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보수언론들이 새로 프랑스의 대통령이 된 니콜라 사르코지와 작년에 대연정의 '얼굴마담'으로 등극한 앙엘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우파적·친미적인 성향에 열광하고 있다. 대륙유럽의 쌍두마차라 할 수 있는 두 나라 정계가 우파의 주도에 의해 재편되는 모습을 두고 과감히, 그리고 거의 일제히 "유럽이 우향우하고 있다"는 해석을 덧붙였다.
그러나 지금 독일과 프랑스의 정가에서는 한국 보수논객들의 해석과 주장에 이반하는 현상이 진행중이다. 조금 부지런하고 폭넓은 소식통을 갖추고 있는 언론이라면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미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팩트(fact)이기에 보도대상에서 의도적으로 제외시키거나 간단한 가십거리로 삼고 있을 뿐이리라.
브레멘의 성공
먼저 독일. 현재 독일 정가에서는 소위 '구좌파'인 사회민주당(SPD)이 남기고 간 좌파정치의 공간을 사회민주주의 좌파정치의 이상을 추구하는 세력이 신속히 메우고 있다. 그들의 움직임은 주요 언론들의 핵심적인 관심사이며, 국민들도 삐걱거리는 대연정의 진로를 응시하면서, 동시에 이들 '신좌파'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이미 재작년에 필자는 <프레시안>의 지면을 통해 독일 좌파의 분열과 신좌파정당의 태동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 관련기사 : "독일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현 주소를 보다" ) 그 후 약 2년이 지났다. 그 사이 그 신좌파는 꾸준히 성장했고, 대연정의 지붕 아래에서 무시하지 못할 정치역량을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일부 언론은 신좌파의 성장 기세를 보도하며 기존의 SPD-CDU(기독교민주당)간의 양대 국민정당(Volkspartei) 구도의 재편성을 예고하고 있는 것으로까지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독일 신좌파의 정치력 성장은 최근 세 가지의 굵직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첫 번째는 지난 5월 13일에 치러진 브레멘 주의회 선거였다. 중세 한자동맹의 본거지로 잘 알려진 브레멘은 독일 북부의 대도시이자 브레멘 자체가 독자적인 주이기도 한 곳이다. 이곳은 대체로 좌파 정치세력의 아성으로 표현될 정도로 SPD의 뿌리가 깊다. 지난 정부도 SPD의 주도 하에 SPD-CDU 양당이 - 연방정부 차원과 별도로 - 주정부 차원에서 대연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번 브레멘 주 선거는 주정부와 연방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는 양당의 대연정에 대한 브레멘 주 유권자들의 평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뚜껑을 연 결과는 "SPD의 패배", "녹색당의 도약", 그리고 "신좌파의 성공" 이 세 가지로 요약됐다. SPD는 36.8%의 지지를 얻어 1당의 지위를 고수했으나 이는 지난 선거에 비해 5.5%나 낮아진 모습이었다. 정당 차원에서는 '성공'이라는 언사로 포장을 했으나 언론의 평가는 '패배'였다. 녹색당은 16%라고 하는 괄목할 만한 득표율을 올렸으며, 이는 운동정당에서 제도정당으로 진화한 녹색당이 역대 주정부 선거에서 얻은 최대의 득표율이었다. 이로써 브레멘에서 대연정은 붕괴했고 적녹연정이 들어서게 되었다.
한편 8.4%라고 하는 의미심장한 득표율을 보이며 '좌파정당(Linkspartei: 구 PDS)' 역시 당당히 주의회에 진출했다. 이는 지난 선거에서 겨우 1.7%의 득표율을 보였던 것에 비하면 의미심장한 성장이었다. 여전히 소수당임에는 틀림없지만 역사상 최초로 서독 지역 주의회에 성공적으로 진출하게 됐다는 사실은 좌파정당에게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공화국은 좌로 향하고 있다"
신좌파 성장의 두 번째 징후는 통합을 통한 조직역량의 성장이다. 그간 동독 지역에 기반을 두어 온 좌파정당과 서독 지역에서 사민당의 좌파들이 결집하여 구성한 선거대안(WASG)으로 나뉘어서 존재하던 신좌파 세력은 적지 않은 내홍도 겪은 바 있다. 그러나 얼마 전 WASG는 내부적으로 당원들의 투표를 거쳐 83.9%의 찬성표를 기반으로 좌파정당과의 통합을 결의한 바 있다.
