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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타이천황은 무령왕의 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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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타이천황은 무령왕의 아우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40>

(2) 야마토 왕조의 중시조, 게이타이천황은 무령왕의 아우

게이타이 천황과 무령왕이 친형제임을 증명하는 중요한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있는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 : 청동제)입니다. 이 인물화상경은 503년 무령왕이 아우인 게이타이 천황에게 보낸 것으로 고증되고 있습니다.

이 화상경에는 "계미년(503년) 8월 10일 대왕의 연간에 남동생인 왕을 위하여 오시사카궁(忍坂宮)에 있을 때 사마께서 아우님의 장수를 염원하여 보내주는 것이다.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두 사람을 보내어 최고급 구리쇠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도다."13) 라고 적혀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이 화상경을 보낸 사람은 사마왕 즉 무령왕이고 503년경의 천황은 바로 게이타이 천황이기 때문입니다. 즉 무령왕과 게이타이 천황이 친형제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개중비직이란 강력한 힘을 가진 직책이라고 합니다.

▲ [그림 ③] 쓰따하치만궁(隅田八幡宮)에서 발견된 인물화상경(人物画像鏡)

이 동경(銅鏡)은 와까야마현(和歌山縣) 쓰따하치만궁(隅田八幡宮)에서 발견된 방제경(倣製鏡) 즉 한나라 때의 거울을 모방하여 만든 거울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기록된 계미년을 443년으로 보는 설과 503년으로 보는 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거울을 보낸 사람이 사마왕으로 분명히 나와있기 때문입니다. 무령왕의 재위연도는 501년에서 523년입니다. 443년이 될 수가 없는 것이죠. 즉 이 거울을 보낸 주체가 무령왕인 사마(斯麻)이고 그는 이것을 일본의 왕(왜왕)에게 보냈으며 그 왜왕은 무령왕의 아우님인 것만은 확실하다는 얘기죠. 그렇다면 무령왕의 아우님은 게이타이 천황이 아니면 인교오 천황에서 유라쿠 천황 가운데 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무령왕은 재위기간이 501년에서 523년이므로 해당되는 인물은 게이타이 천황밖에는 없는 것이죠.

그런데 『일본서기』에 따르면, 503년은 당시 천황은 부레쯔 천황(武烈天皇)이고 게이타이 천황은 507년에 등극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게이타이 천황의 재위연대가 대체로 3년 정도의 오차가 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이 부레쯔 천황은 유라쿠 천황과 동일인이라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즉 유라쿠의 일대기를 부레쯔 천황의 일대기에 분산시켜 놓았다는 것이죠. 이상하게도 이 두 사람의 별칭은 히도이수메라미고토(ひどいすめらみこと) 즉 대악천황(大悪天皇)입니다.

뿐만 아니라 게이타이 왕의 본래 휘(이름)는 오오또(男大迹)라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이 말이 동경에 적혀있는 남제왕(男弟王)에서의 발음인 오또(男弟)라는 발음과 닮아있기도 합니다. 게이타이 천황은 계보상으로는 26대로 되어있지만 새로운 왕조를 연 인물로 현 천황가(天皇家)의 개조(開祖)로 알려져 있죠.14)

이 사실(게이타이 천황 = 무령왕의 동생 = 곤지왕의 아드님)은 열도를 크게 긴장시킨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대응을 못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대응해야할 지를 모르는 상태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전혀 엉뚱한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게이타이 천황을 「오또」라고 하는데 이것은 『고사기』에 나타난 왕명인 '호토(袁本杼 :ヲホド)라는 발음과 차이가 난다는 점 등을 들고 있습니다.15) 즉 6 세기 초에 있어서의 발음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지요. 어떤가요? 이 발음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위의 사실이 변할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엔 이 정도의 내용으로 위의 사실을 부정하기는 무리입니다. 왜냐하면 발음은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 사실상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위의 사실로 인하여 그 이전에는 게이타이 천황이 기나이(畿內) 세력의 저항에 부딪쳐, 장기에 걸쳐 나라(奈良) 분지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설도 힘을 잃게되었습니다. 즉 계미년(503년) 8월 10일 게이타이 천황이 야마토 지역의 오시사카궁(忍坂宮)에 있었다는 말이 되므로 이 때는 이미 게이타이 천황이 나라지역으로 입성을 했다는 의미가 되지요.

제가 볼 때는 열도의 사학계도 불필요하게 이 사실에 대항하는 이상한 논리를 찾을 것이 아니라 두 나라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반도의 사학계도 게이타이 천황과 무령왕과의 관계를 넘어서 한일 고대사의 새 장을 열어 쥬신의 관계사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가야 합니다.

