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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가 사랑했을 때

[모 피디의 그게 모!] 현장 연애담

열네 모 - 연애 편지

'무슨 일이 있어도 PD와는 절대 사귀지 않으려고 했는데.'

우리가 처음 사랑하기로 했을 때, 당신이 조그만 한숨과 함께 내뱉은 말이지요. 전 어리석게도 오히려 조금 의기양양해졌습니다. 그 결심을 깰 만큼 내가 좋았다는 거죠? 그렇죠? 그 때는 그 말의 진의를 생각해볼 지혜가 없었습니다. 그 때는.

당신은 방송가의 프리랜서. 그리고 저는 PD였습니다. 우리가 만난 첫 날, 당신은 저를 부를 때 교묘하게 호칭을 피했습니다. '모 PD'라고도 'PD님'이라고도 '감독님'이라고도 부르지 않았죠. 업계 선배는 당신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때는 저도 그렇게 불리고 싶지 않았어요. 자존심 창창한 어린 시절이었는데도요. 당신에게만은 호칭이 주는 거리감이 싫었나봅니다. 나중에 당신도 웃으며 이야기했지요. 그 순간 호칭을 피하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었다고.

우린 어떻게 가까워졌던가요. 저는 당신의 일하는 뒷모습이 설렜습니다. 머리를 쓸어올리며 일에 몰두하는 당신을 멍하니 보고 있자면 마음이 평화로워졌습니다. 현장. 카메라의 REC 버튼이 눌러지기까지의 분주함. 감정에 몰입하려 애쓰며 분장을 받는 배우들, 급하게 바뀐 의상을 가지러 뛰어가는 코디들, 진행 상황을 체크하며 어깨에 전화를 끼고 받는 연출부, 덜커덩거리며 조명을 옮기는 조명팀과 레일을 준비하는 장비팀. 저는 잠시 대본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듭니다. 작가 작업실에서 울리는 노트북 자판 타닥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편집실에서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촬영의 미비함을 덮으려 한 컷 한 컷을 붙여가고 있겠지요. 사실 현장에서 제대로 돌아가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납니다. 어찌됐든, 전 당신과 여기 있거든요. 같은 일을 하며,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은 그 때는 나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을 더 열심히, 더 잘 해야 했고, 잘 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당신과 드라마 이야기를 하는 게 좋았습니다. 당신이 숨겼던 혜안을 내게만 꺼내 놓으며 드라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일 때 그 모습이 어찌나 빛나 보이던지요. 그리고 다시 일터로 돌아갈 때의 쓸쓸한 등은 늘 달려가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우린 참 마음이 헤펐지요. 한 번 흘러넘치니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우린 서로의 과거와 미래와 꿈을 나누면서 울다가 웃다가, 또 울다가 웃다가 모른 척 하고 일터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우리의 연애는 비밀이었어요. 헤픈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요. 그리고 또 끊임없이 드라마를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이야기 구조에 대해서, 인물의 감정선에 대해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끝없이 토론했지만 정작 우리 삶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드라마 속 인물의 운명에 대하여 우리는 신이었지만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순진한 아기와 같았습니다.

저는 당신의 꼿꼿한 자존심이 좋았습니다. 당신은 변명도 엄살도 부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종종 헤이해진 정규직들보다 훨씬 감동적인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을 프리랜서에게서 발견합니다. 세상이 그 일의 가치를 돈이나 명예로 환산해주지 않을 때, 일에 대한 소명의식과 자존심 없이는 버틸 수 없지요. 방송가의 프리랜서는 대체로 혹독한 직업이지만, 당신은 결코 망가지지 않을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의 태도, 당신의 생각, 당신의 마음을, 늘 제 옆에 두고 싶었습니다.

