 3000만 동포들이여 공정한 심판을 이들에게 내려 주소서. 폭도들은 여학생을 拘致하기 시작하였으나 순국의 투사들은 어깨동무하여 애국가를 높이 부르며 역적군에게 무기 없는 저항을 하면서 그들의 비굴로 끌려가는 것을 목격한 한 남학생은 기선을 取하여 경관에 이를 고하여 우리 용사를 구출하고 주구 2명을 체포하였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이 일군은 학생동맹원, 국군준비원, 해방청년대원, 청년돌격대원 전 50여 명으로 이들은 매인당 金 25원씩 매국노들에 매수당하여 인민당 명령 하에 이 같은 천인공로할 죄악을 범하고 말았다.

친애하는 3000만 동포 여러분!

우리 땅에는 아직도 이같이 후안무치한 가련한 인생들이 방황하고 있다. 그러나 안심하여라.

우리 학도는 우리의 힘으로 삼천리 강산을 찾고야 말 터이니 제형은 오늘날 우리들의 백사불굴의 투지를 여성의 불타는 의기를 역력히 보았을 줄 믿는다. 우리는 이제야 오로지 토지에서 가장 비열하고 간악한 朴憲永을 수령으로 하는 매국노들을 철저적으로 소탕하며 우리의 완전 독립을 전취하겠노라. 우리의 뒤에는 전국 십수만의 남녀 학생과 3000만의 용사가 따르니 우리는 빛나는 태극기 아래 죽음으로써 우리 강토를 찾고야 말 것이다.

피해 상황

입병 환자(世專病院) : 세전생 1명 胸部□管銃創 생명 위독, 이대생 1명 전신 타박상 생명 위독, 양정생 1명 후두부 타박상 혼수상태, 기타 2명

1946년 1월 18일 反託治全國學生總聯盟

전단 1946년 01월 18일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반탁 운동을 찬양하는 것, 반탁 시위대의 인민보와 인민당 습격을 문제 삼지 않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시위대의 피해를 부풀리는 데서 <동아일보>의 작문 실력이 두드러진다. 4명이 "총탄에 중상을 입고 입원하여 응급가료를 받고 있으나 유혈이 심하여 모두 생명이 위독하다"고 했다. 반탁학련 삐라에 중상 4명, 경상 25명이며 입원 환자가 5명이라 했는데 입원 환자 중 총상은 한 명뿐이다. 양쪽 모두 입원한 부상자가 거의 다 죽어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입원도 하지 않은 부상자가 죽어가고 있다고 우길 수는 없을 테니까.

삐라에 나와 있는 MP의 역할도 <동아일보> 기사에는 없다. 50여 명 폭도들이 권총과 장총을 들고 달려들었다면 어째서 총상자가 하나밖에 보이지 않나? 하나 있다는 것도 MP 총에 맞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좌익 폭도들이 일당 25원씩 받고 나왔다는 이야기가 삐라에만 나와 있는 것도 눈길을 끈다. 조그만 근거라도 있는 이야기라면 <동아일보>가 놓쳤을 리 없다. 일당 동원에 대해서는 <동아일보>의 작문력으로도 따라오지 못할 일가견이 반탁학련 측에 있었던 것 같다.

반탁학련은 1월 2일에 14개교 대표 20여 명이 모인 반탁학생준비회에서 결성 방침을 정하고 1월 7일 1만여 학생이 서울운동장에 모여 반탁 학생 대회를 열며 결성한 단체였다. 준비회에서부터 이철승의 주도가 드러나 보인다.

앞서도 인용한 바 있지만 "김성수의 주머니가 바로 이철승의 주머니"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이철승은 김성수의 전폭적 신뢰와 지원을 받은 대한민국 '정치 학생'의 원조다. 1월 7일의 반탁 학생 대회가 열린 상황을 강준만은 김우종의 기록을 인용하며 이렇게 그렸다.

이승만은 비서실장 윤치영을 보내 대회를 격려해 주었지만, 이 대회는 자발적인 집회는 아니었다. 겨울방학 중인데 1만여 명을 모으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서울시내 남녀 중학생들은 학교로 소집되었다. 김우종에 따르면,

"학교에 모두 집합해서 출석 점검을 한 후 4열 종대를 짓고 교사들의 지휘를 받으며 서울운동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아무도 도중에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라. 서울운동장에 가서 출석을 부를 테니까.' 일제시대부터 이미 이런 일에는 익숙해져 있으니까 학생들은 어김없이 아침 8시까지 학교 운동장에 집합해 출발했다. (…) 당시는 중학이 6년제이니 꼬마들부터 지금의 고교생까지 다 함께 모인 셈이다. (…) 영하의 추위에 귀가 얼고 코가 얼고 뺨도 허여멀겋게 핏기를 잃고 있어서 '신탁 통치 결사 반대'를 외쳐도 입은 잘 열리지 않았다." (<한국 현대사 산책 1>, 198쪽)

