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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도 놀랄 '민생 살리기'…누가 '조선의 힘'을 비웃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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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도 놀랄 '민생 살리기'…누가 '조선의 힘'을 비웃나?

[프레시안 books] 이정철의 <대동법 : 조선 최고의 개혁>

새로운 언어의 획득

나는 이정철의 <대동법>(역사비평사 펴냄)에서 두 가지 희망, 역사학의 새로운 현실을 발견했다.

그 하나는 저자가 조선 시대를 자기 문제의식을 수립하고 설명하고 결론 내리는 과정에서 자신의 고민과 밀착되면서도 소화된 언어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과학 담론에 기대고 사료 얼마를 덧붙여 입론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저자 자신의 고민을 밀고 들어가서 보편적인 인간과 제도에 대한 질문을 풀어내는 언어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글쓰기는 그동안 근대주의 역사 해석, 즉 조선 후기를 해체기로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결코 확보할 수 없었던 조선 시대사 연구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망국, 식민지, 전쟁, 분단이 남긴 20세기형 트라우마나 콤플렉스를 발견할 수 없는 글이 근대주의적 조선사 해석의 세례를 받은 역사학자의 손에서 나왔다.

<대동법>에서 보여준 자기 언어의 획득은 저자의 스케일과도 상관이 있다. 그리고 그 스케일은 그동안 역사학자들이 잘 포착하지 못했던, 아니 어느 틈에 목전에서 사라졌던 역할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하면, 저자는 지식인 또는 학자가 사회에 기여하는 몫을 '비판'과 동시에 '책임'에도 두고 있는 듯하다.

비판이 항상 책임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비판이 낭만적 공상과 결합하기 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편, 비판의식이 결여된 책임의 하중은 타협으로 나아간다. 비판이 책임과 만날 때 비로소 우리는 원칙과 형편을 함께 고려하게 된다. 원칙을 통해 기준을, 형편을 통해 현실화를 도모한다.

그간 내가 생각이 있고 고민하는 조선 시대 연구자들에게 아쉬웠던 점은 조선 시대에 대한 비판의식의 과잉이었다. 그 이유는 조선이 빨리 망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비판의식의 외피를 쓰고 사료에 다가갔기 때문이다. 사실 이 비판의식이라는 게 다름 아니라, 이미 조선이 식민지로 귀결되었다는 결과론이었다.

그렇게 해서는 조선 시대에서 보아야만 할 것을 볼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경험 속에서 배우는 것이므로, 봐야할 것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은 기실 역사 연구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대학>을 떠올리다

▲ <대동법 : 조선 최고의 개혁>(이정철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역사비평사
근대인인 우리는 거의 과거에서 경험을 배워오지 않는다. 그런 경험이 인간의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유용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진보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믿으니까. 뒤에 살펴보겠지만, 저자가 강조한 '경험'이라는 열쇳말은 근대 역사학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다.

그런데 비판-책임에 대한 논의에서 더 관심을 둘 사안이 있다. 책임이 빠진 역사 연구자들의 비판의식은 현실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반영한다는, 아니 반영하게 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부분적으로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을 넘어선 냉소)과 결합하면서, 사회와 나라의 경영에 대한 고민과 책임의식을 소홀히 한 것과 상관이 있다. 이 고민과 책임의식을 조선시대 말로 경세(經世)라고 했다. 조선 성리학자들은 우주론과 심성론만이 아니라, 정치 제도와 법률, 경제 정책, 사회복지 등의 구체적인 경세론을 가지고 있어야 온전한 학인이라고 생각했다.

근대주의에 오염된 조선 시대 연구와 함께, 지금 사회에 대한 경세론적 책임의식의 결여 때문에 역사학자는 역사=경험의 연구에서 소외되었고, 일상 용법에서 우리는 학자라는 표현보다 연구자라는 표현을 즐겨 쓰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과 역사를 묻는 학자'에서 '망해가는 조선을 설명하는 연구자'로의 전환, '자신의 삶이 별로 개입하지 않는 직업인으로서의 연구자'로의 전환이 아닐까. 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민주주의의 '건설'로 가는 도정에서 부딪힌 위기이자, 과제가 아닐까.

