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밝힐 것은 나는 민주노동당 당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평소 존경하는 이수호 선생의 요청으로 분당 사태 이후 민주 노동당의 <혁신-재창당 위원회>에 관여하고 있으나 그건 정파적 기준에 묶이지 않고 문호를 열어 당 바깥에 있는 진보인사의 조력을 구하고자 하는 비상대책위의 결정과 관련이 있다. 물론 나로서는 무엇보다도, 맑은 영혼을 가진 이수호 선생에 대한 내 개인적 존경이 가장 크게 작용한 선택이다.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칼럼에, 이미 오래 전부터 이건 정말 아니다 싶어 "당 간판도 내릴 생각하고 당명까지 포함해서 화끈하게 바꾸라"며 당 관계 인사라면 차마 하지 못했을 적나라하고 강도 높은 비판들을 지속적으로 해왔던 입장에서, 막상 민주 노동당이 어려움에 처하자 도리어 더 깊은 애정이 생기고 말았다. 내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애정과 공개변론
이렇게 말하면 그간 진보정치의 발전을 위해 힘겨운 시절을 보내온 민주노동당 당원들조차 어이없어 할지 모르나, 세상에 내놓고 한껏 자랑할 만큼 그리 잘 나지는 못했어도 도저히 손을 놓고 돌아설 수 없는 자식을 향한 마음과 같다. 못나 보이는 자식이 더 아련하다. 아마, 개인적으로는 20년의 목회를 해왔던 사정도 작용했을지 모른다. 예배당 구석에서 남 몰래 울면서 기도하는 신도가 더 가슴에 깊이 엉긴다.
민주노동당이 길러낸 노회찬, 심상정 두 스타 정치인도 본래의 둥지를 떠나 진보신당의 공동대표가 되었다. 민주 노동당은 여전히 더 많은 정치인을 가지고 있으나, 세상의 명성으로 치자면 이제 그만한 스타 정치인도 없는 형편이다. 더군다나 이 나라의 내로라 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혁신과 변화를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민주노동당을 "붕괴"했다고 선언하고, 진보신당을 집단적으로 지지하는 선언을 내놓는다. 민주 노동당은 이렇게 겉으로만 얼핏 보면, 외롭게 보인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나의 애정이 더욱 깊어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건 결코 정치적 동정이 아니다. 아무리 야단칠 것이 있다 해도, 그래서 '욕 좀 먹어야 싸지' 할 수 있다 해도 민주노동당의 모든 것이 다 부정되고 그 변화의 가능성마저 절대적으로 차단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지적받고 열심히 고쳐야 한다. 그러나 잘못이 있다는 것이 곧 그 존재의 미래가 더는 없다고 결론짓는 것으로 직결되는 쪽으로 몰아간다면, 그런 논법은 자신의 판단은 최종적 절대성이 있다는 오만이다.
나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새삼스러운 애정은, 과도한 곡해와 정확하지 않은 비난,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현재 진행형으로 분명하게 이뤄지고 있는 변화의 흐름을 계속 부정하는 자세에 대해 더는 침묵할 수 없는 한 지식인의 민주노동당 공개변론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진심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다.
"민노당 붕괴론"에 기초한 진보신당 지지는 현실진단에 오류
나는 지식인 일부의 진보신당에 대한 지지에 대해 이견을 달거나 논란을 벌일 의도는 없다. 그건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의 확고한 신조요, 고뇌에 찬 선택이라는 점에서 존중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붕괴론에 기초한 진보신당의 지지"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붕괴하지 않은 존재를 붕괴했다고 전제하고 출발하는 진보정치는 기초적인 현실진단에서 이미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진보는 이 변화를 주시하고, 그것이 어떤 방향을 잡아나가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데서부터 비롯되는 희망이다. 진보신당의 실험만이 세계사적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는 민주노동당의 변화도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면, 그건 독선의 위험을 안고 있다. 21세기적 현실의 변화는 주목하면서, 자신들이 오랫동안 정치적 헌신을 해왔던 조직의 새로운 변화는 보지 못한다면 그건 "변화"에 대한 스스로의 철학에 짚어볼 대목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분당의 충격은 역설적으로 민주노동당에게 진화의 실질적인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상황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은 지금 분명 진화하고 있다. 비조직적 주장으로만 그쳐왔던 진보적 대중정당으로서 혁신과 재창당의 틀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진화의 증거다. 상처와 위기는 대응 여하에 따라 한 개인이든 조직이든 소멸과 진화의 기로에 서게 한다. 민주노동당은 분당 이후 조직적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일체의 금지된 성역을 용기 있게 해체해버리고 있다. 그 어떤 주장도 논의와 성찰의 대상이 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바닥으로 내려앉은 존재가 더 망설일 까닭이 없다.