우익 폭력에 가장 강력하게 대항하던 단체인 국군준비대(국준)가 미군정의 폭력으로 해산당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1만여 학생이 모이는 데는 이철승을 통해 뿌려진 공작금만이 아니라 군정청과 교육계에 대한 극우파의 영향력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조직이 1월 18일 폭력 시위에 나선 것은 이틀 전 개막한 미소공동위원회 준비 회담의 분위기를 흐리기 위해서였다고 보인다. "소련영사관에 질서정연하게 쇄도"할 때의 분위기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삐라 문면만으로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민보와 인민당을 습격해서 MP가 "권총을 난사하여 곤봉으로 민중을 난타"할 때의 시위대는 폭도의 모습이었음에 틀림없다. 반탁학련을 옹호하는 군정청 MP가 진압에 나서야 할 정도였다면.

국군준비대가 무력화된 상황에서 반탁학련의 폭력을 제지하기 위해 나선 것은 학병동맹으로 알려져 있다. 12월 29일 건국청년회의 인민보 습격을 경찰이 방관하다가 국준의 반격을 문제 삼아 국준만 탄압한 것과 똑같은 일이 학병동맹에게 닥쳤다. 19일 새벽 경찰이 학병동맹 본부를 공격, 맹원 세 사람이 죽고 세 사람이 다쳤다. 경찰은 두 명만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습격 후에 장택상 경기도 경찰부장은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작야의 학병동맹 사건 진상은 즉 내가 11시경에 집에 돌아가자 인민보와 인민당이 방금 어떤 테러 단체의 습격을 받고 있는 중이라는 보고를 듣고 곧 무장 경관 10명을 소집하여 인민보를 경호케 하고 다시 시내 각서와 소방대에 비상소집을 명하여 무장 대기하게 한 후 각서로부터 10명씩을 소집하여 우선 트럭 3대로 전시를 경계하였다.

12시 반경에 인사정 파출소에서 경계망에 걸린 3청년 즉 李敏寧(25), 崔武營(26), 白完先(24)을 수사한 결과 다이나마이트와 현금 2만3000원이 발견되어 그들의 거처를 물은즉 학병동맹이라 하므로 무장 경관 45명이 즉시로 三淸町 학병동맹으로 달린즉 권총이 연속 발사되고 있었다. 시간은 오전 3시 반이었다. 할 수 없이 이쪽에서도 권총으로 대응하는 중에 응원경관 300명이 도착하여 이중으로 주위를 포위하고 결사적으로 경관 수십 명이 돌입하여 140명을 검거하였는데 경관 중에 2·3명은 부상을 당하였고 상대편에서는 사망자 2, 부상자 3명을 낸 대사건이었다. 체포한 자들에게 경관에게 발사한 경유를 물은 즉 최초에는 모 단체에서 습격 온 줄만 알았지 경관인 줄은 전연 몰랐다 하며 압수된 물건에는 무기도 불소하다 한다.

민족의 수치인 이러한 테러 단체 숙청에 대한 방침에 대하여 동 張부장은 어떠한 정당 단체를 물론하고 폭력 행위는 금후 목숨을 바쳐 철저히 박멸하겠으며 18일 저녁에 인민보에 600명, 인민당에 400명의 테러단이 각각 습격한 데 있어서 관내 경찰서에서 전혀 알지 못하고 경위하지 못한데 대해서 철저히 관내 경찰관에게 책임추궁하겠다. 그리고 인민보와 인민당 습격 사건에 대한 수사와 진상도 책임지고 탐문하여 일반 시민으로 하여금 금후 안심하고 경관을 신뢰하게 하겠다. (<조선일보> 1946년 1월 20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압수된 물건에 "무기도 불소하다"고 하는데, 무기다운 무기는 칼 몇 자루에 권총 한 정뿐이었다. 거의 비무장에 가까운 140여 명 집단을 진압하기 위해 300여 명 경찰 대부대가 동원되어 사람을 셋이나 죽였다. 용산 참사에 이르는 대한민국 경찰 폭력성의 출발점이다. 인민보와 인민당 습격에 대해서는 경찰에서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이나마이트와 돈을 갖고 있다가 경계망에 걸렸다는 청년들의 정체도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장택상이 기자들과 만날 때는 사망자를 둘로 알고 있었는데, 세 번째 희생자의 죽은 모습을 전하는 한 간호사의 말에서 경찰의 학병동맹에 대한 태도를 역력히 알아볼 수 있다.

의전병원 간호인 談 :
19일 이른 아침의 습격으로 중상을 입었던 학병동맹 부위원장 金星翼은 20일 오전 6시 반 의전병원 8호실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전등도 간호인도 이불도 없는 방에다 간단한 수술만 하고 내버려 두어 오후 7시 신음소리가 대단히 나기에 내가 들어가 보니 물을 좀 달라기에 물을 갖다 주고 나왔는데 오늘 아침 7시에 가보니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구려. 참 가엾습니다." (<서울신문> 1946년 1월 21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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