<대동법>을 읽으면서 갖게 된 두 번째 희망이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저자는 1970~80년대를 이끌어온 역사학자들을 비판적으로 계승한다. 저자의 연구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민주주의의 건설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신뢰가 드는 것은, 그가 그의 저서 전반에 걸쳐 "오늘날 한국 사회의 공적 기능과 사회 문제의 제도적 해결에 대한 희망이 약한 이유"를 묻고 있으며, "(성리학자들은) 자신들이 믿은 성리학 이념을 민생 문제와 관련시켜 고민했다 (…)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정치나 사상을 넘어 생활과 삶의 양식에까지 성공적으로 확장했다"고 하면서, "민주주의는 이제 삶의 영역으로 확산되도록 요구받고" 있음을 알고 이 연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대동법>에서 지식인 또는 역사학자가 스스로 고민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修身) 공부를 통해 나라나 사회의 기능과 제도를 고민하고 민주주의의 실현을 자신의 역사 연구에 밀착시키는 태도와 실천(格物)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내가 <대학>을 떠올렸던 이유이다.

대동법의 위치 또는 스코프

대동법은 조선 시대에서 일어난 가장 큰 정책 변화로 꼽힌다. 하긴 개혁 논의와 실행에만도 100년이 걸린 경우가 인류 역사상 그리 흔하겠는가. 공납제 개혁 논의의 출발부터 보자면 거의 200년이 걸린 사안이다. 이는 어지간한 왕조 하나가 유지되는 시간이다. 이렇게 보면 조선 사람들은 우리가 애써 잊고 있는 귀한 경험을 참 많이 남긴 사람들이다. 조변석개하는 시사(時事)를 보고 있자니, 절로 드는 생각이다.

어느 시대나 국가를 경영하는 데는 비용이 들고, 이를 재정이라고 한다. 재정은 정부를 유지하는 비용만이 아니라, 나라 살림 전반에 걸쳐 소요되는 비용이다. 조선 시대의 재정도 세금을 거두어야 운영되며, 그 세금(賦稅)은 논밭에서 걷는 세금인 조(租), 특산물이 나는 지역에서 거두는 공납(貢納, 調), 그리고 현물의 형태가 아닌 노동력을 제공하는 요역(徭役, 身役), 즉 용(庸)이라는 '조용조'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전체 재정 중에서 공물의 비중이 점차 확대되었다.

이렇게 공납제가 흔들리는데다가 연산군 대에 마구 추가로 거두어들인 공물이 그대로 항식(恒式)이 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해당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공물, 즉 불산공물(不山貢物)의 수취가 더욱 많아졌다. 그 결과 일정한 대가를 받고 생산되지 않는 공물을 대주는 전문 업종, 즉 '방납(防納)'의 폐단이 더욱 늘었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이 복잡해지거나 문란해지면 거기서 죽어나는 것은 소농, 월급쟁이 같은 노동자, 농민, 자영업자 등이다. 이들의 삶이 안정되지 않으면 나라는 유지되기 어렵다. 일차로 대동법은 이 공납제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늘어난 공물, 생산되지 않는 공물을 재조정해야 했다.

거기에 더하여 공납을 현물이 아닌 전세(田稅)로 받자는 정책안이 등장하였고, 이것이 대동법으로 가는 것이다. 이정철의 <대동법>은 바로 그러한 과정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20년 전의 기억

20년 전인 1992~3년 경, 한국역사연구회 17세기 유학사상사반에서 공동 연구를 수행했던 적이 있다. 그때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을 묶어서 맡았던 나는 기존 학계의 연구와 인식에 균열을 내는 몇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는 이른바 '대명의리(大明義理)'였다. 조선 정치가와 학자들이 명나라에 대한 맹목적 사대주의 때문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자초했다는 인식이 그것인데, 당시에는 다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금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인식은 후금(청)의 침략성을 희석시키고 그 자리에 자기 모멸감을 가져다 놓았다. 당연히 그런 인식은 으레 '빨리 조선이 망했어야 하는데…' 라는 비역사적 가정 속에서 조선 시대사 연구가 이루어지는 토양과 심성을 형성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 놀랐던 것은 김장생의 공납제에 대한 논의였다. 서인 산림(山林) 세력인 김장생,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대동법에 반대하면서 소농(小農)이 아닌 지주(地主)의 이해를 대변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동법 시행을 지방 재정과 연관 지어 고민하는 김장생의 논의에 거의 '쇼크'를 받았다.

