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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문재인, 이제 '개헌'을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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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문재인, 이제 '개헌'을 말하라!

[박동천 칼럼] 2030년 개헌을 준비하자

언젠가 개헌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상당히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 나선 후보더러 개헌을 공약으로 내걸라고 하면 모두들 고개를 저을 것이다. 이 사이에 논리적인 괴리가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그 사람이 개헌을 입에 담으면 도처에서 정략을 의심하면서 씹어대는 바람에 건강한 논의가 시작도 안 될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와 전두환이 이 땅에 심어놓은 악성 불신 때문에, 현직에 있는 권력자가 개헌을 추진한다고 하면 영구 집권을 획책한다는 비난의 물꼬에 의제 자체가 원천적으로 떠내려가 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권좌에 앉지 않은 사람들이 개헌을 말하게 되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객담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것이 대한민국 60여 년 헌정사의 슬픈 사연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인민주권을 말로만 표방할 뿐, 단 한 번도 인민의 상향식 요구와 열망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4·19 덕분에 만들어진 1960년의 헌법과 6월 항쟁 덕분에 만들어진 1987년의 헌법이 인민의 명시적인 의사를 조금 반영했지만, 전반적인 내용은 일부 헌법학자와 국회의원들이 단기간 안에 뚝딱 방망이로 정한 바를 따랐다.

1960년의 헌법이 만약 인민 사이의 광범위한 합의를 반영해서 의회제 정부를 규정했었다면 박정희 일당의 쿠데타가 성공했을 리가 없다. 1987년의 헌법이 대통령 직선제 조항 외 나머지 내용들까지 인민에게 의사를 물어서 정했다고 한다면, 이명박 치하에서 벌어진 온갖 협잡과 사기극이 법의 이름으로 포장되는 일은 방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자기가 제 119조 2항의 저자랍시고 감히 나서는 사람도 물론 없었을 것이고, 여기 명시되어 있는 '경제의 민주화'를 처음 들어봤다고 대드는 반역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헌법을 개정할 필요는 사실 굉장히 많다. 의회제(즉, 흔히 하는 말로 '내각제') 또는 이원 집정부제와 같은 대안을 고려하자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고, 노무현 대통령이 지적했듯이 (그리고 2007년 대선 후보들이 동의했듯이)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가 어긋나서 불편한 점도 많다. 하지만 이런 쟁점들은 '개헌' 하면 바로 연상되는 식상한 주제들이고, 시선이 이런 수준에만 머무르기 때문에 개헌 논의가 나오기만 하면 배후에 정략이 숨어있다는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

▲ "안철수도 문재인도 박근혜도 성에 차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코앞에 닥친 5년의 미래만을 볼 일이 아니라, 장차 20년 50년 100년 후를 대비하는 안목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프레시안

현행 헌법을 고치거나 정비해야 할 이유는 이 밖에도 많다. 몇 가지만 열거해 본다.

제41조 1항은 "국회는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국회의원으로 구성한다"고 정하고 있는데, 이는 헌법에 들어갈 필요도 없고, 현실적으로 지켜질 수도 없다. 우편 투표는 비밀 선거와 직접 선거의 원리에 위배되지만, 투표 편의에 대한 배려가 현실적으로 우선이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마땅히 법을 고쳐야 하는 것인데, 차제에 이런 규정을 헌법에서 빼 버리고 법률로 정하는 편이 헌법의 위엄도 지키면서 법규의 유연성도 살리는 길이다.

제47조 2항은 친절하게도 정기회는 100일, 임시회는 30일로 국회의 회기에 상한선을 두고 있는데, 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독재의 유산일 뿐이다. 애당초 임시회와 정기회의 구분 자체가 필요 없는 사항이고, 30일 연속 일하다가 휴식이 필요하다면 국회의원들이 스스로 알아서 쉬면 그만이다. 이런 무의미하고 심술궂은 조항을 헌법에 넣어 두고서 사회에 무의미한 심술이 활개 친다고 한탄한다는 것은 하늘에 대고 침 뱉기와 같다.

제111조 2항과 3항, 제114조 2항은 각각 헌법재판관과 중앙선거관리위원을 대통령과 국회와 대법원장이 3명씩 선임하도록 정하고 있는데, 이 역시 독재 시대의 악독한 유물이므로 어떤 식으로든 고치는 편이 낫다. 현행 제도에 따르면, 대법원장이 대통령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 9명 가운데 7명 또는 8명이 결국 여당 편으로 치우치게 된다.

