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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킥> 세경의 눈물…'현실은 시트콤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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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킥> 세경의 눈물…'현실은 시트콤이 아니야!'

[모 피디의 그게 모!] 메타 드라마 <지붕킥>

열 아홉 모 - 피그말리온

기분 나빠.

세경(신세경)의 시간이 지훈(최다니엘)과 함께 흑백의 2인 숏으로 멈춘 순간, 마음을 퍽치기 당한 기분이었다. 이게 뭐야. 정말 너무, 너무 기분 나빠.

이게 드라마야 시트콤이야

<지붕 뚫고 하이킥>을 두고 칭찬으로 쓰이던 이 질문은 마지막 회가 방송되자 비난의 상징이 되었다. '시트콤', 즉 상황과 캐릭터의 코미디란 장르의 규칙과 시청자의 기대를 무참히 배반하고 슬프고 무섭기까지 한 이야기를 감독 마음대로 풀어버렸다는 것이다. 4각 멜로의 '드라마'에 기대를 걸던 시청자들에게도, 그동안 쌓아올린 개연성과 기대되는 결말을 무참히 끊어버린 어처구니 없는 플롯이라는 비아냥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 작품은 드라마도 시트콤도 아니었다. 위의 질문은 이 작품의 성격을 표현하는 데에는 가장 적확한 문구 중의 하나지만,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는 가장 어리석은 질문 중의 하나가 되었다.

▲세경(신세경)의 시간이 지훈(최다니엘)과 함께 흑백의 2인 숏으로 멈춘 순간, 마음을 퍽치기 당한 기분이었다. ⓒMBC

오늘은 여기서 끝나는 건가 - 메타 드라마

<지붕 뚫고 하이킥>은 메타 드라마였다. 일반적인 드라마가 하나의 세계를 이야기 안에 적극적으로 모방하여 온전하게 담는 데에 관심이 있다면, 메타 드라마는 그것이 만들어진 허구의 세계라는 것을 감추지 않는다. 대신 매체 자체의 가능성을 성찰한다. 이 형식은 극의 구성 요소가 픽션을 위해 모인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며 그 구성 요소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 안에 작가의 관심이 어떻게 담기는지, 수용자는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포괄적으로 생각하여 픽션을 해체하고 픽션 밖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들까지를 담아낸다. 전통적인 작품이 그 자체의 훌륭한 플롯을 통해 전달되는 재미와 감동을 목표로 한다면, 메타 드라마는 작품 안팎의 상호작용까지를 중개하여 전통적 감상을 배반하며 스스로의 외연을 넓혀간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 회 이전까지의 <지붕 뚫고 하이킥>의 주제는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일 것이다. <지붕킥>의 세계는 늘 장르적인 균열을, 메타 드라마로서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준혁과 세경의 눈물의 감정 씬 바로 다음 컷으로 현경이네 집의 외경이 붙으며 늘 나오는 켱쾌한 코미디 음악 코드가 깔릴 때를 생각해보라. 우리는 이것이 시트콤임을 항상 새롭게 자각해야 했다. 웃음 효과가 깔릴 때조차 우리는 그 효과 때문에 더 강해지는 신애나 세경의 서글픈 상황을 인지해야 했다. 특히 보석이 친구로부터 '와우와우와우왕'이라는 방송 음향 효과를 휴대폰에 담아 와, 가족들이 우스꽝스런 상황에 처할 때마다 옆에서 틀던 일화는 아예 TV의 경계를 깨버린 <지붕킥>만의 백미였다. 순재에게 쫓겨 식탁 밑으로 숨은 보석이, 다가오는 순재의 목소리를 들으며 '오늘은 이렇게 끝나는 건가'라고 중얼거리는 시점에 정지 화면이 잡히고 엔딩 음악이 흐르면서(사실 에피소드가 끝난 것이 아니었는데!) 시청자들을 깜빡 속였던 에피소드는 이 극의 메타적 가능성을 극대화한다. 이 순간의 보석은 이 작품의 출연자이자, 동료 출연자들의 상황에 음향 효과로 주석을 다는 제작자이자, 당일 이야기의 마무리를 예상하는 시청자였다. 어느 하나의 정체성으로 담을 수 없는 <지붕킥>의 이 같은 경계성은 열혈 팬덤을 낳았고 급기야 4각 멜로를 두고서는 그 어느 멜로 드라마도 이끌어내지 못했던 열광적인 '멜로 라인 별' 응원군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서 마지막 회에 가서 이 모든 열광들과 쌓아오던 주제를 '당혹스럽게' 혹은 '기분 나쁘게' 깨버린다.

