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석수가 아니라 득표율로 하면 사정은 좀 나아진다. 지역구 득표율로 보면, 45.5% 대 43.9%%다. 비례대표 득표율로는 48.2% 대 48.5%다. 막상막하의 구도인 셈이다. 이는 18대 총선에서 드러난 57.5% 대 37.6%의 구도에서 많이 나아진 것이다. 이처럼 의석수가 아니라 득표율에 방점을 찍으면 좀 위안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라도 대선에 던지는 표와 총선에 던지는 표가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총선에서의 득표율을 그대로 대선 프레임으로 의제하거나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
정치나 선거에서는 구도 못지않게 흐름(trends)도 중요하다. 지난해 10월의 서울시장 재선거에서 표출된 민심을 생각하면 야권이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 놓았다. 당시 시장 선거에서의 후보별 득표율을 48개 지역구로 나눠보면, 무려 41개 지역구에서 야권이 우세를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 보수는 16개 의석을 차지했다. 그러니 흐름으로 보면 보수가 하향세를 저지하고 상황을 반전시킨 것만큼은 분명하다.
작년 10월에 진보 우위의 흐름이 형성된 것은 '안철수 효과'에 힘입은 바 적지 않다. 안철수에 의해 지지율이 미미하던 박원순이 일거에 1위 후보로 부상했다. 박원순이 낙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그가 야권 단일후보가 됐던 것과 안철수의 공개적 지지가 그것이다. 그 안철수가 이번에는 '엉뚱한' 행보를 했다. 현 집권세력의 확장을 거부하면서 진보 진영에 힘을 실어줬던 그가 이번에는 '나 홀로' 독자행보를 했다.
"진영논리에 기대지 않겠다." 안철수의 언급이다. 이 언급대로 그는 여야 모두로부터 거리를 두고 누구도 돕지 않았다. 정당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찍으라는 말도 했다. 맥락상 야권에서 불리한 멘트였다. 이번 선거에서의 공천경쟁에서 야권이 밀린 점도 있지만, 대개 어느 나라든 인물 투표(personal vote)로 가면 보수에게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야권은 인물보다 정책적 차별성이나 선명한 단일 전선을 구축할 수 있을 때 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얻는다.
안철수가 이번 선거에서 야권에게 끼친 손해는 그것보다 그의 스탠스에 있다. 선거에 출마하지도 않은 사람이 많은 사람의 관심을 계속 끄는 것은 출마자에게 손해를 야기한다. 그가 대체로 야권에 가까운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존재감 과시는 그것 자체로 야권의 위상을 흔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한쪽에서 박근혜가 초점을 독점하고 있던 차에, 안 그래도 야권에서 유력 대권주자가 없어 불안한 데 더해 무대 밖에 있는 사람이 계속 관심을 끌었으니 야권에 대한 관심도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전에 특정 진영을 지지했던 사람이 이번에는 그런 언행을 애써 자제한다면 그것은 사실상 이탈이나 지지 철회에 다름 아니다. 안철수가 이번에 선택한 행보는 그런 대중적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총선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활동에 나선 것이나, 전에 지지했던 진영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스탠스는 가뜩이나 혁신 없는 담합으로 눈총받던 야권에게 심각한 손실을 야기했다. 그의 본의가 무엇인지 촌탁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 의도에 상관없이 구도 상으로는 야권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뉴시스 |
어쨌든 이번 총선의 결과는 안철수에게 운신의 폭을 넓혀주었다. 여권에게 향하던 대중의 분노는 옅어진 반면, 야권에게 쏠리던 불만은 오히려 늘어났다는 점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상승세를 '오만한 무능'으로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다시 안철수에게 기대를 거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승리했더라면 야권은 안철수를 쳐다보기보다는 자력으로 이기는 그림을 그리려 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야권의 패배는 안철수에게 기회의 창을 열어주고 있다.