진화하는 민주노동당
물론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과제가 아니다. 한 정당에서 진화란, 대중 속에 들어가 배우고 익히며 오늘의 절박한 요구가 무엇인지 새삼 깨우쳐 일어설 수 있을 때 성취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다. 민주노동당의 시도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그간에 축적해온 민주노동당의 성과나 과오 가운데 버릴 것과 지속 발전시켜야 할 것을 명확히 가려내고 새롭게 태어나는 일을 위해 진력을 다할 뿐이다. 성공과 실패를 지금 전망하는 것은 나의 능력과 영역 밖의 일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실제로 하고 있는 이를 향해, "저자에게는 희망이 없어"라고 낙인찍는 것은 인간과 역사의 진보를 믿는 이들이라면 취하지 않을 자세일 것이다.
여기서 성서를 거론하는 것이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 비유 가운데 한 지혜로운 율법학자의 이야기는 의미 있다. "하나님 나라는 지혜로운 율법학자가 자신의 창고에서 쓸 것과 쓰지 못할 것을 가려내는 것과 같다"고 한다. 하나님 나라를 진보적 대안의 미래로 번역한다면, 총체적 부정이나 총체적 변명 내지는 긍정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잘해온 일과 잘못한 일을 정확하게 깨우칠 때, 어디로 마음과 몸의 힘을 가득 실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해결되어 간다.
무엇이 문제였던가?
갈라지기 전 민주노동당은 지난 시기, 진보정치를 위해 여러 가지 소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현재 진보신당에 몸을 담고 있는 이들의 기여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대중들의 갈망과 요구, 그리고 새로운 세기가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해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데 있어서는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원인에 대한 분석은 정파주의적 갈등과 당내 주도권 다툼에서부터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자신의 철학과 주장, 그리고 당내 권력투쟁에 몰두한 나머지, 대중들이 처한 현실과 어느새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다는 점에 있다. 그건 어떤 정치조직에 있어서도 정치적 생명력이 고갈되는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대중이라는 물 속에서 빠져나온 물고기의 신세는 어찌 될 것인지 새삼 묻지 않아도 분명하다. 정작 최대로 관심과 역량을 기울여야 할 대목에서 흔들리고 만 것이다. "진보정치의 자기배반"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민주노동당 안에서 끊임없이 있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조직이 지나치게 정파적으로 흐르면서 동맥경화증에 걸리고 결국 내부적 해결능력이 한계에 도달하면서 오늘의 지경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정파의 존재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획일주의 정당이 아닌 한, 민주정당에서 정파의 존재는 당연한 것이다. 정파적 경쟁과 쟁투를 민주적 조직운영과 철학에 의해 풀어나가지 못한, 진보신당을 차려나간 세력을 포함해서 그간의 민주 노동당 지도부의 책임이 가장 크다.