▲ 마지막 회 이전까지의 <지붕 뚫고 하이킥>의 주제는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일 것이다. ⓒMBC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 - <신세기 에반게리온> 주제곡 가사.

우리는 이 같은 과정을 전에 벌써 본 적이 있다. 1995년 일본 TV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소심한 14세 소년 신지가 거대 로봇 에반게리온의 조종사가 되어 지구를 습격하는 정체불명의 생명체와 대결한다는 이야기, 라고 사람들은 모두 생각했다. 거대 로봇과 미소녀가 등장하는 이 애니메이션에 일본의 로봇물 팬들은 열광했고 인류의 운명을 예언하는 듯 한 철학적 세계관에 수많은 팬들이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이 애니메이션은 점점 주인공 신지의 심리적 갈등을 표현하더니, 아예 이야기를 뒤엎어 버린다. 전투와 전쟁 플롯을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신지에게 마음의 감옥에서 나와야 한다는 심리 치료를 하는 듯한 장면으로 끝을 내버린 것이다. 이야기의 결말을 원했던 시청자들은 크게 당황했고 열광적인 요구로 인해 감독인 안노 히데야키는 극장판까지 만들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주제는 한결 같았다. 쌓아올린 세계의 파괴. 신지의 성장 촉구. 극장판의 마지막 대사는 이것이었다. '기분 나빠'.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총감독 안노 히데야키의 의도는 '오타쿠 들에게 각성을 요구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애니메이션의 세계에서 나와 현실을 보라는 것이다. 스스로 애니메이션의 심각한 오타쿠였던 안노는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성공을 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나친 애니메이션 중독은 오히려 인생을 망가뜨린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충격 요법을 쓴다. 오타쿠들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놓은 후, 그 세계의 허구성을 폭로하겠다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내, 인류의 속성을 보완해야 한다는 '인류 보완 계획'이라는 소재는 현실에서 오타쿠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오타쿠 보완 계획'의 직유가 되었다. 그렇게 <에반게리온>은 자신의 충실한 시청자들까지 플롯의 일부로 넣어, 애니메이션에 대한 자성과 현실 자각을 버무린 메타 드라마이자 업계 사람들이 향후 20년은 먹고 살 수 있는 밑천을 제공한 초대형 히트작으로 자리매김했다.

▲ 1995년 일본 TV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 애니메이션은 점점 주인공 신지의 심리적 갈등을 표현하더니, 아예 이야기를 뒤엎어 버린다. ⓒ프레시안

Cuzz you are my girl - <지붕 뚫고 하이킥> 엔딩곡 가사.

한편, 김병욱 감독은 안노 히데야키와는 조금 다른 길을 간다. 안노 히데야키가 자신의 과거와도 같은 오타쿠들에게 정신적 충격을 안겨줄 것을 처음부터 기획하고 이야기를 끌어간 것과 다르게, 김병욱 감독은 스스로도 인정할 만큼 전무후무한 완성도와 팬덤의 시트콤을 만들어 냈으며, 여기에 시청자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식의 거창한 기획 의도는 없어 보인다. 흠을 잡자면 무엇을 흠내지 못하겠느냐마는, 전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극악한 제작 스케줄 하에서 이 정도의 작품성과 재미, 의미에 중독성까지 이끌어내기란 만든 사람조차 하늘에 감사해야 할 지경일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중심엔 '세경'이 있었다.

