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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스승'이었고, 죽어서 '깃발'이 된 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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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스승'이었고, 죽어서 '깃발'이 된 님이여!"

[프레시안 books] 김삼웅의 <리영희 평전>

리영희를 아는 이와 그와 무관한 이

그가 묻혔다. 하얀 뼛가루가 되어 흙으로 돌아갔다. 말년에 그의 육신을 짓눌렀던 질고와 병마는 자취를 감추었다.

남은 이들에게는 아쉬움의 크기가 한없다. 한때 이 시대의 사상적 지진을 가져온 저 도저한 의식의 냉철함과 물러서지 않는 용기, 그리고 따뜻한 인간애를 다시 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의식의 자산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에 스며들어 역사의 생명을 얻고 있다. 그 어떤 강하고 무서운 권력자라도 앗아갈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차원이 되어서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리영희, 그는 이 땅에 더는 존재하지 않으나 영원히 존재한다. 그의 삶과 그의 생각, 그의 실천을 따르는 행렬은 끊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였고, 이제 영원히 잠들었으나 또한 한순간도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시대의 파수꾼으로 남아 우리를 견고히 일으켜 세우고 있다.

김삼웅의 <리영희 평전>(책보세 펴냄)은 리영희가 어찌해서 사라질 수없는 존재인지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고인이 된 리영희의 삶이 어찌해서 추도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의 실천으로 환생시켜야 할 사건인지를 절절한 목소리로 증언한다.

▲ <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김삼웅 지음, 책보세 펴냄). ⓒ책보세
"리영희"라는 이름은 이제 우리의 역사에서 "지식인" 그 자체가 되었다. 다시 말해 리영희 이후 우리는 지식인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갖게 되었으며, 그 대답은 지식인을 자처하는 모든 이들에게 자기를 비추는 거울이 된 것이다. 그 거울 앞에 서는 이들 가운데 누군가는 그 거울을 깨버리고 싶을 것이며 누군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깨버리고 싶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가보자면, 그건 단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는 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리영희를 따를 것인가, 리영희와 결별할 것인지를 묻는 일이 된다.

그런 까닭에 김삼웅은 책의 앞머리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아는 자와 그와 무관한 자"로 인간을 분류하는 러시아의 사상가 베르자예프의 말을 인용한다. 그와 다를 바 없이 이 나라에서 현대사의 가파른 질곡을 넘어온 이들은 "리영희를 아는 이와 그와는 무관한 사람"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이로써 리영희는 정의와 양심의 역사를 가르는 경계선 그 자체가 되었으며 그와 한편이 되는가 아니면 그와 대치하는 적군이 되는가로 그 삶의 역사성은 판명되게 되었다.

김삼웅이 쓴 평전이기에…

우선 무엇보다도 <리영희 평전>이 김삼웅의 손에서 나왔다는 것은 매우 다행이자 소중한 일이다. 그는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이며 민족사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 기개 높은 지식인이다. 그의 저술 목록 몇 가지만 들어도 김삼웅과 리영희의 만남이 가지는 의미는 뚜렷하게 새겨진다. <단재 신채호 평전>, <백범 김구 평전>, <심산 김창숙 평전>, <녹두 전봉준 평전>, <안중근 평전>, <약산 김원봉 평전>, <장준하 평전>, <죽산 조봉암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그리고 <김대중 평전>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사가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지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김삼웅은 독립기념관장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친일 인명 사전> 편찬위원회 자문위원, 제주 4·3 사건 희생자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사의 정의로운 정통성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바로 이러한 사실도 함께 떠올리면 그런 그의 시야에 포착된 리영희의 삶은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그려질 것인지 충분히 상상이 갈 것이다.

한길사에서 나온 <대화>가 리영희와 임헌영 사이의 대화 기록을 리영희가 2년을 넘게 손질하고 또 손질하면서 그의 육성이 직접 배어나온 것에 가치를 둘 수 있다면, 김삼웅의 <리영희 평전>은 일반 독자들은 물론이고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을 위해서 특별히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리영희의 인생 역정과 그 철학의 좌표가 다양한 자료를 동원해서 쉽고 간결하게 잘 정리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상웅은 리영희가 루쉰을 스승으로 삼아 쉽고 간결한 문체와 구체적인 증거 및 자료를 통해 진실을 입증해나가는 자세를 우선 주시한다. 김삼웅은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리영희가 거대한 우상 집단과의 진리를 위한 싸움에 동원한 무기는 논증이었다." 여기에는 거짓과 불의에 맞서는 용기는 필수다. 송건호의 증언은 이렇다. "언론인 리영희는 결코 가면도 쓰지 않고 거짓말도 안 한다. 그는 자기가 생각한 대로의 말을 숨김없이 발표하는 사람이다."

우리의 전위이자 후방인 리영희

리영희를 접해본 사람들마다 아는 일이지만 그는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다. 누가 듣고 읽어도 잘못 알아듣거나 잘못 읽을 수 없는 분명한 방식을 선택한다. 그러니 권력은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환갑을 맞이한 리영희에게 고은은 다음과 같이 헌사를 바친다.

"사상의 은사/시대의 선구자/60년대 70년대 80년대 대표적 지성/아 이 한반도의 살아있는 정신/불/얼음/우리들의 전위와 후방"

여기서 마지막 절 "우리들의 전위와 후방이라는 표현이야말로 리영희의 역사적 역할을 정교하게 압축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최전선을 뚫어냈고, 그가 있기에 또한 우리는 든든했다. 그는 진실과 거짓의 싸움터에서 야전사령관이자 후방 지원 부대를 동시에 감당해주었기 때문이다. 김삼웅이 이 평전을 집필하는 시기는 이명박 정부의 악행이 더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이 나라 민주주의의 위기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해진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리영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책 속에 수록한다. 이 발언은 2009년 7월 1일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인권실천시민연대 창립 10주년 기념 행사장 강연의 한 대목이다.