생각해보면 김장생은 수미법(收米法)을 통해 공납의 폐단을 개혁하고자 했던 율곡 이이의 제자였으므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공납 개혁에 동의하는 게 당연했다. 적어도 이 무렵 조선에서는,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학문과 그에 입각한 정책을 통해 붕당이 형성되고 이어졌기 때문에 기실 이런 관점은 상식이었다. 이런 상식과 사료가 내가 알고 있던 역사 지식과 계속 갈등하기 시작했다.

사계 김장생에게 배운 것

충청도 연산에 살면서 공납의 폐단을 가장 심하게 겪었던 김장생은, 인조 초 삼도(三道) 대동법의 실시에 반대한다. 그는 부자에게 더 거두고 농민의 세금을 줄이는 것, 즉 균등 과세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 공정 과세를 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수단인 양전(量田)이 먼저 실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진왜란 이후 양전이 없었으니, 당연한 개혁의 수순이었다. 그의 공납제 개혁론은 내게 세 가지 궁금증을 남겼다.

첫째 공안개정과 대동법의 관계이다. 공납제 개혁을 위해서는 공안개정과 대동법, 둘 다 중요하다. 공안개정이란 공납을 낼 품목과 수량을 바꾸는 개혁이고, 대동법은 아예 공납을 전세화(田稅化)하여 토지를 대상으로 부과하는 법이다. 흔히 대동법은 개혁, 공안개정은 미봉책,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논자도 있었는데, 특산물을 내는 공납제에서 품목과 수량을 줄이는 게 미봉책일 수는 없다. 그럼 실제로 공안개정과 대동법은 정책적으로 어떤 길항을 겪었는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대동법은 전세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고을 단위로 부과되던 공납제와는 그 부과 대상, 운영 체계를 달리한다. 중앙 집권 국가에서 재정 운영의 근본 체계가 바뀌는 사태였다. 당연히 이는 그동안 공납을 통해 충당하던 지방 재정을 대동법 체제에서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낳는다.

셋째, 이쯤에서 정치 세력들의 공납제 개혁, 대동법 실시에 대한 입장을 가지고 그 정치 세력의 계급성과 진보성을 설명하려던 나의 계획은 사태를 피상적으로 이해한 것이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배워서 알고 있는 역사상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던 때였다.

그런데 대동법은 나의 연구 주제에서 1순위가 아니었다. 그래서 경제사를 하는 동료 학인들에게 이런 관점이나 문제의식을 넌지시 얘기해보기도 했다. 기다린 보람(呵呵!)이 있는지 이제야 <대동법>이란 고마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문제의식이 중요한 이유

우리는 이미 이 책의 심장부에 들어와 있다. 이제 저자의 말을 빌려 이 책의 의미를 들어보자. 저자의 문제의식을 보면 책의 구조와 내용이 보일 것이다. 저자는 기존 연구를 세 범주로 나누고, 각각의 의미와 한계를 정리했다.

첫째, 대동법의 성립 이유와 과정에 대한 연구이다. 그런데 이들 연구는 공납제의 여러 측면들이 고립적으로 설명되었다. 장기간의 공물 변통 과정을 연속적인 흐름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둘째, 대동법을 성립시킨 주체에 대한 연구이다. 기존 연구를 보면 대동법을 옹호했던 사람은 언제나 소수였고 비주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동법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어떻게? 민(民)이 조정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뭔가 일리가 있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 정책은 그렇게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그 논리대로라면 정책 논의의 공적 공간은 애당초 불필요한 것이다.

나아가 호서대동법의 효과가 분명해진 뒤, 초기에 대동법을 반대한 사람들이 찬성으로 돌아서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그 효과에 확신이 없을 때는 주저하게 마련이다. 결국 이미 경제주의적 환원론, 가진 자들은 대동법을 반대하고 가난한 농민은 찬성할 것이라는 환원론에 빠졌기 때문에 공안개정과 대동법의 상관성 등 정책 논의의 핵심 사안은 건드릴 엄두도 나지 않는다.

