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관계정상화 우선 원칙' 강조의 의미
첫 힘은 북한이 썼다. 13일 오후 외무성 대변인의 담화라는 매우 공식적인 방법으로 오바마 차기 행정부에 메시지를 띄웠다. 새로운 내용은 없었지만, 자신들의 원칙과 논리 구조를 선명히 보여 줬다.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학습을 일차적으로 끝냈다는 뜻이고, 오바마 행정부도 자신들의 입장을 감안해 호응하라는 신호였다.
우선 한반도 비핵화보다 북미관계 정상화가 먼저이며, 관계정상화를 통해 비핵화를 달성해야 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외무성 대변인은 "우리가 9.19 공동성명에 동의한 것은 비핵화를 통한 관계개선이 아니라 바로 관계정상화를 통한 비핵화라는 원칙적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라며 "우리가 조선반도를 비핵화하려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난 반세기 동안 지속되어온 우리에 대한 미국의 핵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다"라고 강조했다.
대변인은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정책과 그로 인한 핵위협 때문에 조선반도 핵문제가 산생되었지 핵문제 때문에 적대관계가 생겨난 것이 아니다"라며 "우리가 핵무기를 먼저 내놓아야 관계가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은 거꾸로 된 논리이고 9.19 공동성명의 정신에 대한 왜곡"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정책과 핵위협의 근원적인 청산이 없이는 100년이 가도 우리가 핵무기를 먼저 내놓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적대관계를 그대로 두고 핵문제를 풀려면 모든 핵보유국들이 모여 앉아 동시에 핵군축을 실현하는 길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핵위협이 제거되고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이 없어질 때에 가서는 우리도 핵무기가 필요없게 될 것"이라며 "이것이 바로 조선반도 비핵화이고 우리의 변함없는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비핵화보다 관계정상화가 먼저라는 것은 일의 선후관계를 제시한 것이기도 하지만, 부시 행정부처럼 비핵화 우선 원칙에 집착하지 말고 외교대표부 설치 등 관계정상화 작업도 적극 병행해야 비핵화도 진전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관계정상화 없인 비핵화도 없다는 경직된 태도라기보다는, 두 과제를 선순환적으로 풀어내자는 제안의 의미가 강해 보인다.
윤곽 드러내는 북한판 '터프 외교'
현안이 되고 있는 핵 검증 문제와 관련해서도 입장을 밝혔다. 외무성 대변인은 "서로 신뢰가 없는 조건에서 9.19 공동성명을 이행할 수 있는 기본방도는 '행동 대 행동' 원칙을 준수하는 것이고 검증문제에서도 이 원칙이 예외로 될 수 없다"며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비핵화가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단계에 가서 조선반도 전체에 대한 검증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전 조선반도 비핵화는 철저히 검증가능하게 실현되어야 한다"며 "미국 핵무기의 남조선 반입과 배비(배치), 철수 경위를 확인할 수 있는 자유로운 현장접근이 담보되고 핵무기가 재반입되거나 통과하지 않는가를 정상적으로 사찰할 수 있는 검증절차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남북 동시사찰, 그리고 비핵화를 넘어 '한반도 비핵지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재확인 한 것이다. 현 단계에서의 검증은 작년 6월 신고된 핵시설에 대해 작년 10월 북미가 합의한 방법으로 검증하는 것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임기 막판 고농축우라늄(HEU) 의혹을 다시 꺼내고 검증 체제 구축을 강조하는 것이 오바마 행정부에 영향을 주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포석으로도 풀이된다. 부시 행정부와는 다른 접근을 해야 검증 문제가 풀릴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외무성 성명 발표 날 들려온 몇 가지 소식들도 성명에서 읽혀지는 기류와 맥을 같이 했다. 북한은 한국 당국자들이 영변 미사용 연료봉 실사를 위해 15일 방북하는 것에 동의했다. 또 2003년 마약밀수 혐의로 체포한 일본인을 이날 출국시켰고, 요도호 납치범 중 한 명의 14살짜리 아들도 일본으로 보냈다. 북미관계 급진전에 발목을 잡을 것으로 보이는 한국과 일본에도 제한적이나마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이는 한국·일본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북미 협상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커 보인다. 오바마 행정부에 보낸 메시지인 것이다. 북한이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에 김계관 외무성 부상의 참석을 타진했다는 것도 중요한 대목이다.
이처럼 북한은 오바마 행정부 초기 강경책을 통한 신경전 보다는 원칙적이지만 적극적이고 우호적인 태도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일종의 북한판 '터프 외교'에 시동이 걸린 것이다.