망외의 소득인지 몰라도 그에게 또 하나의 호재는 문재인의 부진이다. 문재인이 비록 부산·경남에서 야권이 의미 있는 득표율을 기록하는 성과를 낳았다고 하더라도 기대만큼의 바람을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이번에 야권연대가 부산에 얻은 정당 득표율 40.2%는 18대 총선에서 진보 진영이 얻은 24.1%에 비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17대의 45.7%에는 못 미치는 것이다. 지역구 득표율로 보면, 50% 대 39.3%다. 이 정도 성적으로는 '문풍'이 불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와 별개로 만약 그의 정치적 러닝메이트로 출마한 문성근 후보라도 당선됐더라면 조금 더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야권이 전략적으로 집중했었어야 할 대목은 부산·경남(PK)을 영남권 블록에서 떼어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수당이 되는 데도 필요하지만 12월의 대선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선을 눈앞에 둔 총선이고, 충청 출신의 어머니를 둔 데다 세종시를 지켜낸 박근혜가 등장했으니 충청에서 야권의 손실은 불가피했다. 야권에 충청 출신 대권 주자조차 없어 이런 손실을 막은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그 결과 새누리당은 18대 총선에서 24개 의석 중 1석에 불과했으나 이번에는 25개 중 12개를 차지하는 충청권 성적을 냈다.
이런 점은 사전에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니, 야권연대에게 PK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엄중했다. 그럼에도 PK를 하나의 선거단위로 운영하는 데에 문재인은 실패했다. 게다가 정수장학회 문제 등을 거론하며 섣불리 박근혜 대 문재인의 대결구도를 조성하는 오류를 범했다. 대선 후보로 박근혜를 지지하나 이번 총선에서 야권을 지지할 의사를 밝힌 15%~20% 가량의 유권자들이 이 구도로 인해 여당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또 지나치게 노무현 프레임에 갇혀 사회경제적 이슈나 계층적 담론을 통해 지역정서를 흔드는 데에도 실패했다. 반추하면 참 아쉬운 점이다.
문재인의 부진 또는 정체는 안철수에게 기회다. 그는 문재인처럼 PK 출신인데다 수도권에 강하다. 이번 선거에서 수도권에서 그나마 야권이 승리한 것도 안철수에게는 기회요인이다. 수도권의 정서를 대변할 수 있는 한편 PK를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안철수는 야권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최적의 후보다. 최적이란 사실에는 그가 야권의 최대 기반인 20~30대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고 있다는 점도 더해진다.
총선 결과가 안철수에게 득도 안겼지만 실도 줬다. 이번 총선 결과 여권에선 박근혜가 대세를 넘어 거의 유일한 후보가 됐다. 그런 점에서 여권에서 안철수에게 손짓할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같이하거나 제휴할 진영으로는 야권밖에 없다. 그런데 그 야권이 패배하는 걸 안철수는 수수방관했다. 아니 어쩌면 방조하거나 해를 끼쳤다. 따라서 무임승차 논란을 넘어 반감마저 낳을 수 있다. 기성 정치권과 거리를 두는 독자적 행보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긴 했으나 결국 같이 가야 할 진영을 서운하게 만들었다. 이건 쉽게 극복될 수 없는 큰 부담이다.
안철수가 만약 박원순 모델, 즉 시민후보로서 정당후보와의 단일화를 거쳐 야권 단일후보가 되겠다고 한다면 그건 적절치 않아 보인다. 양대 정당의 하나인 민주통합당이 자당 대선후보가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설사 단일화 경선을 하더라도 이미 정점에서 떨어지고 있는 안철수의 인기를 감안할 때 단기필마로 정당을 이기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의 박원순처럼 다른 인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도 난망하지 않나.
따라서 안철수에게 남은 길은 하나다. 지금부터 야권의 재구성에 주요 행위자(major actor)로 참여하는 것이다. 새누리당이 보수의 결집체로 기능하는 것처럼 민주당이 진보를 담는 그릇으로 자리잡지 못하면 누구라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재편의 과정에 빠져 있으면서 그 진영의 지지를 받는 후보가 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만에 하나 그렇게 해서 요행히 승리하더라도 성공하는 대통령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안철수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흔히 대표 없는 참여 없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않는데 누가 참여할 동기를 얻겠는가. 빗대 보면, 기여 없는 보상도 없다. 혼란을 수습하고, 새롭게 정리되는 과정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은 채 대선후보직이란 보상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안철수가 지금 추구해야 할 것은 자리가 아니라 역할이다. 그의 선택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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