셋째, 사상사나 경세론의 맥락에서 대동법의 시대적 의미를 묻는 연구이다. 예컨대 부세 제도 개혁론과 토지 소유 개혁론을 '지주 중심 개혁론 : 소농중심 개혁론'의 구도로 놓고, 주자(朱子)-반주자의 구도로 논의하는 방식이다. 우선 사실 수준에서 이런 개혁론의 차이가 주자-반주자의 구도로 나뉘지도 않았고, 대동법에 대한 논의는 항상 토지 소유에 기초한 균등 과세(均等課稅)가 포인트였다.

저자가 보기에, 국가 재정과 전쟁, 혁명, 민란의 연관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타났던 현상이다. 고대 로마의 몰락,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도 이러한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역사적 사건들은 모두 재정과 세금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국가 재정과 세금은 결코 온건한 개혁의 대상이 아니다. (29쪽, 각주1)

<대동법>의 구성 : 제1부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대동법의 계보'에서는 공납제 개혁의 대안으로 대동법이 표면에 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먼저 저자가 대동법의 '기원'이 아니라 '계보'라고 한 데 주목해보자.

'기원'이 최초의 것 속에 이미 이후에 발생할 무엇인가를 내포하고 있다고 전제하는 실체론적 표현이라면, '계보'는 그런 실체론보다는 과정론적 표현이다. 따라서 '계보'는 실체=X로 환원을 반복하면서 해답을 찾기보다 끊임없이 문제 자체에 주목한다. 저자가 '식민지가 되었다는 결과론'에 빠지지 않은 이유도 역사는 과정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방법론이자 관점에 서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1부에는, 공납 관행의 변화, 대동법의 출발, 공안개정과 대동법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장기적으로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전세(田稅)에서 공물로 바뀌고, 공납제의 문제점을 통찰하고 그 개혁을 주장하는 율곡이나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같은 관료들이 생겨났다. 선조 때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세에 대한 국가 재정적 통제가 붕괴되면서 공납제 개혁의 현실적 필요성이 더 커졌다.

실제로 몇 해 농사를 못 지어 농지가 절단 난 것이든지, 짓고 있으면서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안 짓는다고 신고한 것이든지 간에, 재정 수입이 되는 경작지가 줄었다. 양전과 공납제 개혁을 추진해야할 시점이었던 광해군 대에는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의 발의에도 불구하고 광해군 등 정권 담당자들의 반대와 몰이해, 계속되는 토목 공사(궁궐 건축)와 역모 사건으로 점철되어 대동법 시행의 시기를 놓쳤다. 그래서 이 책은 주로 인조 대부터 논의를 시작했다.

제2부 : 획기는 축적에서

제2부에서는 효종대와 현종대의 대동법 논의와 실행을 다루었다. 여기서 우리는 저자가 말한 '경험'의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경험'이란 용어를 정책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특정한 조건들로 구성된 어떤 현실 상태를 의도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어떤 정책이 실시되고, 그 정책 실시가 불러온 의도된 혹은 의도되지 않은 상황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말한다. 특정한 경험은 나중에 유사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상황을 인식하는 일반화된 틀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한 경험은 자연히 '집단적 경험'이자 '정책적 경험'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효종과 현종대의 대동법 성립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들과 그것들의 귀결이 어떤 힘에 의해서 지배되고 유도되었는가"를 탐구한다. 그리고 그 힘은 "다름 아닌 인조대의 공물 변통 문제를 둘러싸고 형성되었던, 또 축적되었던 경험의 힘"이라고 진단했다. 즉, 공물 변통의 집단적 경험 속에서 대동법 성립의 방향과 동력을 추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청나라나 지방 유생들이 대동법 실시에 끼친 영향까지도 염두에 두었다.

제3부 : 공시와 통시의 종합

이러한 통시적 해석과 함께, 제3부 '대동법이 지향하는 진정한 개혁'은 완성된 현실태로서의 대동법을 구조, 개념, 이론의 측면에서 다루었다. 아울러 대동법의 운영과 조선 학자들의 경세론(經世論)에서 나타난 공납제의 위상을 다루었다. 예를 들어, 호(戶)와 토지(土地), 현물과 미포(米布), 제도 개혁과 절용(節用) 등 대동법을 경세론의 맥락에서 설명한다. 1부와 2부가 통시적(通時的) 이해라면, 3부는 공시적(共時的) 접근인 셈이다.

