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는 작년에 이어 두번째로 남북 당국과 민간이 함께하는 6.15 행사를 벌이고 있다. 19일부터 장장 12일간 진행되는 이산가족상봉행사도 6.15선언의 성과를 다시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상봉에는 납북고교생 김영남 씨 모자가 30여 년만에 만나게 되어 납북자·국군포로 문제 해결의 첫 발을 내디딜 수 있다는 기대섞인 전망도 나온다. 지난 6일 끝난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에서는 경공업원자재-지하자원의 유무상통(有無相通)과 남북철도 시험운행 문제에서 진전된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늘도 있다. 미국의 정보당국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가능성은 북일·북미 관계의 파탄은 물론 남북관계마저 좌초시킬 수 있는 악재로 급부상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6.15가 날아가고 금강산관광·개성공단의 중단은 물론 전쟁의 화염에 휩싸일 것'이라는 안경호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장의 10일 발언도 한나라당은 물론 6.15선언을 높이 평가하는 인사들에게서까지 비판을 받으며 남북관계의 난관을 조성하고 있다. 철도 시범운행에 앞서 서해상 해상경계선 문제 등 '군사적인 근본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북한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 이 모든 난관의 가장 획기적인 돌파구를 열 것으로 여겨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27일 예정)도 군사분계선을 넘는 그 순간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전역 군인단체들로 구성된 '국민행동본부' 회원 2000명은 15일 '6.15선언 규탄대회'를 개최했다. 이 행사에서 참가자들은 "6.15공동선언은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이며 친북 세력이 6.15 행사장에서 반미 시위를 벌이며 활개를 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극우 단체들의 이같은 행동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기 때문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소위 '보수' 혹은 '신보수(뉴라이트)'로 분류되는 단체와 정치인들이 남북관계와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부쩍 잦아진 것은 예사롭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색깔론-퍼주기론-햇볕정책실패론
보수세력 총공세의 기폭제가 된 것은 안경호 조평통 서기국장의 발언으로 당사자인 한나라당이 공격의 선두에 섰다.
이계진 한나라당 대변인은 15일 안경호 발언을 비판하면서 "국민적 지지를 잃어가는 여당을 비호하면 노무현 대통령과 여당이 더 외면받는다는 사실을 북한은 알아야 한다"면서 "정부·여당은 북한의 어처구니없는 '내정간섭'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라"고 촉구했다.
이규택 최고위원도 "한나라당뿐 아니라 국가를 욕한 사람(안경호)이 남한의 거리에서 자신있게 걸어다니고 있는데 정부와 검찰이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면서 "정부는 안 서기국장을 당장 구속하든지 추방시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심재철 의원의 15일자 개인성명이나 이재오 원내대표의 13일 주요당직자회의 발언, 송영선 제2정조위원장의 기자회견도 유사한 논지였다.
이처럼 한나라당은 안경호 발언을 계기로 '북한-정부·여당 공동 이해론'을 펴며 정부·여당에 대한 색깔론, 대북 퍼주기론, 햇볕정책 실패론 등 총체적인 대북정책 때리기를 시도하고 있다.
안경호 발언과 관계없이 대북정책의 전환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 것은 뉴라이트 계열 단체들이다. 이 단체들은 지난 13일 '새로운 대북정책 모색 정책토론회'를 열고 햇볕정책을 계승한 현 정부의 대북정책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토론회 발표자들은 ▲인권과 경제협력을 철저히 연계하는 '상호주의' ▲북핵 해결에서 미국의 CVID(완전, 검증가능,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 원칙 견지 등을 주장했다. 자유주의 연대의 신지호 대표는 이를 '신햇볕정책'이라고 명명했고, 이원웅 관동대 교수는 "노무현 정권의 핵심 세력의 대북정책 기조는 햇볕정책이 아니라 '민족공조'이며 '한미자주'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누가 그런 목소리를 불러 왔는지 주목하라'
이처럼 최근 눈에 띄는 보수 세력의 움직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의 견해를 들어봤다.
전문가들은 예상과 달리 이들의 논지 자체에 대한 비판에는 큰 무게를 두지 않았다. 조지 부시 미 행정부나 냉전 시절의 한국 정권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대선 공약에 나오는 대북정책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퇴행적인 논의에 불과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대신 전문가들은 그런 주장들이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는 최근의 현상 자체에 주목하며 남북관계에 대한 비전과 철학이 결여된 현 정부의 정책이 그같은 현상을 불러 왔다는 데에 공히 강조점을 뒀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남북한관계연구실장은 노무현 정부가 '남북관계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것을 근본적인 문제로 꼽았다.
