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을 거슬러 북간도로 올라갔다가 다시 한강까지 내려온 조정래는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된다. 그 사이 무척 달라진 모습을 한 서울 한복판에서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소 난데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춤추는 자들의 몸짓이 뭔가 서투르면서도 독특했다. 이런 춤을 본 적이 없던 그는 자기도 모르게 춤판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공중 어디선가부터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느다라면서도 견고하게 보이는 줄이 춤꾼들의 머리와 팔 그리고 다리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이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처럼 생긴 허수아비였다. 서양식으로 말하자면 목각 인형 마리오네트가 줄에 매달려 춤을 추는 격이었는데, 그 춤을 추는 허수아비의 표정은 한결같이 웃음을 짓는 근육이 애초부터 제거된 인상이었다. 더욱 기이했던 것은 이 허수아비들이 춤을 출 때마다 하늘에서 돈뭉치와 돈다발이 떨어지면서 춤판에 모여든 구경꾼들이 그것 잽싸게 집어 들고는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었다. 구경꾼들의 차림도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구경꾼들 밖으로는 접근금지 울타리가 둘러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서는 지점에 아무도 모르게 투명한 거울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거울에 이들 구경꾼들의 이름이 언뜻 언뜻 비쳤다. 정치인, 공직자, 판검사, 교수, 기자…. 춤판이 길어지면 질수록 이들 구경꾼들도 허수아비를 닮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눈은 허수아비의 춤이 아니라 그 춤을 조정하는 줄과 그 줄이 요동을 칠 때마다 낙하하는 물건에 잔뜩 집중되어 있었다. 이 광경을 유심히 보던 아까의 그는 입을 꽉 다물고 붓을 들기 시작했다.
그가 써나간 첫 다섯 글자는 이랬다. <허수아비춤>.
우울한 사회의 자화상
▲ <허수아비춤>(조정래 지음, 문학의문학 펴냄). ⓒ문학의문학 |
돈 앞에 힘쓸 장사가 있을까 싶게도, 하나하나 그 앞에서 쓰러지는 광경을 또박 또박 기록하는 조정래의 작품에서 우리는 욕망이라는 전차를 타고 질주하는 우리 모두의 진상을 목격한다. 일광그룹의 남회장은 사법 조치를 당한 이후 자신을 떠받쳐줄 한국 사회의 주류 집단의 그물망을 치밀하게 짜들어가는 작업을 벌인다. 거기에 동원되는 자들이 이 작품의 중심 인물이다. 회장 앞에서 인생의 승부를 건 윤성훈, 일류 기업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태봉그룹에서 로비 조직을 만든 경력이 있는 박재우, 그리고 미국 명문 대학 박사 학위를 가진 강기준은 회장의 손가락 하나로 허수아비춤을 필사적으로 추는 자들이다.
그들이 이 춤을 추는 까닭은 딱 하나다. 돈으로 회장 못지않은 황궁을 짓고 천년만년 살겠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광그룹과 남회장의 안전과 위상을 최고로 보장해줄 인맥형성이 필수적이다. 권력과 금력의 VIP를 우군으로 만드는 지상의 과제를 위해 이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인간관계 모두를 하나하나 타락시켜 나간다. 악마와 손을 잡은 자들의 간계에 기꺼이 넘어가는 자들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이웃이기도 하고 먼발치에서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는 자들이기도 하다.
모두가 허수아비를 닮아가지만
그러나 이들 모두는 날이 갈수록 허수아비 신세가 되어간다. 돈을 쥔 자 앞에서 이들은 유통기간이 정해져 있는 소모품이며 제 가락을 잊은 채 돈 가락에 장단을 맞춰 춤추는 노예일 뿐이다. 그러나 그걸 깨닫기에는 돈이 주는 위력은 너무 강하다. 윤성훈은 사마천의 <사기>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자기보다 열 배 부자면 그를 헐뜯고, 자기보다 백 배 부자면 그를 두려워하고, 자기보다 천 배 부자면 그에게 고용을 당하고, 자기보다 만 배 부자면 그의 노예가 된다. 그러니 자본주의에서야 더 말해 뭘 해?"