먼저 공물 변통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문서인 '대동사목(大同事目)'을 분석했다. 대동사목은 대동법의 최종 결과이므로, 이를 통해 대동법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를 독해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경험'에서 얻은 대동법의 실제를 다시 대동법을 이해하는 '관점'으로 추상화하고, 그에 기초하여 그동안 17세기 변통론에 대한 학계의 논의가 가졌던 선험성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있다. 저자가 재정 개혁이 차지하는 의미를, 정책이나 사회운동, 경제적 이해 등의 차원이 서로 혼동하지 않는 가운데 제 위치에 놓고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연구 결과였다.

아쉬움 하나 : 진상 공물

이 책에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친절한 자료가 많다. 서문('책머리에')과 프롤로그에서 누구나 함께 조선 시대 대동법 여행에 동참할 수 있도록 안내했고, 연표와 용어 설명, 인명 사전도 핵심적이고 간결하여 <대동법>의 독해에 요긴하다. 사족 같지만, 이런 걸 통해서 나의 불친절한 글쓰기를 반성하게 된 것도 소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 본 게 아닌가 하는 대목도 있고 더 써주었으면 하는 주제도 있다. 공안 개정론 중에서 진상 공물의 개혁에 대한 논의는 좀 더 밀고 나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저자도 이야기 했듯이, 전통적인 공납제 개혁론인 공안 개정론이 더 근원적인 해결 방법인 대동법에 포섭되고, 지양되기 위해서는 합리적으로 공물가 총액이 산정되고 결(結)마다 균등하게 분정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는 대략 현종 연간에 이르러 가능해졌다. 그런데도 공안 개정론은 계속 제기되었다. 왜 그랬을까? 바로 어공(御供)과 진상(進上) 때문이었다. 이 부분이 대동법에 흡수되지 못하고 공물로 계속 남아 있었던 탓이다.

어공이나 진상은 '진공(進供)'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국왕이나 왕실에서 사용할 물품들을 바치는 것이었다. 원래 '공물(貢物)'이 중앙 정부의 수요에 충당하는 공납의 개념이라면, 진상은 지방직에 있는 신하가 국왕에게 예물로 바치는 '예헌(禮獻 : 예의로 바치는 선물이라는 관념)'에 기초해 있다. 이때 과일이나 생선 등의 식품(物膳), 활이나 환도(環刀), 꿀이나 인삼 따위의 약재가 그 예물이 되었다. 대략 품목은 320종 정도였고, 그 양을 공물가로 치면 2만 석 정도였다.

게다가 진상 공물은 품질이 우수해야 했으므로 품질 검사(點退)가 엄격했고, 그에 따라 비리가 횡행해 백성들의 고역이 되었다. 당연히 방납도 가장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현종 연간에 송시열이 대동법 실시 및 확대를 주장하면서도, 대동법에 포섭되지 않은 어공과 진상 부분 때문에 공안 개정론을 계속 견지한 것이다.

이런 송시열의 주장은 허적(許積) 등의 반대에 직면했다. 이는 경각사(京各司) 회계를 잘 몰랐던 송시열과 관료 출신 허적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진상 공물에 관한 한 송시열의 지적의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진상 공물의 정점에는 왕실(王室)이 있었다. 대동법 연구의 연장에서, 정책과 제도사 연구의 지평을 위해서도 이 부분이 차후에 검토되었으면 한다.

아쉬움 둘 : '왕안석과 같다는 말'

제2부에 별도의 칸을 만들어 왕안석을 설명한 대목이 있다.(226쪽)

