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파문'으로 곤욕을 치른 이용훈 대법원장이었지만 그의 화법은 여전히 거침없었다. "이번 일로 대법원장 저 개인으로서는 이만저만 상처와 피해를 받지 않은 게 아니다. 가슴에 응어리가 질 정도로 상처를 받았다"는 이 대법원장이었지만, 50분 동안의 훈시를 하는 동안 500여 명의 법관과 법원 직원들을 수차례 웃게 하고 박수를 받는 등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특히 이 대법원장은 "공판중심주의 원칙에는 변함이 없고, 이를 통해 국민의 신뢰를 받는 법원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심한 말 사과…그러나 '법조 3륜'은 내가 싫어하는 얘기"
26일 서울고법·중앙지법을 순시한 이 대법원장은 오후 4시 법관과 법원 직원 500여 명을 상대로 한 훈시에서 "내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은 아닌데, 법원의 나아갈 길과 공판중심주의 원칙을 강하게 얘기하다보니 심한 말들을 했다"며 "이 자리를 빌어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치유할 만한 얘기를 해야겠다"고 훈시를 시작했다.
이 대법원장은 '법조 3륜' 발언과 관련해 "법관은 헌법에 보장된 사법권을 행사하는 주체이고 검찰과 변호사 단체는 역할이 따로 있다는 뜻으로서 (이들을) 비하하거나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고 유감을 표명했다.
이 대법원장은 다만 "'법조 3륜'이라는 말은 평소에 내가 싫어하는 얘기다. 독일어의 '검사'라는 단어를 우리 말로 풀면 '국가 변호사'라는 뜻이고, '변호사'는 '개인 권리 보호 변호사'라는 뜻"이라면서 "법원, 검찰, 변호사는 협력관계가 아니다.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으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데 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자신의 '소신'을 명확히 밝혔다.
이 대법원장은 '변호사 서류는 사람을 속이려는 것'이라는 발언에 대해서도 발언의 맥락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 대법원장은 "말 실수에 해당한다"면서도 "변호사들은 자기 당사자에게 유리한 말만 하게 돼 있는데, 1회 공판 기일에 변호사가 아니라 당사자의 말을 들으면 사건을 잘 파악할 수 있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고 해명했다.
"내가 법원을 위해 한 건 했다"
이 대법원장은 '수사기록을 던져 버리라'라는 말에 대해서는 "민사 재판에서 판사들이 검찰의 수사기록을 기다리느라고 재판을 지연하는데 이는 법관의 직무유기로 법관이 재판을 포기하는 일"이라며 "민사재판의 결론이 수사기관의 조사로 결론이 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사기나 손해배상 등의 사건의 경우 민사와 형사가 동시에 진행되는 우리나라 사법계의 현실에서, 형사사건의 결론이 나야 민사사건의 선고가 이뤄지는 재판 관행을 지적한 말이다.
이 대법원장은 형사재판에 대해서도 "검찰의 수사기록으로 유무죄를 판단하게 된다면 뭣 하러 재판을 하느냐"며 "증거능력이 없는 모든 수사기록을 재판 시작 전에 읽고 재판을 시작하면 유죄 심증을 갖고 재판을 시작하는 것으로 '위법한 재판'"이라고 말했다.
이 대법원장은 이와 같이 해명하며 '공판중심주의'의 강화를 거듭 강조했다. 이 대법원장은 "이번 파문의 결과로 공판중심주의를 언론이 홍보해주는 바람에 법원이 뭐하는지를 국민들이 알게 됐다"며 "재판의 주체는 '판사'라는 사실이 국민들에게 확실히 각인됐다"고 말했다.
이 대법원장은 "저 개인에게는 가슴에 응어리가 질 정도로 상처를 받았다"면서도 "그러나 '내가 법원을 위해 한 건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해 법원 직원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이 대법원장은 또 "검찰이 수사기록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는데, 아주 잘된 일"이라며 "역시 검찰은 지혜롭다"고 말하기도 했다.
"공판중심주의의 길은 지금 당장 가야 할 길"
이 대법원장은 법원 내부의 개혁을 강하게 촉구하기도 했다. 이 대법원장은 "옛날에는 '판사는 판결을 통해 말한다'고 했는데 옛날 얘기"라며 "우리는 그 어려운 판결을 통해 국민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법원이 공정하고 신뢰할 만한 재판을 해서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그 방법이 민사재판에서 구술변론주의, 형사재판에서 공판중심주의"라고 강조했다.
이 대법원장은 "국회에 출석해 국회의원들과 좋게 대화를 나눈 뒤 나중에 속기록을 봤는데 내 말이 글로 옮겨지니 감정을 느낄 수 없고 생소한 말로 이해됐다"며 "재판도 말로 해야 당사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대법원장은 이어 "공소장도 법정에서 읽지 않고 '진술 간주', 답변서도 읽지 않고 '진술 간주'로 넘어가는 것이 우리 재판의 현실인데 우리 형사소송법에 어디 그렇게 써 있나"라며 서류 위주의 재판 관행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 대법원장은 또 '지금 즉시 공판중심주의를 실현하기에는 인력과 준비가 부족하다'는 시기상조론에 대해서도 "지금 하자고 하는 것은 새로운 아이템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형사소송법과 민사소송법에 나와 있는 원칙을 지키자는 것"이라며 "형사소송법이 개정된 지 이미 50년이나 지났는데, 앞으로 시간을 준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 해야 한다. 희생이 따르겠지만 이 길은 반드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관은 국민으로부터 재판권 이양 받은 것
이 대법원장은 '국민의 신뢰'를 거듭 강조하기도 했다. 이 대법원장은 "이번 법조비리 파문 때 사람들은 대개 '청렴치 못한 사법부이고 이번 사건은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이라는 얘기들을 한다"며 "우리는 안에서 열심히 봉사한다고 생각했지, 일반인들의 시각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이 대법원장은 최근 사법개혁 과제 중 하나로 언급되는 '배심제'에 대해서도 "우리 형소법은 배심제만 빼고 영국 미국의 공판중심주의와 거의 같다"며 "그러나 법원에 대한 불신으로 말미암아 국민들이 배심제를 얘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대법원장은 이어 "얼마나 신뢰를 받지 못했으면 배심제 얘기가 나오나"라며 "재판 한 번 제대로 해 보고 배심제를 해도 하자"라며 통렬한 반성을 촉구했다.
이 대법원장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 2항을 언급하며 "사법권을 우리에게 준 주인은 국민들"이라며 "우리 앞에 오는 민원인들은 모두 '오너'인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 대법원장은 "앞으로 임기 동안 '감동하는 법원'을 만들기 위해 매진하겠다"며 "이를 위해 시설과 '사람 개조' 등에 모든 방법을 동원하겠다"고 목청을 높이기도 했다.
이 대법원장은 "법관과 법원 직원은 하는 일의 기능이 다를 뿐 상하관계가 아닌 한 배를 탄 사람들"이라는 말로 50분의 훈시를 마쳤으며, 500여 명의 법관·직원들은 모두 일어서서 이 대법원장에게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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