브레멘 선거의 성공에 힘입은 신좌파 세력은 지난 5월 18일 예정된 일정에 따라 대통합을 실질적으로 결의했다. 이번에는 좌파정당 측에서 WASG와의 통합 의제를 놓고 투표를 벌였고, 그 결과 96.9%라는 압도적인 찬성율로 통합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합을 이루면 약 7만2000명의 당원을 지니게 될 이 신좌파정당은 현재 연방의회에서 의석을 지니고 있는 6개 정당 가운데 4번째 규모의 정당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통합을 통해 아직까지 정당으로서의 규모와 역량을 지니지 못했던 WASG는 소수당이지만 주선거와 연방선거에서 노하우와 역량을 쌓은 좌파정당에 힘입어 정당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좌파정당도 WASG가 서부 독일 지역에 구축하고 있는 네트워크를 이용해 구동독의 정당이라는 이미지로부터 완전히 탈피해 전국정당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양당은 다음 달 16일에 베를린에서 "좌파들(Die Linke)"이라는 이름의 통합정당으로 출범하며 이를 위한 전당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신좌파 성장세의 세 번째 징후는 여론의 동향이 좌향좌하고 있음이 조사결과 실증되고 있는 사실이다. 독일의 한 대중언론은 신좌파정당이 통합을 결정한 날 자체 여론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공화국은 좌로 향하고 있다(Die Republik rückt nach links)"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이 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자알란트 주의 경우 좌파정당에 대한 지지율이 13%에 이르러 서독 지역의 주 가운데 이례적으로 높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독의 튀링엔 주도 좌파정당에 대한 선호도가 27%로, 23%의 지지를 보이는 SPD를 앞질러 있고, 향후 양자 간의 연정의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이 조사는 독일 전체적으로 SPD가 30%, 녹색당과 좌파정당이 각각 11%씩 지지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좌파 성향의 이 3당의 지지율이 도합 52%에 이르는 것으로, 이러한 추세로 가면 다음 선거에서 적적녹 3당의 연정이 실현될 가능성을 높이는 모습이다.
트렌드와 카운터 트렌드의 균형점을 살펴라
다음은 프랑스의 상황이다. 잘 알려졌듯이 새로운 대통령 사르코지는 취임 이후 1~2주 동안 조각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우파 정부에서 좌파 정객과 중도파 정객을 과감히 핵심부처의 각료로 영입한 사실이다. 이는 사르코지의 통합정치의 일환이자 곧이어 있을 총선에서 좌파를 분산시키려는 전략의 일환인 것으로 보도되었지만, 그의 이러한 선택은 단기적인 정략적 선택이라고만 여기기에는 적지 않은 무게가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조각과 함께 사르코지는 자신의 대선공약의 실현을 향한 정책적인 방향을 모색하는 첫걸음을 떼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사르코지 정부가 가장 먼저 다루기 시작한 정책영역은 환경에 관한 것이었다. 현지 언론은 이를 예상 밖의 태도라고 바라보며 "선거전에서 27위였던 환경정책이 집권 후에는 2위로 떠올랐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이는 사르코지가 독일과 영국에게 뒤진 환경 이니셔티브를 찾으려는 노력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적어도 그것은 환경에 관한 우파식 탈규제론이나 미국식 반환경주의적 태도와 배치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문화정책과 기업정책에 있어서도 사르코지는 국가개입주의적이고 자국산업보호적인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 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태도를 진보적이라거나 좌파적이라고까지 해석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그를 무분별한 친미개방론자나 신자유주의자로 부르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면모라 할 수 있다.
진보적 정치세력이 뿌리깊은 유럽대륙 역시 세계화의 지각변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 진행되는 정권교체와 전반적인 정책기조의 변화는 분명 현실적인 필요를 반영하는 것이며, 그것은 과거의 사고에 비추어 보았을 때 우향우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관건은 그러한 변화의 경로에서 우향우의 트렌드 자체가 결론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해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필자는 신자유주의의 우경화에 맞서는 '카운터 트렌드'에 주목하며, 분명히 유럽은 '새로운 방식의 (좌우 간의) 조화'를 추구할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유럽정치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합리적인 관점은 트렌드와 카운터 트렌드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며, 결국 그것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질서의 색깔이 무엇이며 균형점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보는 것이다.
독일에서 성장하는 신좌파, 그리고 프랑스의 새 대통령이 '자기제약적인' 선택을 통해 몇몇 주요 정책영역들에서 애써 우파적인 구미에서 벗어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두 나라 모두 좌우 하모니를 향해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현상들이다.
이러한 실상을 애써 외면하면서 "유럽이 우향우하고 있다"는 식의 피상적인 단정이 어느 시기 언론지상을 일제히 도배하는 모습 - 그 안에는 "그러니 우리도 더 우향우 하자"는 일차원적인 선동성 구호가 내재되어 있다 - 은 사회 모든 부문이 세계화와 선진화를 지향하는 마당에 유독 언론만이 그러한 흐름을 역행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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