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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들어본 그 대사…"너 답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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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들어본 그 대사…"너 답지 않아!"

[모 피디의 그게 모!] 클리셰

열한 모-클리셰(Cliche)

편집을 하다 문득 모니터에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젊은 배우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연인에 대한 사랑과 불안을 표현하려 애쓰는 눈빛은 자못 비장했으나 어색한 시점에 잡힌 정지 화면은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나는 중얼거렸다. 어때? 너는 너의 진부함이 견딜 만하니? 나는 나의 진부함을 견딜 수 없는데.

삶이 너무 진부해서 못 견디겠는 때가 있다. 별 볼 일 없는 시공간에서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부여 받아 살고 있는 건 왜 하필 나일까.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저녁이나 일터에서의 작은 소통이나 성취, 좌절까지도 너무나 전형적이어서 때때로 힘이 빠진다. 내 삶에 새로움이란 불가능한 걸까.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 이야기가 진부함 속에 꽉 갇혀서 옴짝달싹 할 수 없어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애쓰는 배우들의 얼굴 보기가 민망해진다. 눈물이 얼마나 그렁그렁하건, 감동 없이 화면을 이어붙일 도리 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모든 드라마에 한 번쯤 나오는 대사. 여배우의 팔을 잡아 돌려세우며 눈썹을 꿈틀대며 말하는 남자. '너 답지 않아' 훗 미소를 날리며 답하는 여자. '나 다운 게 뭔데?' 꺄아. 배우가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진부해서 비명이 나온다. 여기에 살짝 응용을 해보자. 오빠답지 않아요, 누나답지 않아요, 엄마답지 않아요, 아빠답지 않아요, 선배답지 않아요…. 도대체 우리는 언제부터 이런 '다움'에 집착한 걸까. 미국 드라마의 '어서 여기서 빠져 나가야 해', 일본 드라마의 '절대 무리야.' 정도의 관용구만큼 자주 쓰인다.

그런데 재미있는 부분은 미국 드라마나 일본 드라마, 그리고 한국 드라마에서 각각 질리도록 들은 대사들이 서로의 드라마에선 의외로 잘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이 '다움'을 두고 주인공들끼리 아웅다웅하는 사이, 미국에선 주인공들이 빠져나갈 곳을 찾느라 골머리를 앓고 일본에선 '할 수 있다, 없다'를 두고 싸운다. 물론, 주인공들은 '답지 않은' 길을 선택하거나, 그 곳에서 빠져나가거나, 무리인 일을 해내고야 만다. 예상 가능한 클리셰다.

왜 각각의 문화권에서 진부한 대사의 종류가 다른 걸까. 그 문화에서 유행하는 이야기의 형태가 그만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선 주인공들끼리의 관계망에서 응당 어떠해야 한다는 기대를 받는 주인공이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변화해가는 데에 강조점을 둔다. 미국 드라마는 위기 상황에 주인공을 몰아놓고 그 상황을 뚫고 나가는 이야기를 주로 활용한다. 일본 드라마에는 이겨내기에 결코 무리인 어떤 운명이나 제약에 대결해가는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플롯이 각각의 문화권에서 환영받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종종 못 견뎌 하는 이야기와 삶의 진부함은 한국 사회의 '게임의 규칙'인 셈이다. '너다워야 한다'는 강박과 거기서 벗어나고픈 욕망. '나 다움'에 대한 재규정. 그래서 진부함은 결국 그 문화권의 관습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 문화방송(MBC) 인기 드라마 <파스타>의 한 장면. 우리가 종종 못 견뎌 하는 이야기와 삶의 진부함은 한국 사회의 '게임의 규칙'인 셈이다. '너다워야 한다'는 강박과 거기서 벗어나고픈 욕망. '나 다움'에 대한 재규정. 그래서 진부함은 결국 그 문화권의 관습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문화방송