"지난 1년 반 동안 이명박 통치 시대는 비인간적, 물질주의적, 반인권적 파시즘 시대의 초기에 들어섰다. (…) 역사는 이뤄진 열매 위에 또 하나의 큰 열매가 열리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신을 늦추면 언제든지 역전되는 것이다. (…) 현재 이명박 정권의 물질밖에 모르는, 인간이 지향하고 숭배해야 할 가치를 오로지 돈에만 두는, 그리고 인간의 존재 가치가 말살되어가는 이런 정권을 지난 40년의 고생 끝에 받아들인 것은 우리 자신의 책임이다. 이는 우리의 실수이고 개개인의 판단 착오이고 역사의식의 잘못이었다. (…) 짧은 10년이지만 우리가 이룩했던 공민으로서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필사적인 불퇴전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의 그의 날이 선 육성이 쟁쟁하게 들리고 있는 것만 같다.

변방의 인생에서

평안북도 운산에서 1929년에 태어난 리영희의 삶은 한마디로 "변방의 인생"이었다. 인문계 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했던 그는 집안 사정으로 공립학교에 진학했고, 이후에는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국비 장학생 지원이 있던 해양대학에 다닌다. 그러나 이 모든 젊은 날의 시간은 그에게 지적 충족감을 주지 못했으며 전쟁은 그에게 통역장교라는 역할을 맡김으로써 훗날 미국에 대한 정밀한 비판을 가하는 체험을 제공해준다. 변방의 시절이 그를 역사의 중심에 밀어 넣었던 것이다.

그가 군인 시절의 한 일화는 그가 평생을 살아가는데 좌우명처럼 박히는 충격을 준다.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 이후 차려진 진주 기생집에서 2차를 약속한 기생이 사라지자 술김에 격분한 리영희는 그 기생을 찾아가 옆에 찬 권총을 하늘을 향해 발사한다. (그는 명사수로 이름이 높았다.)

리영희는, 총소리에 기겁한 '논개'가 허둥지둥 뛰어내려와 살려달라고 애원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는 툇마루에서 자세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오연히 서서 그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그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내려다보면서 한참 만에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젊은 장교님, 아무리 하찮은 기생이라도 그렇게 흐트러진 마음과 몸으로 만나는 일은 없습니다. 당신들은 진주 기생을 잘못보고 있어요. (…) 젊은 장교님, 잘 들어두세요. 아무리 미천하고 힘없는 사람이라도 총으로 굴복시키려 들지 마세요. 사람이란 마음이 감동하면 총소리를 내지 않고도 따라 갑니다. 당신도 차차 사람과 세상을 알게 될 겁니다. 돌아가세요.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겁니다."

리영희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는 이 기생 앞에서 전 존재가 산산이 무너져 내려 앉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발을 돌려 싸리문을 젖히고 나왔다는 것이다. 총으로 굴복시키는 일이 본업인 군인이었던 리영희는 이후 총이 아니라 펜으로 세상의 양심을 찌르는 언론인이 된다.

그가 언론인이었을 때 놀라운 것은 나이 30대 초반에 <워싱턴 포스트>에 익명의 통신원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훗날 자신의 영어 원고를 읽고는 자신의 당시 실력에 스스로 감탄하기까지 한다.

"그 당시 <워싱턴 포스트>에 보낸 글들을 지금 다시 읽어보면 스스로 감탄한다. 감각과 시각이 건전했을 뿐만 아니다. 영어로 생각하면서 영어로 작성해나간 문장이 놀라운 만큼 좋다."

잠시도 게으르지 않았던 지식인

이후 우리는 그가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비롯해서 권력의 거짓을 밝혀내는 일을 하면서 비판적 지식인의 소명을 다해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언론인에서 교수가 되지만 그는 무수히 되풀이 되는 해직과 투옥, 가난과 건강의 위협 속에서도 현실에 대한 발언을 멈추지 않는다. <전환 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8억 인과의 대화>, <역정>, <스핑크스의 코> 등 그의 글과 책은 끊임없이 화제를 낳았고 정치적 긴장과 지적 충격을 연달아 주었다.

영어와 일어는 물론이고 불어와 중국어에도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는 장 자크 루소의 <참회록>과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원서로 읽어낸 것을 뿌듯하게 여긴다. 잠시도 지적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은 "이성의 불꽃"이었던 것이다.

그런 한평생을 지낸 그도 세월과 늙음과 병마 앞에서 자신의 삶을 거두어야 할 때가 다가온다. "지금까지 살아온 역정에 후회는 없습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 개인으로서는 할 만큼 했다. 1인분이 아니라 2인분의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집사람과 가족에게 너무나 많은 마음의 고통을 안겨줬다." 그런 희생의 대가 위에서 우리는 진실에 눈을 뜨는 소중한 자산을 갖게 된 것이다.

거의 600쪽에 이르는 책을 자기도 모르게 단숨에 읽고 나면 우리는 한 시대의 거대한 사상의 은사가 살아온 역사를 나 자신의 역사로 되새기는 감격을 얻게 된다. 그의 삶을 잘 알고 있는 동시대인만이 아니라 뒤이어 오는 젊은 세대들에게도 이 감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더군다나 독선과 폭력, 그리고 탐욕으로 무장한 이명박 정권이 우리의 현실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마당에 그의 삶을 성찰적으로 되짚어 읽는 것은 우리에게 뜨거운 역사의 에너지가 될 것이다.

리영희, 그는 살아서 우리의 스승이었고 죽어서 우리의 깃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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