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은 후안 도밍고 페론(1893~1974) 집권시절 페론의 주치의로서 페론을 가장 가깝게 보살폈던 측근이자 그의 임종을 지켜본 이뽈리또 바레이로(Hipolito Barreiro) 박사의 주장이다.
바레이로 박사는 "페론의 출생에 관한 비밀과 개인적인 삶은 군부와 언론, 상류사회 지도층들에 의해 조작됐고 에비타와의 관계도 상당부분 사실과는 다르게 알려졌다"고 단언했다.
특히 두 차례나 페론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군부는 페론에 대한 모든 기록들을 송두리채 말살하고 페론의 숨은 가족사에 대한 말 자체를 꺼내는 것조차 금기로 삼았다. 그만큼 페론에 대한 과거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 자체를 철저하게 막았다는 반증이다. 왜 그랬을까?
필자가 그 유명했던 후안 도밍고 페론 대통령의 주치의였던 바레이로 박사를 알게 된 건 행운이었다. 에비타 사망 54주년(7월 26일)을 앞두고 필자가 에비타의 삶에 대한 진실을 추적한다는 말을 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역사학 교수 출신의 한 친구가 "당신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아직 생존해 있다"며 바레이로 박사를 소개시켜주었다.
지난 76년 아르헨 군부가 주목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바레이로 박사는 군 정보기관의 추적을 피해 오랜 망명생활을 했으며 민주화 이후 아르헨으로 돌아와 페론가의 뿌리 찾기에 평생을 바친 인사였다. 그는 이제 80을 바라보는 은퇴한 노의사이지만 페론의 마지막 유언을 지키려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아르헨 전국을 누비느라 연일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바레이로 박사와의 면담은 우여곡절 끝에 필자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나서 이뤄졌다. 그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기로 한다.
그 후 필자는 이 인사의 행적에 대한 사실 확인에 들어갔다. 자신의 업적을 과장되게 선전하는 경향이 많은 아르헨티노들의 특성 때문이었다. 당시 아르헨 주류언론사들의 자료 가운데서 바레이로 박사와 페론의 관계를 확인하는 기사를 찾아 복사하고 더불어 바레이로 박사가 페론 초기 특별순회대사로 임명된 후 아프리카 5개국에 파견되어 의료활동을 벌였던 사실까지 추적할 수 있었다.
또한 지난 1973년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바레이로 박사는 곧바로 페론의 주치의가 되어 페론의 임종을 지켜본 유일한 의사였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페론 대통령의 주치의와 대사라는 흔치 않은 직함을 가졌던 바레이로 박사가 필자와 친밀하게 되어 그의 속내를 털어놓게 된 동기는 지난 6월4일 페론 대통령 취임 60주년 기념식장에서였다.
페론당 고위 당직자들과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정부당국자들, 연방 상·하원의원, 추붓주 및 산타크루스주 정부관료들과 대통령궁 관계자 등이 모여 바레이로 박사가 지난 25 년동안 각종 자료들과 증언을 토대로 페론의 생가를 복원한 데 대해 정부가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자리였다. 따라서 그동안 군부가 말살해 왜곡된 페론의 과거사 수정작업이 이 행사를 기점으로 학계와 정부 주도로 활발하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 그동안 페론과 에비타 자료발굴사업에 현지학자들과 함께 참여한 것을 인정받아 감사장과 60년 전의 페론 대통령 취임기념 메달을 증정받기도 했다.
공식행사 후 오찬장에서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바레이로 박사는 필자를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더니 "페론은 집권시절 동양인 외교관들에게 특별히 관심이 많았는데 그 중에 일본 대사들과의 관계는 아주 특별했다"고 말문을 연 후 "그건 아마도 자신이 당신네들 같은 동양인 핏줄을 이어받은 인디오 혈통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는 다소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그날 오후 자신의 집으로 필자를 초대한 바레이로 박사는 그동안 소중히 간직해 온 페론과 에비타에 관한 자료들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곁에서 지켜 보았던 숨겨진 사실들을 증언해 주었다.