백 실장은 "정체성이란 우리 민족의 운명과 비전을 규정하는 것"이라며 "DJ정부에서는 확고한 비전으로 화해협력을 추진하면서 남북관계의 정체성을 확실히 확립했지만 현 정권에서는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백 실장은 "남북관계를 우리 생존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받아들였던 DJ의 정책은 화해협력을 반대했던 세력들로부터 확실한 보호막을 형성했다"며 "그러나 이 정부는 그걸 더 심화·발전시키지는 못했고, 대북 송금 특검을 시작으로 DJ와의 차별성에 더 무게를 두면서 확고한 의지와 내용도 없었다"고 비판했다.
남북관계의 정체성 확립에서 그가 지적한 또하나의 요소는 미국과의 관계다. 그는 "DJ정부에서는 남북 및 한미관계에서 한쪽이 한쪽을 희생하지 않게 했다"면서 "그러나 이 정부는 남북관계에 대해 말은 많이 하면서도 실제 무게중심은 한미관계에 가 있었고 한미동맹을 통해 남북관계에 접근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6자회담이나 개성공단 등 모든 걸 미국의 주도권 아래 있게 하면서 정체성을 잃었고 그것은 결국 자충수가 됐다"며 "남북관계에 대한 리더십을 보여주면 국민들도 따라오게 돼 있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야당이나 보수 언론의 공격, 미국의 압력에 대해 '국민'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졌다"고 강조했다.
'갈지자' 대북정책, 미국 편향 정책이 화근
소장 학자인 정영철 서울대 국제대학원 선임연구원도 현 정부 대북정책의 '어정쩡함'과 한미관계-대북정책의 균형성 문제를 지적했다.
정 박사는 학술단체인 '코리아연구원'에서 12일 발표한 논평을 통해 "더 높은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추진해야 할 대북정책의 첫 단추가 대북 송금 특검 수용으로 잘못 꿰어졌다"며 "부시 행정부의 새로운 대북 정책과 북한과의 마찰 사이에서 정부의 어정쩡한 태도가 남북관계의 발목을 잡는 자충수였다"고 주장했다.
정 박사는 "북핵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사실상의 '북핵-경협 연계정책'은 전통적인 정경분리에도 어긋나는 것"이라며 "특히 대북정책 추진 과정에서 한미동맹의 문제가 제기될 때마나 튀어나오는 대통령의 갈지자 발언은 대북정책의 일관성을 떨어뜨리면서 그 누구에게도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사태를 불러왔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후한 점수를 주지 못하는 이유는 국내 개혁정책의 실패와도 연관된다"며 "개혁과 통일 세력의 연대를 파괴하고 결과적으로 통일정책 추진의 국민적 동력을 상실하는 것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서동만 상지대 교수는 <프레시안> 7일자 '한반도브리핑'에서 '평화의 지배블록'을 이야기했다. 평화의 지배블록이란 대북 화해-협력 정책을 지지하는 세력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로 DJ 정부에서는 개혁-진보세력과 중복되면서 다수파를 형성했고, 정부가 남북 화해협력 및 북핵 6자회담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토대가 됐다.
그러나 서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탄생에도 기여했던 평화의 지배블록이 용산기지 협상,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 등으로 '신뢰의 위기'에 봉착했고 균열이 초래되어 "남북 화해-협력, 한반도 평화에서 그동안 힘겹게 일궈 온 역사적 성과를 손상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권만학 경희대 국제학부 교수는 노무현 정부 대북정책의 포용성 문제를 지적했다. 권 교수는 "남북의 교류협력과 화해라는 좋은 목표가 성과를 거두려면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는 게 필수"라며 "보수의 목소리가 커져가는 상황에서 대북정책에 대한 지지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들을 끌어들여 최소한의 국민적 지지를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방북을 활용하지 못하면 '큰 부담'
이처럼 보수세력들이 기세를 올리는 상황에서 대북정책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남북-북미 관계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현 정부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많은 전문가들은 남북정상회담의 추진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말하면서도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 대신 전문가들은 눈앞에 놓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 현실적인 돌파구일 수 있다는 데에 입을 모은다. 김연철 고려대 연구교수는 14일자 '한반도브리핑'에서 평양에 가는 김 전 대통령을 '빈 손'으로 보내서는 안 된다며, 6자회담 복귀 등 북한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은 정부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앞으로 이 정부에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하더라도 김 전 대통령의 방북 등 최소한의 남은 기회마저 날려버려선 곤란하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칫 차기 정부의 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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