각기 잘못한 것이 있다면
너무 많은 분석을 하기보다는 이야기를 단순화해보자. 분당 이전에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조직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세력은 논쟁의 민주적 환경을 만들기보다 집단적 선택을 중심으로 조직을 이끈 과오가 있다. 이것은 당내 소수파에게 심각한 좌절감을 안기는 행태이며, 당의 민주적 진화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는 태도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아무리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믿는다 해도, 정파적 입장이 다른 세력과 깊고 깊게 서로 숙의하는 과정을 건너뛰고 이른바 쪽수로 문제를 해결하려드는 자세는 진보정당 내부의 논의수준을 떨어뜨리고 마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에 대해 다소 과하지 않나 하는 언급을 했다 해도 홍세화 선생 같은 이가 이러한 현실에 기가 질려 당을 떠나게 한 것은, 기존의 당 주도세력이 억울하다고만 하지 말고 깊이 돌아봐야 할 바다.
그렇다면 소수파는 온당했는가? 당내 권력투쟁은 당연한 상식이며, 이런 조직적 비 탄력성이 있다면 그걸 안에서 스스로 어떻게든 깨나가는 것이 그 정파의 성장 전략이 되어야 한다. 조직 내부에서 되지 못한다면, 조직 밖 대중과의 연대와 조력에 의해 내부의 틀을 변혁시키는 노력을 펴는 것이 마땅하다. 민중경선은 그런 차원에서 시도의 의미가 있었으나 이를 반대한 것은 사실 국외자로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데 분당을 결행한 세력은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당의 민주적 운영과 관련한 논쟁을 지난 대선에서 대중적으로 문제가 된 바가 없던 "종북주의" 논쟁으로 이끌고 가면서, 당 밖의 정치적 적대세력과 손을 잡고 내부의 경쟁자들을 처단해버린 격이 된 가장 우울하고 탄식할 사태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형식논리상 가정을 해서 설사 종북주의 논쟁의 진실이 타당하다 해도 그것은 어떻게든 내부에서 치열한 쟁투의 과정에서 정리해야 하는 사안이지, 한반도의 분단과 냉전의 현실이 미해결인 상황에서 공정한 자기변호가 쉽지 않은 상황을 만들어 분당의 한 이유로 삼은 것은 옳지 않다.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은, 진보신당의 주체로 나선 노회찬, 심상정 전 의원 두 사람이, 민주노동당이 종북주의 논쟁에 휩싸여 있을 때 "자주파를 그렇게 단정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식의 발언만으로 그쳤을 뿐, 그런 정치적 낙인이 나도는 상황에 대해 대체로 방관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두 정치인이 취해야 할 자세는, 현재 민주노동당에 소속되어 있는 정치인들을 종북주의 정치인으로 보는 것에는 단호하게 반대하며 서로의 갈 길이 다르다 해도 이는 용납할 수 없다는 논지를 펼쳤어야 했다. 문성현 전 민주노동당 대표가 공개서한을 통해 이를 요청했음에도 아무 답변이나 후속 조처가 없었던 것은 스스로 돌아봐야 할 바가 아닌가 싶다.
이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은 두 정치인을 개인적으로 아끼고 잘 되기를 언제나 성원하는 입장에서 쉽지 않다. 그러나 공적 책임을 감당하는 위치에 있는 정치인인 만큼 정리가 필요한 대목이 아닐까 싶다. 이른바 "종북주의"는 북의 정치적 지령에 의해 판단과 행동을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동지들이었던 현직 의원들이 그런 오해와 비난을 받을 상황과 가능성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정치적 오해의 여지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의리와 정의의 문제가 된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어찌해야 하나?
그간의 경위와는 별도로, 이제 진보진영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해서 고민스러운 선택에 봉착하고 있다. 대중 조직 차원에서도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경쟁자 내지는 적이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민주노동당 내부의 논란이 격렬해졌을 때 조희연 교수가 이러한 사태를 내다보고 분당만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간곡히 권고했던 것은 옳다. 두 세력의 입장과 견해를 구체적으로 구분하지 않는 대중들 앞에서 진보정치세력이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아직 미력한 처지에 있는 진보정치는 스스로 타격을 자초하는 셈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게든 최선으로 감당해 나가야 할 것이다. 서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대목이 있을 것이다. 피해갈 수 없는 지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서로 희망을 만들어 내는 경쟁에는 치열한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대중들이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결국 결판은 거기에서 난다.