그런데 진부한 것이 결코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처음엔 성취하고자 하는 어떤 것에 가깝다. 삶에 3단계가 있다면, 첫 단계는 최선을 다해 '진부해지고자' 하는 단계일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목표가 생긴다면 그 목표의 가장 진부해 보이는 부분이 핵심인 경우가 많다. 감독의 전형적인 어떤 모습, 작가의 전형적인 어떤 모습, 배우의 전형적인 어떤 모습… 이런 것들은 당사자들에겐 진부하기 짝이 없지만 그 당사자들이 되고파 하는 사람들에겐 그 진부함, 그 전형성 자체가 목표가 된다. 단적으로 배우를 꿈꾸는 사람들 중에 '너 답지 않아. 나다운 게 뭔데'라는 대사를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여 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두 번째 단계가 비로소 그 진부함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단계다. 새로움이나 깨달음 없이 관습적으로 살고 있는 자신의 진부한 삶을 발견할 때 가끔씩 소름이 돋지 않는가.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점점 더 빨리 가는 이유는 새로움과 깨달음에 대한 추구에 앞서 사회에서 요구하는 작은 목표들을 맞추며 진부하게 살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드라마의 클리셰는 무서우리만치 한국 사람들의 고민지점을 찌르고 있는 셈이다. 왜 우리에게 이렇게 진부하고 전형적인 삶을 요구하는 거냐 이 빵꾸똥꾸들아! 도대체 나다운 게 뭐기에? 대한민국에서 유행한다는 드라마는 다 이런 식이다. 국정원 요원답지 않아. 요원다운 게 뭔데? 여왕답지 않아. 여왕다운 게 뭔데. 노비답지 않아. 노비다운 게 뭔데… 이렇게 질문하는 이야기를 보다보면 정말 우리는 우리를 규정하는 진부한 틀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삶의 세 번째 단계는 이런 진부함을 수용하고 달관하는 단계인 것 같다. 삶이란 어떻게든 진부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의 경지다. 사실 사람들 모두 어느 정도는 이 단계에 와 있다. 진부한들 어쩌겠는가. 자퇴서를 내고 고등학교를 때려 치운다고 해서, 사표를 내고 회사를 그만 둔다고 해서 인생이 참신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진부한 삶에 어떻게 새로움을 주고 어떻게 의미를 줄지를 고민한다. 그것이 친구가 되기도 하고, 연애가 되기도 하고, 가족이 되기도 하고, 삶의 작은 목표들이 되기도 한다. 한 분야를 10년 넘게 몰두하면 그 분야의 달인이 된다는데, 10년 이상 삶을 산 열 한 살 어린이조차도 자신의 삶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나름의 계산이 서기 마련이다. 삶의 3단계를 반복해가며 사람들은 대강 인생의 클리셰들을 어떻게 다루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고 있다.

따라서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 장르는, 어떻게 보면 삶의 달인들을 상대로 진부하고 맥락 없는 삶에 새로움과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을 설파해야 하는 어려운 일을 맡고 있다. 좋은 이야기는 좋은 멘토와 같아, 잘만 만나면 우리 삶은 조금 덜 진부해진다. 혹은, 삶의 다음 단계의 '새로운 진부함'을 받아들여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런데 많은 이야기들이 인생의 3단계에 이른 시청자를 상대로 1, 2단계 수준의 클리셰를 반복하고 있다. 이런 클리셰들이 어떤 시대적, 문화적 배경 때문에 생겨났는지 고민하지 않기에, 의미와 진실성은 증발하고 진부함만 남는다. 만드는 사람들이 고민을 덜 하고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보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이 보기 때문이다. 멘토를 기대하지 말고 어리석은 자들의 놀음판을 구경하라는 뜻일까. 분명한 것은 삶 자체로도 너무나 진부한데, 여기에 진부한 이야기까지 얹으면 정말 가망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는 좀 더 삶의 달인이 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좋은 이야기와 친구처럼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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