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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일본, 납치문제 끌어안을수록 수렁에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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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일본, 납치문제 끌어안을수록 수렁에 빠져"

도쿄 초청강연서 "과거사 정리 안 하면 권위 못 얻어"

"일본이 납치문제를 중시하는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납치문제를 결국 풀지 못할 가능성이 오히려 크다. (…) 일본은 지금부터라도 납치문제에 대한 정책을 유연하게 구사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납치문제를 끌어안을수록 북한문제의 수렁에 스스로 빠져들게 되고 동북아의 중심국가 노릇은 못하게 된다."

국내에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속적으로 비판해 온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이번에는 도쿄에서 일본 정부와 국민들을 향해 쓴소리를 했다.

정 전 장관은 26일 오후 도쿄 한국YMCA 빌딩에서 열린 '일조(북일)국교정상화연락회' 초청강연에서 일본인들이 가장 민감해 하는 납치문제, 과거사문제 등을 주제로 일본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

"대북 지원 안 하면 엉뚱한 비용 또 들어"

250여 명의 이 단체 회원들이 자리한 이날 강연에서 정 전 장관은 "일본이 '선(先)납치문제해결'을 조건화하는 종래의 정책을 고수하면 결국 일본이 북핵문제 해결과 동북아 냉전구조 해체의 걸림돌이라는 비난이 국제적으로 나올 수 있다"며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 전 장관은 1990년대 중반 북한 단독으로 발굴한 미군 유해에서 가짜가 발견됐지만 미국이 언론에 터뜨리지 않고 조용한 협상으로 공동작업을 관철했던 사례를 일본이 벤치마킹해야 한다며 북일 모두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제3국 발견방식'도 가능하다고 제안했다.

정 전 장관은 또 일본이 납치문제를 이유로 북핵 불능화에 상응하는 중유지원을 하지 않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중유 외 다른 경제 지원(ODA)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북핵문제가 해결되더라도 북한이 빈곤국으로 남아 있는 한 동북아 평화의 또 다른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리되면 한국과 일본으로서는 지불하지 않아도 될 엉뚱한 기회비용을 또 다시 지불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부유한 주변국들이 가난한 북한을 돕는 것은 결과적으로 스스로를 돕는 일이 된다는 뜻이다."

"일본인의 역사인식, 피해국 사람들과 천양지차"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
정 전 장관은 이어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지적했다.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게 필요충분조건이란 것이었다.

그는 "상당수 일본 지도층마저 '과거 일본은 국가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그 과정에서 좋은 일과 함께 나쁜 일도 있었을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며 "피해자였던 여타 동아시아 국가 사람들의 인식과는 천양지차가 있다"고 평가했다.

"국제정치는 국내정치보다 훨씬 적나라한 권력의 세계지만,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전부가 아닌 세계다. 명분이 서고 권위를 인정받아야 경제력과 군사력의 위력이 발휘되고 인정되는 세계가 국제정치의 세계다. 명분을 잡고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도덕적 비난 여지부터 없애야 한다. 과거사 문제를 잘 처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은 지금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상임이사국이 또 하나 배출된다면 동아시아 국가들로서도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일본이 자기 주변 국가들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성실하게 대변해 줄 것이라는 인식이 생기지 않는 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의 안보리 진출을 지원하기 어려울 것이다."


"북핵은 '선악보다 득실로' '냉전구조 해체로' 풀어야"

한편 북핵문제와 관련해 정 전 장관은 '선악(善惡)보다는 득실(得失)을 중심으로' 해법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하며, 클린턴 시절의 '소프트 랜딩(연착륙)' 추구 및 페리 프로세스 등을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했다.

그는 "북핵문제는 발생 원인과 전개 과정을 볼 때 제재나 협상 등 기술적 접근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며 "동북아 냉전구조 해체를 통해 북한의 체제 불안을 근본적으로 제거해 주는 등 구조적이고 포괄적인 접근을 해야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부시 정부가 출범하면서 선악 기준의 대북 압박정책이 추진되어 동북아에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라며 "클린턴 정부 시기 '핵물질 문제'에 불과했던 북핵문제가 부시 정부 시기에 '핵무기 문제'로 커졌다"고 비판했다.

동북아 안보 문제에 대해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주장처럼 6자회담이 북핵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6자회담체를 '동북아안보협력회의'로 확대 발전시켜야 한다"며 "냉전잔재성이 있는 기존의 양자동맹들을 발전적으로 재편하고, 여타 국가들도 참여하는 다자안보협력기구를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평화를 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은 과거사에 솔직·대범하지 못하고 정치·군사적으로 너무 미국에 매달려 경제력과 군사력에 합당한 정치대국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그러한 문제들을 극복한 뒤) 일본이 21세기 들어 공개적으로 그리고 떳떳하게 주도해볼만한 프로젝트가 바로 동북아 안보협력 및 경제협력 기구를 만드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일조국교정상화연락회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등 한반도 문제에 관심있는 일본의 지식인들과 평화단체들이 모인 단체로 원수폭금지일본국민회의 등이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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