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에서 남북 정상회담에 관한 얘기가 나올 정도로 남북관계에 잠시나마 불이 붙었던 것은 한반도 정세의 변화 가능성 때문이었다. 중국이 대북 제재를 사실상 무력화하고 북미 양자대화가 준비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만 고립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의 새 정부도 과거와 다른 대북정책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불씨를 어렵게 살려 놓은 이명박 정부는 경직되고 서툴렀다. 정부는 임태희-김양건 만남이나 11월 개성 접촉 등에서 국군포로·납북자 문제를 남북관계의 주요 의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현실적이고 무리한 요구였다. 북한은 그런 발상의 진원지가 현인택 통일부 장관이라고 판단했는지, 11월 이후 그를 비난하고 있다.
심사 뒤틀린 北, 12월 들어 태도 달라져
1막이 끝났지만,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현상들이 12월에 있었다. 신종플루 치료제 지원, 해외공단 공동 시찰 등. 28일 정부는 국제기구와 민간단체를 통한 대북 인도적 지원에 쓸 남북협력기금 약 260억 원을 의결하기도 했다. 대북 지원 사업에 대한 남북협력기금 지원 액수는 올해 500억 원 정도였는데, 12월에 의결한 것만 440억 원이다.
이 역시도 한반도 정세에서 외톨이가 되지 않으려는 이명박 정부의 불안감에서 비롯된 일들이었다. 스티븐 보즈워스 미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12월 초 평양을 방문해 평화체제 문제까지 협의하고 돌아오면서 정부는 더 초조해졌다. 막차에 일단 한 발을 걸쳐 놓고 있다가 북미관계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리면 올라타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태도는 11월 말을 기점으로 달라졌다. 남쪽이 주겠다는 건 받겠지만 전처럼 먼저 움직이진 않겠다는 분위기다. 남측의 옥수수 1만 톤 지원 제의에 따른 모멸감, 11월 서해교전으로 되살아난 군부의 적대감, 전적으로 남측의 필요에 따라 추진되는 일에 장단을 맞출 필요가 있느냐는 자존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21일 북한 해군사령부가 북방한계선(NLL) 부근 수역을 '해상사격구역'으로 지정한다고 선포한 것은 북한의 최근 심사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그렇다고 북한이 다시 통미봉남(通美封南)으로 돌아서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북한이 8월 이후 통미봉남적인 태도를 버린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북미대화를 위해서는 남북관계를 풀어야 한다는 판단이다. 여기엔 미국의 요청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른 하나는 현정은 회장 편으로 남북관계를 긍정적으로 해보겠다는 모종의 메시지가 남쪽에서 갔기 때문이란 전언이다. 그 메시지는 결국 공수표로 판명이 났지만, 미국의 요청만큼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를 위한 환경 조성에 필요한 만큼만 남북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 이명박 대통령과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연합뉴스 |
"남북대화에서 북핵 논의" 번지수가 틀렸다
그러나 막차라도 타야 하는 이명박 정부가 또 다시 번지수를 잘못 짚고 있는 조짐이 보인다. 정부 소식통들이 28일 <연합뉴스>를 통해 밝힌 외교·안보 부처의 내년도 업무보고(31일 예정) 내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한 소식통은 <연합뉴스>에 "정부는 남북대화에서 북핵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이 확고하다"며 "남북간 북핵 논의와 6자회담의 선후관계를 구분할 것 없이 두 트랙을 병행 추진한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다른 정부 당국자는 "과거에도 남북간에 북핵 문제가 상징적인 수준에서 논의됐지만 북핵은 6자회담에서 다루고, 남북간에는 교류·협력 현안들을 협의하자는 기류가 강했다"면서 "이제는 남북대화에서 북핵 문제를 실질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 현 정부의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요컨대 6자회담에서 북한 핵문제가 논의되겠지만 남북대화에서도 북핵을 주된 의제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는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달 27일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내놓은 '지침'을 통일부와 외교통상부가 내년 업무보고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시 "남북 정상회담은 북핵 포기에 도움 된다면, 우리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국군포로·납치자 문제를 서로 이야기하며 풀 수 있다면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핵과 국군포로·납북자 문제를 남북대화의 핵심 의제로 제시한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남북대화에서도 북핵 문제는 중요한 의제였다. 그 결과가 남북 장관급회담 합의문에 수차례 실렸고, 2007년 2차 정상회담에서 나온 10.4 정상선언에도 핵 문제가 언급됐다. 그러나 상징적이고 선언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핵 문제는 전적으로 미국과의 문제라는 북한의 입장이 확고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북핵 해결에 기여하는 다른 길을 찾았다. 6자회담 무대에서는 북미간 협상의 촉진자이자 중재자로 나서는 한편, 핵 문제와 별도로 남북관계의 다양한 분야를 진전시킴으로써 역으로 핵 문제에 관한 발언력을 높여 나갔다.
그처럼 상호 신뢰를 쌓아 나가던 시절에도 우회로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게 북핵 문제다. 그게 현실인데, 신뢰가 없는 이명박 정부가 남북대화에서 핵 문제를 "실질적으로" 논의하자고 하면 북한이 받을 거라고 여기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순진한 발상이다. 남북대화에 정통한 한 전직 고위 당국자는 "또 하나의 패착이 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북한은 지금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마저도 제쳐두고 미국과 양자회담부터 하고 있다.
정부의 방침이 정녕 그러하다면 내년 상반기의 남북관계 전망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남북대화는 겉돌 것이고, 잘 된다고 해도 12월 정도의 상황만 계속될 것이다. 혹여 북한이 정세 주도권을 잡기 위해 도발적인 행동을 할 경우 정부는 또 우왕좌왕 춤출 수밖에 없다. 남북간 대화와 교류가 원활치 않으니 북한의 행동을 자제시킬 레버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북미대화가 급진전되면 부랴부랴 그 분위기에 다시 편승하려고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6자회담이 열린들 남과 북은 소 닭 보듯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이행되고 그에 따른 경제적 보상이 주어질 경우 한국은 '돈만 내는' 존재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혹자는 최근 정부가 별 효과도 없는 남북협력기금을 상황 관리 차원에서 집행하는 걸 두고 한국이 이미 그 길로 들어섰다고 규정하기도 한다.
결국 이명박 정부가 정상회담 등 남북대화를 적극 추진하는 쪽으로 대전환을 모색하는 분기점은 6월 지방 선거 이후가 될 것으로 보인다. 북미대화·6자회담의 진전, 일본의 움직임 등 대외적인 요인과 국내 정치적 위기가 맞물려야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정책적 수요를 강하게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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