▲ "방송가의 프리랜서는 대체로 혹독한 직업이지만, 당신은 결코 망가지지 않을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의 태도, 당신의 생각, 당신의 마음을, 늘 제 옆에 두고 싶었습니다." PD 간의 사랑을 포함한 드라마 제작 현장의 인간사를 보여준 <그들이 사는 세상>의 한 장면. ⓒKBS

언젠가 둘이 맥주를 마시던 때가 생각납니다. 타 방송국의 스태프들이었나 봐요. 옆 자리에서 한 시간 내내 자기 프로그램 PD 욕을 하면서 울분을 달랬지요. 아주 사소한 것까지 시시콜콜하게 다 따져가며 PD를 박살내더이다. 저는 웃음을 참으며 당신께 물었습니다. 저도 저렇게 욕을 먹나요? 그럼 아닌 줄 알았어요? 아니, 그럼 당신도 제 욕을 했어요? 비밀! 돌이켜 보면, 그 비밀은 웃어넘기기 위한 말이기도 했지만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지요. 순간은 흘러갑니다. 프로그램은 끝났고, 다른 프로그램이 시작합니다. 전 당신이 다른 PD와 일하는 것이 질투가 났어요. 당신도 제가 다른 사람들과 일하는 것에 신경을 썼습니다. 우리가 연애를 시작했던 연애의 조건이 늘 서로에게 다시 반복된다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불안한 일이었어요. 당신은 나에게 집중했던 만큼 다음 드라마에 집중했고, 나 또한 당신에게 마음 썼던 만큼 다음 드라마에도 마음을 썼습니다. 그래도 우린 흐르는 강물을 붙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서로를 서로에게 지키기 위해 무던히도 많은 노력을 퍼부었습니다. 그리고, 그 노력도 강물과 같이 흘러갔습니다.

사람이 멀어지는 데에 그리 참신한 이유가 없습니다. 일일연속극 같은 이유와, 저예산 영화 같은 사건과, 후일담 소설 같은 마음의 추이가 이어지며 둘이 될 수 없어보였던 마음이, 조금씩 다시 둘이 되어갔습니다. 당신은 소중히 품었던 소명의식을 내려놓고 방송을 떠나기로 했지요. 다른 미래를 찾아보려 한다면서요. 프리랜서의 삶이란 그렇지요. 떠나고 싶을 때 미련 없이 떠난다지만, 누가 그 불안함을 알아줄까요. 하지만 당신은 오히려 저를 안쓰러워 했습니다. 인생을 저당잡힌 것은 저였을까요 당신이었을까요.

오래된 일입니다. 당신은 떠났고 전 이곳에서 늙어가겠지요. 이제 더 이상 당신의 소식을 알지 못합니다. 묻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렸던 미래와 꾸었던 꿈은 이런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제게 오늘은 오래전에 예정된 미래 같습니다. 한 해 한 해, 저는 선배가 되어가고 선배들처럼 되어갑니다. 감독들은 자신이 잘나서 존중받는 줄 알지요. 저도 그런 착각 속에 그냥 살아갑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전 가끔 영악한 영업사원에 둘러싸인 어수룩한 졸부가 된 기분을 느낍니다. 욕망덩어리들이 저를 덮치는 데 내가 진정 무엇을 원했는지도 잘 기억하지 못한 채 소심한 마음을 감추려 허세를 떨고 있는 기분. 그래서 오늘, 당신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신나게 떠들어댔던 오래된 미래와 함께.

그래요. 당신이 PD만은 사귀지 않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하루에 집중해서 살아가는 당신의 삶에 끼어든 샐러리맨은 오히려 당신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존재였을 겁니다. '갑'의 위치에 익숙한 사람의 어리광을 '을'의 위치에서 받아들여 주기가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당신에게는 마음껏 PD를 욕할 마음의 자유가 차라리 더 소중했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 말은 꼭 다시 하고 싶어요. 현재를 미래에 저당 잡히지 않고 살던 그 모습은 너무나 눈부셨다고. 지금도,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저는 오늘도 당신이 오래 전에 예상했을 법한 미래를 살고 있습니다. 반발자국만 더 앞으로 나아가보려 애쓰면서요. 당신은, 그 시절 이후로 이곳에 발길을 끊은 당신은 당신의 자리를 찾았나요? 이제 당신의 등은 내가 달려가서 안아주지 않아도 될 만큼 쓸쓸함을 떨쳐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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