21살. 중졸 학력. 식모. 이것이 세경이다. 세경이는 자기 '분수'를 너무나 잘 알았다. 빚에 쫓겨 해외로 도피한 아버지를 기다리는 날들. 초등학생 동생이 주인집 동갑내기에게 구박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혼내줄 수도 없는 처지. 주인집 고등학생의 사랑을 받은들, 고된 노동의 일상에 유일한 희망으로 주인집 의사 아들을 사랑한들, 그녀의 것으로 주어진 것은 없다. 그녀는 현명하다. 욕망하지 않고 체념한다. 아니, 욕망하나 단념한다. 그리고 분수를 지킨다. 이것이 등장 인물들과 시청자들로 하여금 세경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 어찌 안타깝지 않은가. 이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차분히 자기 깜냥 안에서 성실하고 예의바르게 살아나가는 소녀.

산골 소녀 세경과 동생 신애가 <지붕킥>의 세계로 들어오면서 다른 모든 등장 인물은 성장했지만 오로지 세경만이 제 자리에 있다. 이 땅에서 검정 고시를 본들, 언어도 모르는 낯선 땅에 이민을 간들, 21살 중졸 식모에게 확률적으로 가장 높은 현실이란 무엇일까. 그간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 소녀의 가혹한 현실과 단념의 성정에게 어떤 마무리를 주어야 하는가.

분명히, 플롯의 무난한 마무리는 가능하다. 현실에서도 신데렐라 스토리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준혁이든 지훈이든, 몇 년 후에 현경 네 가족 안에서 세경이 사랑을 인정받고 자리 잡은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꼭 사랑의 성공과 이 가족과의 재회가 아니더라도, 식모가 아닌 다른 인생을 차분하게 받아들인 찡한 모습을 그릴 수도 있다. 그랬다면 우리 모두 <지붕킥>이 너무나 현실적이면서도 따뜻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걸작으로 칭송해 마지 않았을 것이다.

피그말리온

여기서 신화 한 토막. 피그말리온은 키프로스의 조각가. 여자를 불신했던 그는 솜씨를 발휘하여 상아로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실물 크기의 여인상을 조각한다. 그리고 그만,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하루하루를 사랑의 근심으로 지새던 어느 날, 아프로디테는 그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어 여인상을 인간으로 변하게 한다. 그 여인의 이름은 갈라테이아.

나는 현대의 피그말리온. 내가 일생일대의 작품을 완성하며 그 작품의 정수인 여자 캐릭터를 완성하였다. 이제 그 이야기의 끝이 다가온다. 어떻게 이 인물의 끝을 맺을 것인가. 아니,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할 것인가.

대중문화의 창작자들은 대개 안노 히데야키처럼 대중문화를 탐닉하며 자라난다. 그러나 그 탐닉이 현실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부모들이 괜히 자식을 TV앞에서 떼어놓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유년기와 청년기에 대중문화를 통해 느꼈던 행복과 감수성을 현실에 응용하기 위해선 다시 한 번 대중문화 속으로 들어와 그것을 직접 창작하는 길밖에 없다. 대중문화의 복음은 현실을 개척하고 살아나가는 일과는 대체로 별개다. 꿈과 현실을 포개기 위해서는 결국 그 꿈을 만드는 공장으로 들어가는 것이 최선이다. 매트릭스 안이 행복했는가? 그런데 이젠 매트릭스를 나올 수밖에 없는가? 그렇다면 매트릭스를 만드는 자가 되라.

▲ 장 레옹 제롬의 그림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김병욱 감독의 관심은 자신이 조각한 이 상아의 여인에게 어떻게 생명을 불어 넣는가였다. ⓒ프레시안
그런데 여기엔 전제 조건이 있다. 자기 자신들처럼 대중문화에 탐닉해줄 대중이 존재해야 한다. 그들이 볼모로 있지 않는 한, 현실에서 꿈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볼모는 또 어떻게 그 탐닉을 이겨내야 하는가. 너무 달콤하고 아름답지만 사실은 기만적인 꿈의 제작자와 수용자는 이렇게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창작자에게 있어 해피엔딩에 대한 자조는 해피엔딩에 대한 강박만큼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감정이다.