이제는 좀 더 본질적으로 들어갑시다. 여기서 왕 들간에 서로 주고받은 것이 왜 하필이면 청동거울 즉 동경(銅鏡)이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이 동경은 앞서 본대로 부여왕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즉 전문가들에 따르면, 부여 사람들에게 이 청동거울은 '태양같은 왕'을 상징하는 중요한 징표라고 합니다. 앞에서 이미 무령왕의 거울과 닌도쿠 천황의 거울이 형제처럼 닮았다는 것을 보았지요? 이제 그 거울이 다시 게이타이 천황이 가진 거울과 같다는 것이죠. 즉 닌도쿠 - 무령왕 - 게이타이 등의 왕의 상징물들이 모두 일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 줄기 두 연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죠.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에 나타난 고분 동경의 공통점은 중앙에 볼록한 반구체(半球体)가 있고 주변에 작은 돌기가 이를 에워싸고 있는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청동거울의 직선 길이는 23.45cm 로 비교적 큰 것으로 수대경(手大鏡)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1971년 한반도의 부여에서 무령왕릉이 발굴되었습니다. 무령왕릉에서는 3개의 동경이 발견되었는데 동경 바로 아래에는 금제 뒤꽂이 장식이 발견되었습니다. 즉 거울로 시신의 얼굴 부분을 덮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뿐만 아니라 동경의 중앙 반구체에는 가죽으로 된 끈이 붙어 있어서 이 거울은 가슴에 차고 다녔을 것으로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추정합니다. 만약 왕이 동경을 가슴에 차고 거리를 행차하게 되면 빛을 반사하는데 뛰어난 청동의 성질로 말미암아 아직 태양이 행차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아니면 백성들은 왕의 몸에서 태양의 빛이 사방으로 퍼져 가는듯한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겠죠.

▲ [그림 ④]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동경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수대경은 이미 많이 부식되어 글씨들이 훼손되어 알 수가 없지만 의(宜), 자(子), 손(孫) 이라는 글씨가 판독되어 이를 의자손수대경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제 정리합시다. 한반도의 기록으로 보면 개로왕(455~475) - 곤지 - 동성왕(479~501)·무령왕(501~523) 등의 관계가 부자의 관계이고 게이타이 천황과 무령왕이 친형제간입니다. 그러니까 개로왕 - 곤지왕(유라쿠 천황) - 동성왕·무령왕·게이타이천황 등의 가족관계가 성립이 됩니다.

구체적으로 개로왕(蓋鹵王 : 455~477)은 한성백제의 마지만 왕으로 장수왕의 침공으로 피살되고 그의 맏아들인 문주왕(文周王 : 475~477)은 피신하여 웅진에서 즉위합니다. 곤지왕은 개로왕의 차남인데 국난을 피해 아들인 모대(牟大) 왕자와 함께 일본에서 살고 있었고, 반도에서는 문주왕의 아들인 삼근왕(三斤王 : 477~479)이 왕위를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혼란 속에서 피살당하게 되자 곤지왕은 자신의 첫째 아들인 모대왕자를 백제로 보내 왕위를 잇게 하였으니 이 분이 바로 동성왕(東城王 : 479~501)입니다. 이후 곤지왕의 차남인 사마(斯麻)가 동성왕을 이어 무령왕(武寧王 : 501~523)으로 즉위했고 곤지왕의 삼남인 오오또(男大迹)가 일본에서 등극하는데 그가 바로 제 26대 게이타이(繼體) 천황(500?~531)입니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기록대로 보자면 게이타이 천황은 오진 천황의 5세손인데 게이타이 천황의 친형이 바로 무령왕이므로 오우진 천황은 분명히 무령왕에게도 5대조 할아버님이 됩니다. 따라서 개로왕(455~475) - 곤지 - 동성왕(479~501)·무령왕·게이타이 천황(500~531)등의 계보가 성립되고 개로왕의 할아버지가 오우진 천황일 가능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물론 『일본서기』의 기록이 잘못되었을 경우에는 고려할 필요가 없겠지요. 열도에서는 게이타이 천황이 오우진 천황의 5세손이라는 사실을 신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곤지왕 - 무령왕·게이타이 천황의 관계이기 때문에 결국은 개로왕 - 곤지왕의 계보로 환원되는 것이죠.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드님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지요. 즉 동성왕·무령왕·게이타이 천황은 모두 곤지왕의 아드님들로서 이들은 모두 형제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3) 베일에 쌓인 천황가

지금까지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 일본 천황가의 계보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길을 돌고돌아 이제 다시 오우진 천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오우진 천황이 개로왕의 할아버지인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개로왕의 할아버지가 구이신왕(420~427)이므로 그러면 오우진 천황이 구이신왕이 됩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오우진 천황의 행적은 한사람의 행적으로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우진 천황의 서거 당시 나이가 110세 이르고 오우진 천황이 근초고왕(346~375)의 아들로 묘사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즉 진구황후의 아드님이 오우진 천황이라고 하는데 진구황후의 행적은 근초고왕의 행적과 일치하므로 오우진 천황은 근초고왕의 아드님이거나 직계 후손이라는 말이 됩니다.