이런 현실에서 교수 허민 같은 이는 세상 물정 모르는 인간이 된다. 기업인의 부도덕성을 질타한 칼럼 하나로 그는 교수 자리에서 떨려난다. 그의 칼럼을 실은 신문사도 곤욕을 치른다. 허민을 위해 나설 교수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건 자기 미래를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몰랐던 자의 비극일 뿐이다. 세상은 철저하게 돈 가진 자들의 편이다. 그들과 적이 되는 순간, 교수고 기자고 공직자고 뭐고 없다.
이후 허민은 '경제민주화실천연대'라는 이름의 시민단체의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린다.
"이 세상에서 생산되는 먹을거리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고루 나누어 먹고도 남는다. 그러나 부자들의 욕심을 채우기에는 모자란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다. 그 끝도 한도 없는 부자들의 탐욕을 방치하면 결국 이 사회는 망할 것이다. 그들의 탐욕을 막아야 한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 일반 대중인 우리들이다. (…) 모든 시민단체들은 지금 활짝 문을 열어놓고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다."
검사 출신의 변호사 전인욱은 이 시민단체의 대표로 추대된다. 나이도 젊고 명성도 아직은 약하지만 그런 이들이 있어 이 사회의 타락의 속도와 범위는 일정하게 저지된다. 하지만 이들의 적은 생각 이상으로 강하고 교활하며 또한 집요하다. 한국 사회의 도덕성을 지켜내는 마지막 보루도 이들의 계략에 잘못 걸리면 이른바 "한방에 간다." 뿐인가? 검은 돈의 로비조직을 움직이며 허수아비춤을 추던 자들은 더 큰 욕망의 길이 열리면 언제든 그리로 달려간다. 남회장과 윤성헌의 손발이 되었던 강기준은 어느 날 일광에서 거성으로 옮긴다. 욕망이라는 전차는 이런 자들을 싣고 언제든 출발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거센 탁류 앞에서
조정래의 <허수아비춤>을 다 읽고 나면 우리는 우선 삼성을 떠올린다. 그러나 어디 삼성에만 한하는 이야기인가? 이 나라가 지금껏 살아온 방식의 밑바닥에 흐르는 탁류 전체가 여기서 드러난다. 명분으로는 수질 개선을 위한다며 개천을 뒤집고 강을 헤집는 작업 자체가 이미 탁류의 물길을 더 크게 확장하기 위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눈치 채고 있는 것처럼 조정래는 우리에게 더는 속지 말라고 말한다. 속는다는 것은 노예가 되는 길이므로.
허민이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한 이유가 된 칼럼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이번에 일광그룹이 일으킨 사건의 내용을 국민들은 똑똑히 알아야 한다. (…) 따라서 그 아들은 세금 겨우 20억을 내고 매출 200조에 이르는 대그룹의 재산권과 경영권을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 이 사태는 무엇을 말하는가. 국가의 모든 권력이 재벌의 손아귀에 들어가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 긴 인류의 역사는 말한다. 저항하고 투쟁하지 않은 노예에게 자유와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데 노예 중에 가장 바보같고 한심스런 노예가 있다. 자기가 노예인 줄을 모르는 노예와, 짓밟히고 무시당하면서도 그 고통과 비참함을 모르는 노예들이다. 그 노예들이 바로 지난 40년 동안의 우리들 자신이었다. (…) 국민, 당신들은 지금 노예다."
이 글을 읽은 윤성훈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이랬다. "요런 빌어먹을 놈이!" "이 빨갱이 새끼를 당장 그냥…" "이 쳐 죽일 놈이 감히…" 이게 이들 돈으로 권력자가 된 자들의 인식이다. 결국 이들은 돈으로 이 사회를 타락시키고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자들을 "쳐 죽이고" 싶어 하고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돈을 자기들의 안전을 지켜줄 욕망의 입 속에 마구 던져놓는다. 이런 걸 문제 삼는 자들은 모두 "빨갱이 새끼들"이고 "빌어먹을 놈"이며 "감히"라는 시선 아래로 내려다보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더는 분노하지 않을 것인가?