"조선 시대에 안민과 국가 재정의 관계는 어떤 면에서 오늘날 경제적 성장과 분배, 개인적 자유와 공동체적 공정성 등의 상징적 관계를 연상케 한다. 이들 대립항에서 현재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앞쪽의 가치를, 그렇지 못한 사람은 뒤쪽의 가치를 옹호하는 경향이 있다. 국가 재정과 안민의 관계는 원칙적으로 대립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그럴 수도 없다. (…) 오늘날 대립항의 앞쪽 가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뒤쪽 가치에 대해서 '좌파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선 시대에 상대를 '왕안석과 같다'고 몰아붙이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런 저자의 견해는 '안민(安民)과 국가 재정의 관계'를 '경제적 성장과 분배, 개인적 자유와 공동체적 공정성'의 관계로 놓은 데서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안민은 분배나 공동체적 공정성과 가깝지, 안민(요즘 말로 노동자, 농민 생활의 안정)이 성장-개인적 자유(요즘 말로 시장주의)와 짝을 이루지는 않는다. 왜 이런 실수를 저자가 저지른 것일까? 아마도 삐끗한 이유는 왕안석에 대한 저자의 선입견, 아니 학계의 선입견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흔히 왕안석 연구의 권위자라고 하는 제임스 류 이래로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진보적 개혁으로(저자의 말에 따르면 '좌파적'으로) 사마광(司馬光) 등을 구법당(舊法黨)이라고 불렀다. 명칭 자체가 '구'법당이니 당연히 우리에게는 '보수 진영'으로 각인되었다. 이런 선입견 때문에 저자는 왕안석은 '좌파적' 개혁가로 놓고 '국가 재정-분배-공동체적 공정성'의 짝을 맞춘 듯하다.

그러나 제임스 류는 송대 성리학자들의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태도를 잘 몰랐기 때문에 왕안석의 정책에 대한 당시의 논란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주자(朱子)는 왕안석의 청묘법(靑苗法)에 대해, "청묘법은 (…) 백성들에게 곡식이 아니라 돈을 지급하며, 처리 단위가 현(縣)이지 향(鄕)이 아니다. 그 자리에 관리를 임명하지 지역 사회의 사군자(士君子)를 임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 읍에는 시행할 수는 있지만, 천하에 시행할 수는 없다"고 비판했다. (<朱文公文集> 권79, '婺州金華縣社倉記')

주자에게 '현(縣)'은 중앙 정부의 연장이자 국가 권력의 표현이었다. 곡식이 아니라 돈을 지급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돈은 국가에서 통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역시 국가(이 경우는 중앙 집권 국가) 중심의 해결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주자는 시폐(時弊)를 국가 중심으로 해결하려는 시도, 즉 지역(향촌, 마을)의 자발성에 기초하여 해결하지 않는 시도를 거부하였다. 왕안석의 개혁은 곧 국가 권력의 강화, 법제의 강화를 의미하였고, 패도(覇道)로 가는 길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자나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근대 학자들보다 '국가'에 훨씬 덜 포섭되어 있었다. 사유나 존재 두 측면에서 모두 그랬다. 유가(儒家)는 늘 제도를 말하지만 그보다 앞에 두는 것은 인간의 자발적 동력이다. 이것이 유가가 문명(文明) 일반을 대하는 두 측면이다. 좀 더 두고 논의할 사안이지만, 조선 시대 관료들의 출사(出仕 : 관직에 나아감)에 대한 열망 또는 사회적 책임감이 국가주의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재지 기반도 그렇고, 이념적 지향도 그렇다.

나라=왕조는 사회의 안정을 위해 자신들이 책임을 져야할 대상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관리의 대상, 견제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 긴장성을 놓치면 우리는 근대 국민국가의 전일성(專一性)에 포섭된 채, 아니 그 획일성을 내면화한 관점으로 왕안석을 '진보적'이라고 평가할 것이다. 늘 국가 제도가 공정한 것은 아니며, 또 제도가 공정하게 만들어졌다고 해서 공정하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포식성의 측면에서 볼 때 근대국가는 더 심하다.

나가며

공부를 할수록 학문을 업으로 하고 사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나는 학문은 다수결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때이다. 어떤 견해가 유행하거나 다수라고 해도 소수의 견해가 무시될 수 없고, 무시되지도 않는다. 학문만이 아니라, 사회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둘째, 학문은 항상 이기게 되어 있는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 때이다. 다른 학자들의 연구와 고민을 통해, 미처 보지 못한 인간과 사회의 모습을 발견하고 깨달아 가다보면, 어느덧 그런 연구가 소중하게 느껴지고, 그런 연구를 소중하게 느낄 줄 아는 내가 대견하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이 연대감에 삶이 새삼 뿌듯하게 다가온다.

이번에 <대동법>을 읽으면서 다시 들었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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