진구황후의 서거 시의 나이가 100세, 오진 천황의 나이는 110세로 상식적으로 볼 수 없죠. 따라서 일본 천황의 계보를 추적하는 것은 개로왕까지는 정확히 추적할 수 있지만 근초고왕(346~375)대에서 개로왕(455~475)대에 이르는 346년에서 455년에 이르는 대략 110여년간의 시기를 정확히 알아내기란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 시기의 일부 백제왕들의 업적을 일본에서는 진구황후 - 오우진 천황이 나눠가지게 된 셈입니다. 따라서 백제의 역사와 일본의 얽히고설킨 역사가 한반도 쪽에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추적 가능한 형태로 존재하는데 반하여 일본에서는 진구황후 - 오우진 천황에 함께 뭉쳐져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본서기』의 기록으로 본다면, 진구황후의 기사에 등장하는 반도부여의 제왕들 즉 백제왕은 근초고왕 , 근구수왕, 침류왕, 진사왕 , 아신왕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구황후의 업적은 이들 제왕들의 일대기를 토대로 조합한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즉 이들의 업적을 토대로 가공의 인물인 진구황후를 내세우고 진구황후가 이들에게 명을 내려서 수행하는 듯이 묘사한 것이라는 말이죠.

특히 『일본서기』에 나타난 오우진 천황에 대한 기록은 매우 부실합니다. 오우진 천황은 270년(太歲 庚寅) 즉위한 것으로 되어있고 서거 연도는 311년으로 되어있는데 이 때 나이가 110세이므로 70세에 즉위한 셈이 됩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차라리 시간 계산을 근초고왕을 기점으로 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오우진 16년의 왕인박사의 일본 도래 기록은 아신왕(392~405) - 전지왕(405~420) 대로 나타나므로 『일본서기』를 분석할 때는 백제왕을 중심으로 하는 편이 오히려 더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일본서기』는 연대가 심하게 조작되어있지만 큰 흐름에서는 고도의 일치성이 나타나는데 이는 남부여(백제) 왕계를 기준으로 할 때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오우진 천황은 대체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으로 보는 편이 타당합니다. 오우진 - 닌도쿠대에 이르러 세계 최대의 고분이 나타나는 것은 이 시기에 강력한 권력이 등장했음을 의미하고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은 근초고왕(346~375) 사후 나타난 현상으로 추정됩니다.

지금까지 저는 베일에 쌓인 열도의 역사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그 베일을 걷어낼 수 있는 고리 하나를 찾은 셈입니다. 비밀이 많고 복잡한 부여의 역사에서 의외로 백제의 폭군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개로왕과 그의 아드님인 곤지왕자가 바로 이 모든 비밀을 풀어갈 열쇠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상 폭군으로만 인식되었던 개로왕이 부여의 중흥을 위해 많은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날로 강화되는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여 백방으로 노력한 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로왕은 날로 심각해지는 고구려의 강한 압박에 대비하여 열도의 강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등극하자마자 아드님인 곤지왕자(곤지왕)를 송나라로부터 좌현왕으로 관작을 받게한 후 '사실상 후계자'로 만들어 열도(일본)로 보냅니다. 개로왕은 일찌감치 모든 준비를 완료하여 자기의 분신을 일본으로 보낸 것입니다. 만약에 이 같은 판단이 없었다면 아마 백제(반도부여)는 475년으로 영원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열도에 의해 백제는 다시 소생하는데 이 열도가 강력한 백제의 배후세력이 되게한 것이 바로 개로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로왕은 현재 일본 천황가의 개조(開祖)인 게이타이 천황(繼體天皇)의 할아버지가 된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필자 주

(13) "癸未年八月日十 大王年 男第王 在意柴沙加宮時 斯麻 念長壽 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 取白上銅二百旱 作此鏡"
(14) 김현구, 앞의 책, 27쪽.
(15) 이와 관계된 언어적인 문제는 ハ行転呼音、唇音退化 등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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