조정래의 <허수아비춤>은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쉽게 망각하고 더는 분노를 느끼지 않으며 어느새 그게 세상 돌아가는 방식이지 뭐하고 간단히 체념하는 이야기를 단숨에 고구마 줄기 뽑듯 꺼내들고 "자, 봐라 이래도 계속 잠자코 있을 테냐? 이들이 정말 우리들이 상전으로 떠받들어야 할 자들이냐? 이들을 상전으로 모시고 우리 모두를 노예로 만들고 있는 자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호의호식하는지 눈감고 지내도 과연 좋은 거냐?"라고 매섭게 다그치고 있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내내 독립 영화 <계몽영화>를 떠올렸다. 일제로부터 3대에 걸친 기득권 세력으로 지내온 한 가족의 역사적 자화상을 그려낸 흥미로운 작품이다. 그 영화의 한 장면에 이런 풍경이 등장한다. 1931년생인 아들이 1965년 어느 날 "국제중앙다방"에서 한 여성과 데이트를 한다. 그는 다방 이름이 정말 좋지 않으냐고 말한다. 더는 반도 땅 구석에서 지내는 것이 아니라 "국제"를 지향하고 변두리가 아닌 중앙의 주류로 사는 욕망에 걸 맞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글로벌 허브 카페"다.
그리고 그는 당시의 첨단 식품 라면과 명품 백에 해당하는 티파니 반지를 그 위에 올려놓고 여자에게 프러포즈 선물로 바친다. 지금의 시선에서는 우스꽝스럽지만, 당시의 조합으로는 최고의 기획이다. 국제중앙다방에서 라면과 티파니로 계급 상승을 꿈꾸는 여인의 마음을 낚아챈다. 아니던가? 우리 사회 전체가 바로 이 욕망을 향해 지난 세월 달려왔으니 말이다.
금박을 입힌 시대의 강도 귀족
마크 트웨인은 남북 전쟁이 끝난 이후 미국의 1860년 이후 독점자본이 등장하면서 거대한 부를 움켜쥐는 현실을 보고 "금박을 입힌 시대(the gilded age)"라고 일갈했다. 겉으로는 금박을 씌웠지만 노동자들과 일반 서민들의 삶은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풍자였다. 우리의 조정래 또한 다르지 않다. 모두가 제각기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돈줄에 매달려 추는 허수아비춤에 불과한 이 시대의 비극을 정면으로 응시하라는 것이다.
19세기 말, 미국 캔자스 농민들은 자본가들의 탐욕으로 농민들이 희생되고 가난에 몰린 현실을 겪으면서 이들 독점 자본가들을 "강도 귀족(the robber barons)"이라고 불렀다. 귀족이 없는 미국에 돌연 나타난 귀족들. 그러나 그들의 진정한 정체는 강도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그와 얼마나 다를까? 조정래의 속담 인용대로 "돈이면 처녀 불알도 산다"는 신념으로 사는 자들이 모든 권세를 한 손에 쥐고 강도를 보호해주는 자들의 힘으로 이 사회를 움직이고 있다면 우린 영락없이 강도당하고도 아무 소리 못하는 자들이 된다.
진보 언론조차 건드려서 좋을 것 없다는 식으로 피해가는 현실의 모순 앞에서 민주주의의 실체를 다시 묻고 있는 조정래의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들은 어느 날 허수아비춤을 추던 자들의 잔해가 역사의 폐품처럼 널린 시대를 꿈꾸게 될 것이다. 힘겹게 태백산맥을 거쳐 북간도로 올라가 아리랑의 슬픈 가락에 몸을 적시고 한강까지 내려온 그 길고 오랜 여정이 허수아비의 어리석은 춤사위 하나로 망가질 순 없다.
조정래의 "허수아비춤", 이 말은 우리에게 "너는 지금 무슨 춤을 추고 있느냐?"라고 묻는 이 시대의 화두다. 영혼을 팔아 껍데기만 남은 허수아비춤을 추게 하는 그 요사스런 줄 하나 끊지 못하면 우린 여전히 노예의 후예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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