필자는 아르헨 현지언론들과 주류사회가 왜 후안 도밍고 페론의 탄생비밀을 아직까지 감추기에 급급했는지, 또 군부가 페론의 업적과 자료를 말살하려고 그토록 애썼는지를 밝혀 볼 것이다. 더불어 학자들 간에도 이견이 일고 있는 페론이즘(페론주의)의 실체를 해부해 볼 요량이다. 또한 페론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다는 에비타와의 관계 역시 바레이로 박사의 증언과 함께 당시의 각종자료, '에바 페론 재단' 관계자, 아르헨 노총(CGT) 기록 등을 정리해 10회 정도로 나누어 소개할 예정이다.
"페론은 동양인 피를 이어받은 인디오 후손이었다"
페론의 출신에 대한 문제는 지난 1945년 페론이 부통령과 국방·노동·복지부 장관을 겸임할 때부터 말썽이 돼왔었다. 이로 인해 페론은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고 강제 예편된 후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출신성분에 대한 공문서를 위조하고 인디오(토착 원주민) 혈통을 가졌다는 게 그 이유였다. 당시 아르헨티나 군 엘리트들은 원주민들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고 법적으로도 원주민들은 육군사관학교 입학이나 장교 임관이 철저하게 금지됐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에 와서까지 페론이 원주민 혈통을 이어 받았다는 것을 숨길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바레이로 박사는 "아르헨티나 주류사회 인사들은 아직까지도 원주민 출신의 혈통에다 사생아 출신이 역대 최고의 인기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기를 꺼리고 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하기야 초창기 남미에 정착했던 유럽 이민자들이 토착원주민들을 인간이 아닌 동물로 취급했다는 사실을 알면 그 배경을 이해할만도 하다.
페론은 군 장교시절에는 그의 가족사의 비밀을 숨겨 왔지만 감옥에서 그 대가(?)를 치른 후부터는 측근들에게 원주민이었던 자신의 생모 후안나 소사 여사에 대해 얘기하기를 즐겼다는 게 바레이로 박사의 증언이다. 페론은 자신의 가족사가 만천하에 분명하게 밝혀지기를 바랬지만 아르헨 사회는 이를 허용하지 않아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집권시절 페론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당신이 보기에 페론은 어떤 사람이었나" 하는 필자의 질문에 바레이로 박사는 "페론은 한마디로 다재다능한 군 엘리트 였다" 며 "그는 5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재능이 있어 피아노를 수준급으로 연주했고 그림에도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밝혔다. 페론은 늘 입버릇처럼 자신의 이와 같은 모든 재능은 가우쵸(아르헨 목동)와 같았던 원주민 어머니 후아나 소사 여사로부터 물려받았다고 자랑을 했다는 것이다.
페론이 파시즘에 빠진 장교였다는 설에 대해서는 "그가 1930년대 말 이탈리아에서 무관 생활을 한 건 사실이지만 대중선동을 아주 싫어하는 스타일의 내성적인 사람이었다"고 단언한 바레이로 박사는 "자신의 출신 때문인지 소외계층을 챙기고 특별히 원주민 보호에 앞장섰던 건 사실이지만 페론이 인기영합주의자는 결코 아니었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렇다면 제2차 세계대전 전후 그가 보인 행보가 친나치 쪽으로 경도되어 있었던 것 아니었냐라는 질문에 대해선 "그가 40년대 초 유럽에서 근무하면서 나치의 고급 장교들과 친분을 쌓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1941년부터 나치 패망을 미리 예견했으며 자신과 친한 독일군 장교들에게 히틀러를 떠나 살 길을 찾으라고 충고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2차대전 후 수많은 독일군 장교들과 나치 고위당원들이 아르헨티나로 망명을 오게 된 건 이때 페론이 독일에서 쌓은 폭넓은 친분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네 번씩이나 결혼하는 등 평소 '플레이보이' 적인 기질을 보인 페론의 여성 편력에 대해서 바레이로 박사는 " 페론은 여자가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특이한 체질을 가진 남자였다" 면서 "그는 장수 체질이었으나 말년에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정에 메말라 세상을 떠났다"고 페론의 은밀한 내면까지 공개했다.
"자신을 따르던 군부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되고 주류언론들로부터 외면 받아 온 자신의 과거사가 한 동양 언론인에 의해 낱낱이 밝혀진 걸 페론이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궁금하다"는 바레이로 박사는 25년이 넘게 수집한 각종 자료와 지난 2000년 자신이 직접 집필했던 '역사를 바꾼 인디오 소년 후안시또 소사'를 펴놓고 페론과 에비타의 가족사에 대한 미공개 자료보따리를 하나씩 풀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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