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비난 이상의 것을 국민들은 원한다. 그건 두말할 나위 없이 석방이다. 북한을 비난하고 석방을 촉구하는 '말' 외에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무작정 기다리다가 한참 뒤 이뤄지는 그런 석방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당장 오늘이라도 유 씨를 데려오길 원한다.
▲ 이명박 대통령과 현인택 통일부 장관 ⓒ연합뉴스 |
국민의 안전 보호는 개성공단이 아니라 국가 존립의 본질적인 문제다.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가장 효과적이고 빠르고 안전하게 유 씨를 데려오지 않으면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문제의 실질적인 해결, 즉 석방을 위해 행동하기보다 이번 사건을 이용해 북한을 비난하는 데에 더 힘을 기울이는 모습이다. 나아가 남북관계 파탄의 책임을 북한 탓으로 돌리는데 이 문제를 적극 활용하려는 속내까지 비추고 있다.
외교부, 무엇이 그리 급했나
'북측에 일방적으로 끌려가 조사 받는 사람'이었던 유 씨가 '정치적 인질'로 바뀐 건 다름 아닌 이명박 정부의 잘못 때문이다.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전면 참여 발표를 두 번째로 연기했던 4월 14~16일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렇게 됐다.
외교통상부는 4월 15일 출입기자단에 "유 씨가 18일 석방될 가능성이 있으니 19일 오후 2시 PSI 전면 참여를 공식 발표하겠다"며 석방 때까지 보도자제(엠바고)를 요청했다. 기자들은 그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그날 기사를 쓸 경우 "남북관계 현안에 미치는 악영향을 고려해 PSI는 주말께 발표하기로 했다"는 모호한 표현을 쓰기로 약속했다.
복수의 소식통에 따르면 실제로 북한은 14일 '유 씨를 18일쯤 석방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외교부가 말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됐다. '석방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PSI 발표를 연기한다'고만 했어야지, '석방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석방 다음날 발표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건 북한더러 유 씨를 석방하지 말라는 소리일 뿐이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눈치 빠른 북한은 18일 유 씨를 석방하지 않았다. 대신 총참모부 대변인 성명을 발표해 PSI는 "선전포고"이며 "서울이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불과 50km 안팎에 있다는 것을 순간도 잊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결국 외교부는 'PSI 19일 발표는 없다'고 말해야 했다. 억류가 계속되면 PSI를 발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북한에 다시 한 번 확실히 알려주었다. PSI 뿐만이 아니다. 북한은 그때부터 남측을 강제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게 뭐든 유 씨에다 갖다 걸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처럼 유 씨가 정치적 인질이 된 데에는 이명박 정부의 결정적인 실책이 있었다.
어른거리는 일본 우파의 그림자
외교부가 유 씨 문제를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기하겠다던 4월 말~5월 초 국면에 이르면 정부의 관심이 유 씨 석방보다 대북 비난에 기울어 있음이 보다 뚜렷해진다. 유엔에 가져가면 국제사회의 대북 비난 여론은 높일 수 있을지 몰라도 북한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와 석방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는 북한에 의한 납치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벌이는 일본 우파의 행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안중에는 납치 해결이란 게 사실 없다. 국내외적으로 납치 문제를 최대한 떠들어 반북(反北)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정치적 이득이나 챙기겠다는 계산만 있다. 그들의 행동은 북한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뿐인데, 반발 자체가 목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납치 문제는 더 꼬인다.
사태가 일본처럼 흘러가는 불상사를 막은 건 유 씨 가족들의 현명함 때문이었다. 유 씨에 대한 조사를 심화하고 있다는 5월 1일자 북한의 발표가 나오고,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외교부는 유엔 제소 카드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투 트랙 싫으면 다른 대책이라도 내놔야
외교부의 자충수가 어찌됐건 수습되자 이번에는 주무부서인 통일부가 'MB본색'을 드러냈다. 문제 해결을 고민하는 거의 모든 이들이 개성공단 문제와 유 씨 문제를 따로 다루라는 이른바 '투 트랙' 접근법을 주장하는데도 불구하고 한사코 그걸 거부하고 있는 모양이 그러하다.
통일부는 18일 정부가 투 트랙으로 접근키로 했다는 보도가 여럿 나오자 보도해명자료까지 내면서 그런 사실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 투 트랙 접근법에 특히 부정적인 입장이라고 알려진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22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 참석해서도 "두 문제는 분리될 수 없다고 보고 있다"고 딱 잘라 말했다.
남북협상에 정통한 전직 고위 당국자들이나 많은 전문가들이 그 방법밖에 없다고 하고, 북한에서 개성공단을 총괄하는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은 유 씨 문제가 자기네 소관이 아니라고 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투 트랙 불가'를 공식화하는 건 무슨 의미인가? 결국 대북 비난·촉구나 할 뿐 '행동'은 아무 것도 안 하겠다는 것이다.
현인택 장관은 21일 제주대 강연에서 "이젠 북한이 대답할 때"라고 말했다. 북한이 먼저 나서기 전에는 솔직히 할 게 없다는 고백이다. 국가의 존립 이유가 의문시 되는 엄중한 상황에서 통일부 장관이 고향에 내려가 이런 말이나 하고 있는 건 무책임하다. 억류도 싫고 투 트랙도 싫다면 제3의 대책이라도 내놔야 하는데 통일부는 18일 남북접촉 무산 후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남북은 지난 1년여 동안 남북관계 파탄에 대해 네탓공방을 벌여 왔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국민이 억류된 상황에서도 석방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은 뒷전에 두고 이처럼 네탓공방의 소재로나 삼고 있다.
CEO 대통령의 '실적 제로'
이명박 정부는 북한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북한의 버르장머리는 전보다 더 나빠졌다.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향상시키겠다고 했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단 한 명의 인권도 나아졌다는 증거가 없다. 단 한 병의 배고픈 아이에게 밥을 주지 않았고, 단 한 차례의 이산가족 상봉도 없었다.
정부는 올 들어 북한의 협박이 거세지자 대북 안보태세를 강화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유 씨라는 국민 단 한 명의 안전 보장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실적으로 말하는 'CEO 대통령'의 성적표가 초라하다.
이처럼 이 정부의 대북정책은 그 방향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실적이 없고 행동이 없다. 관광객 피격 사건 직후 금강산 관광을 중단시켰던 것처럼 일방적으로 할 수 있는 조치 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협상이건 협박이건 북한과의 상호작용으로 풀어야 하는 문제에서는 모조리 실패했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가다간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정치적 인질이 된 유 씨 때문에 설령 북한이 서해에서 도발을 해와도 국방부가 입버릇처럼 하는 '단호한 대응'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토록 무능하다 보니 결국 할 수 있는 건 대북비난과 책임 떠넘기기를 위한 프로파간다밖에 없다. 정부의 말대로 유 씨 문제는 개성공단의 본질적인 문제 맞다. 그런데 그걸 수 백 번 외친다고 유 씨가 느닷없이 걸어 내려오기라도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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