▲ 13일 미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열린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준 청문회 ⓒ로이터=뉴시스 |
클린턴 국무, '북핵 시급성' 강조…우선순위 밀리지 않을 듯
북한이 힘을 쓰자 오바마 차기 행정부도 일단 줄을 단단히 잡고 버텼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후보자가 의회 청문회에서 원칙적인 입장을 밝힌 것이다.
클린턴 후보자는 "시리아 등에 대한 북한의 핵기술 이전 의혹 등을 중단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하겠다"며 "북한과 이란의 핵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시급성을 갖고 행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클린턴은 또 "나와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은 6자회담이 북핵 문제를 종식시키는데 있어 장점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서 "6자회담을 통해 미국은 북한과 양자접촉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현재 북한과 진행해 온 협상 기록을 검토하고 있다"며 "우리의 목표는 북한의 핵을 종식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지금 중국이 우리의 밀접한 동맹인 한국과 일본과 더불어 보여주고 있는 역할로 미뤄볼 때 6자회담은 북한이 바르게 행동할 수 있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는 매개체라는 강력한 믿음을 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터프하고 직접적인 외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과 그런 외교적 노력이 결여됐을 때 초래될 실패한 결과를 음미하려면 여러분은 북한과 이란, 중동, 발칸국가들을 지켜보면 된다"고 밝혔다. 아울러 "비확산의 토대인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를 지탱해 나가는데 지도력을 발휘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시급성"이다. 중동 사태로 인해 북한 문제가 후순위로 밀릴 것이라는 일각의 관측을 무너뜨리는 말이다. "NPT 체제 지탱"은 북핵 해결이 시급한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그러나 "북한의 핵기술 이전 의혹"을 얘기한 것은 부시 행정부에서 제기된 문제들도 그냥 넘어가진 않겠다는 뜻이다.
눈에 띄는 것은 '오바마-바이든 플랜'에 나온 '터프하고 직접적인 외교'를 언급하면서도 "6자회담을 통한 북한과의 양자 접촉"을 말했다는 점이다. 클린턴 국무장관이 6자회담과 북미 직접 외교를 어떻게 조화시킬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이처럼 클린턴 후보자가 청문회에서 내비친 북핵 인식과 전략은 부시 행정부의 그것과 오바마 행정부의 접근법이 혼합되어 있다. 그만큼 아직까지는 검토 단계에 있어서 신중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북 포괄적 접근의 신봉자로서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특사로 유력한 웬디 셔먼 전 대북정책 조정관이 클린턴 청문회에 배석한 장면은 힐러리 장관이 어떤 길을 택할지 강력히 시사했다.
MB 외교 자문단 "오바마, 북핵 특사 서두르지 마라"
<조선일보>의 14일자 보도에 따르면 한국의 이명박 정부도 힘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신문은 지난주 미국을 방문했던 이명박 대통령이 민관 합동 외교자문단이 오바마 차기 행정부 관계자들에게 "미북 고위급 대화는 기본적으로 찬성하지만, 남북관계와 6자회담이 모두 정체된 상황에서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하는) 대북 특사 등을 너무 서두르면 북한에 좋지 않은 신호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 달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방미단은 한승주 전 외무장관,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 이정민 연세대 교수, 김성한 고려대 교수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지난 6~10일 오바마 당선인 측의 싱크탱크와 커트 캠벨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내정자 등 차기 행정부 고위직 내정자들과 전략대화를 가졌다.
오바마 행정부의 조기 특사 파견을 만류했다는 사실은 이명박 정부가 북한과 미국이 예고하고 있는 '터프 외교'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힘을 쓰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북미 직접 협상에 어깃장을 놓았던 김영삼 정부의 행태를 답습할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오바마 행정부가 직접 대화에 적극 나서는 쪽으로 결론을 내릴 경우 통미봉남 현상이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방미단의 한 인사는 또 "부시 행정부 말기의 대북협상처럼 북핵 문제를 잘게 잘라서 하나하나 관리하는 식으로 하지 말고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큰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전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큰 그림'은 이명박 대통령이 작년 말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제대로 된 근본적인 전략을 세워보라"며 통일부를 질타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은 북한의 태도가 변할 때까지 먼저 나서지 않겠다는 '악의의 무시 전략'과 다름없다는 해석이 우세했다.
방미단의 '큰 그림' 주문은 오바마 행정부도 한국의 이 같은 전략에 동승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클린턴 장관 후보자가 '시급성'을 강조한 것으로 볼 때, 한미 양국의 입장 차는 결국 양국의 갈등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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