김병욱 감독이 생각했던 <지붕킥>의 화룡점정은 그래서 해피 엔딩이든 새드 엔딩이든, 플롯에 있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자신이 조각한 이 상아의 여인에게 어떻게 생명을 불어 넣는가였다. 끝까지 분수를 지키고 슬프고 참하게 이별을 고할 것인가. 아니면 누구 한 명과 사랑을 이루어 운명과 싸워 나갈 것을 다짐하며 불안한 미래를 기약할 것인가. 어떤 방식이든 세경은 플롯의 규칙 안에 수납되어 훌륭했던 시트콤 <지붕킥>의 히로인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야 말로 <지붕킥>의 박제 안에 세경을 조각상으로 가두는 일일 수도 있다. 참 착했던 우리의 세경이로.

드디어 감독은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플롯의 관점에서 세경이 불행의 씨앗으로 해석이 된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중요한 것은 세경이 같은 사람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이 순간일 뿐. 세경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비참했는지, 얼마나 사랑했는지, 구구절절 플롯의 규칙 안에서 불필요했던 문장을 지훈에게 읊조리기 시작한다. 비로소 자신의 분수에 짓눌려 발화하지 못했던 세경의 인간적인 욕망들이 차분하게 흘러나온다. <지붕킥>의 웃음은 이 체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지붕킥>의 눈물은 이 말할 수 없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 세계를 지탱했던 것은 세경이었다. 그 세경이 자유로운 순간은 지금 이 순간 뿐. 단념하거나 욕망하거나 선택할 필요 없이, 지훈과 마음을 포갠 그 순간 뿐.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세경이는 그렇게 극 안에서 시간을 멈춤으로써 생명을 얻는다. 플롯은 파탄 났다. 죽음의 후일담을 쓴다면 현경 가족의 원망와 후회를 어쩔 것인가. 신애의 슬픔은 또 어쩔 것인가. 하지만 그게 과연 그 순간 세경의 행복에 중요했을까. 세경에게 가장 무거운 짐은 결국은 가족이었던 것을. 사랑은 보통 잔인한 선택이다. 김병욱은 공든 탑을 무너뜨리며 세경에게 사랑을 불어넣는다. 이것은 결국, 갈라테이아를 사랑한 피그말리온의 이야기였다.

시청자들은 이렇게 자신이 사랑해온 <지붕킥>의 세계와 세경이란 인물을 감독에게 독점 당한다. 하긴, 우리가 되새기며 기억할 세경은 '네?' 하고 되물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던 내성적인 식모였을 것이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진 순간의 행복을 음미하는 세경을 만들어줄 수 있던 것은 감독 뿐이었다. 안노 히데야키가 주인공 신지의 성장에 모든 플롯을 폭파시켰듯, 김병욱은 세경의 인간적인 욕망에 <지붕킥>의 세계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것은 안노의 경우처럼 각성의 촉구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고백 때문이었다. 기대하던 카타르시스를 배반당해 우리는 기분이 나쁘다. 하지만 감독에게 있어 플롯의 약속을 지켜 시청자들에게 선물하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어차피 대중문화란 상호 약속 하의 행복한 기만 아니었던가. 그 기만 대신에 이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에게 가장 행복한 한 씬을 그려주는 것이 더 진실할 수 있다. 아쉽다. 기분이 나쁘다. 조금만 더 플롯과 화해되었더라면, 시청자의 행복과 희망이 짓밟히지 않았더라면, 아니 다 필요 없고 세경이 죽지 않았더라면.

그러나 이건 농담이나 장난이 아니다. 하나의 진심이다. 이 진심의 파장을 가능하게 한 것도 결국은 지붕킥이 쌓아올린 시트콤으로서의 재미와, 드라마로서의 감정과, 메타드라마로서의 완성도 덕분이었다. 그런데, 시간을 멈춘 피그말리온은 갈라테이아와 행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피그말리온의 또 다른 조각상을 예전처럼 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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