서로 잘하고 있는 것은 칭찬할 수 있는 대범함이, 문제가 있다면 차분한 논쟁으로 제기하는 모습을 갖추는 것이 정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간단히 거론한다면,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이 그간 관심을 크게 쏟지 못했던 생태, 여성 등의 가치를 주목하고 나선 것은 소중한 진전이다. 그와 함께 젊은 진보적 대중들과 문화적으로 함께 하고자 하는 노력 역시 진보정치 전반의 발전을 위해 격려되어야 한다. 민주노동당 역시 진보신당과 다를 바 없이, 대중들의 숨결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가치, 문화, 연대의 확대 등에 노력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서로 닮아가고 있는 대목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애초에, 민주 노동당이라는 모태에서 태어난 쌍생아이니 그건 당연할 것이다.
진보신당이 인권논란이 이용될 가능성을 차단하는 전제 아래 북한의 인권문제를 제기하고 거론하기 시작한 것도 지난 시기의 진보진영의 자세로 볼 때 용기 있는 일이다. 이 문제는 향후 통일의 과정에서 피해갈 수 없는 정치사회적 논쟁과 진보의 사안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 노동당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짚을 것은 짚어나가는 자세가 당연히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진보신당이 정강정책 제안에서 국가보안법에 대해 일체 언급이 없고, 한반도 정세와 관련해서 "미국의 제국주의 지배와 북한의 핵무장"을 같은 비중으로 거론한 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진실을 유기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북한의 핵무장은 당연히 폐기되어야 하나, 그것은 북한의 독자적 선택이 아니라 미국의 지배전략에 대한 대응이라는 요소가 중심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진보신당의 인식에는 상황의 선후와 책임의 비중 논란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진보 대연합의 틀을 향해
이러한 문제들은 물론 계속 토론하고 정비해나가야 하는 일들이다. 그리고 서로가 지속적으로 대립해야 할 원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큰 틀에서 보면, 역사의 진보적 성장을 위해 이런 과정도 거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일 수 있다.
총선이 끝나고 나면 두 당의 운명도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진보진영의 변혁적 재구성이 보다 본격화되는 시점도 그때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소모적인 감정대립은 피하고. 진보정치 전체의 궤멸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하는 큰 안목과 자세가 절실하다. 폭주하는 자본의 권력과 제국의 지배, 그리고 동북아시아 주변 정황의 불안이 엄존하고 있는 이 나라의 형편과 세계적 현실에 비추어 봐도, 진보정치의 단합과 역량 결합은 여전히 현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진보대연합의 가치는 그래서 귀하게 지켜야 한다.
이명박 정권 아래, 이미 그 징조가 뚜렷해지고 있는 집권세력의 무능력은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며 대중들은 날이 갈수록 절망해갈 것이다. 노무현 정권 시절 실정에 총체적인 책임을 져야 할 열린우리당의 후신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진 통합민주당은 총선국면에서 아무런 새로운 비전과 정책을 내놓지 못한 채, 상대의 실점에서 얻은 "견제론"에 안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때에, 진보진영 전체는 정치적 지혜와 성장을 통해, 이 나라 대중들의 미래에 희망을 만들어내야 할 책무가 있다. 진정한 정책 경쟁과 미래에 대한 대안 제시는 지금 민주노동당과 진보 신당만이 하고 있지 않은가? 경쟁하되 적대하지 말고, 구별되되 서로 보완해가며 각기 잘 할 수 있는 것을 잘하면서 진보정치의 보다 큰 땅에서 만날 준비를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서로 손을 놓고 돌아서버리는 것보다 서로 손을 잡고 뭉쳐서 해야 할 일이 더 많다고는 생각지 않는가?
한때 서로에게 가졌던 정치적 애정, 상황이 달라졌다고 또는 그간 지내보니 더는 못 견디겠다고 그걸 부디 가볍게 버리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진보세력은 그 무엇보다도 역사에 대한 책임을 더 크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아닌가? 진보정치의 정치적 인격은 그렇게 해서 대중들의 영혼 속에 깊이 뿌리내려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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