용감한 대법원장이 혹시 나와서 대통령과 다른 방향으로 헌법재판관이나 중앙선거관리위원을 세 명 지명할 수도 있겠는데, 이런 경우에는 인민으로부터 직접 선출되지 않은 대법원장이 과도한 권력을 행사하는 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상고 사건들을 재판하고, 각급 법원의 판사들을 임명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대법원장이 휘두르는 권력은 엄청나다. 여기에 더해 헌법재판관과 중앙선거관리위원을 세 명씩 지명한다는 것은 전 국민의 대표가 모인 국회가 세 명밖에 선출하지 못한다는 점에 비출 때 언어도단의 불균형이다. 헌법재판관과 중앙선거관리위원은 전원 국회에서 선출하든지, 아니면 대통령이 지명하고 국회의 동의를 얻도록 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합리적인 선임 방법을 별도로 마련할 필요가 매우 높다.

아울러 우리 헌법 체계에 숨어들어가 있는 문제점을 발본적으로 제거하려면 제8장 지방 자치 조항을 완전히 삭제해야 한다. 헌법은 제1조 2항에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인민주권의 원리를 천명하고 있는데, 이 원리에 따르면 지방 자치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기 때문에 헌법이 굳이 근거를 마련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일관적이다. 더구나 현행 헌법은 "법령의 범위 안에서 자치에 관한 규정을 제정할 수 있다"(117조 1항), "지방자치단체의 종류는 법률로 정한다"(117조 2항), "지방자치단체에 의회를 둔다"(118조 1항), "지방자치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118조 2항) 등, 온정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노골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자치가 아니라 간섭의 최대치에 해당한다. 중·고등학교에서 '자율 학습'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학습이 이뤄지고 있듯이, 지방 자치라는 이름으로 중앙 정부에 대한 예속이 제도화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방 자치 조항을 모두 삭제하고 대신에 국민의 기본권 가운데 자기 결정권을 명시하는 편이 옳다고 본다. 즉, "헌법이나 법령으로 정해지지 않은 사안에 관해 모든 국민은 자기 결정권을 가진다"는 기본권을 삽입하게 되면, 헌법에 지방 자치가 명문화되지 않았다고 해서 지방 자치를 못할 이유는 전혀 없게 된다. 그래도 뭔가 허전할 것 같아서 도저히 제8장을 통째로 삭제할 수 없다면, 지방 자치에 관한 조항을 헌법에 넣되, "지방 자치는 국민의 자기 결정권에서 나오는 당연한 귀결이므로, 지방 자치에 관한 제반 사항은 해당 지역의 주민이 주권적으로 결정한다"는 조문 하나로 족하다고 본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헌법에 관한 의견들은 굉장히 많이 나왔다. 하지만 이런 의견들이 쟁점 자체의 본령을 파고 들어가는 논의를 거쳐서 공론장에서 채택된 경우는 대단히 드물고, 정작 헌법 개정의 역사는 바람몰이와 정략과 음모로 점철되고 말았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헌법 문제를 끈질기게 오랫동안, 엉뚱한 우연에 좌우되기보다는 사안의 진실에 초점을 맞춰서 논의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공론장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본다. 앞으로 18년 정도의 기간 동안, 학자와 정치인과 조직의 대표들과 지식인과 논객과 시민들 누구라도 나름대로 세상에 대고 외칠 만큼 가치 있고 유용한 의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나와서, 뜨겁고 줄기차게 헌법 공방을 한번 펼쳐 보자는 얘기다.

특히 이 나라의 진보를 원하는 사람들이 선거가 닥쳤다고 모두 선거의 승패에 매달리는 모습은 부끄럽지 않은가? 안철수도 문재인도 박근혜도 성에 차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코앞에 닥친 5년의 미래만을 볼 일이 아니라, 장차 20년 50년 100년 후를 대비하는 안목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2032년에는 다시 대통령 선거와 국회 선거가 같은 해에 벌어진다. 그 전에 헌법을 개정해서 정비해둬야, 그 뒤부터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정치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적어도 18년 후 개헌에 대비한 논의를 시작하겠다는 말 정도는 해도 되는 것 아닌가? 그 정도 비전은 정치 공학적 잔머리와 상관 없이 내놓는 것이 지도자에게 필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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