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여성인권을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이 효과를 보면서 초기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이전보다 여성인권침해에 대한 보고가 훨씬 늘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인권침해 사례가 늘어나는 현상을 보면 여성인권이 더 나빠졌다고 판단하게 되나 사실은 인권문제가 더욱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 여성인권침해에 대하여 인식하지 않았거나 쉬쉬하던 사례를 이제는 적극적으로 보고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즉 역설적으로 여성인권침해사례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여성인권의 문제가 개선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정확히 트렌드를 읽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이와 비슷한 트렌드를 읽을 수 있다. 즉 민주화를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이 효과를 보면서 정부의 비민주성과 실정에 대한 비판세력의 비판이 훨씬 늘어나는 현상이 그것이다. 정부비판에 대한 언론의 표현의 자유를 이전에 비해 현격히 보장해 주고, 검찰, 경찰, 국정원, 국세청과 같은 권력기관을 통한 사회통제를 풀어주면서 정부에 대한 공격과 비판이 그 강도와 빈도에 있어서 훨씬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전에 비해 민주화와 투명성이 훨씬 개선된 것을 보여주는 지표로 보아야지 민주주의가 퇴보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현재의 정권으로부터 정권의 탈환을 기도하고 있는 정치세력(언론의 표현을 빌어 이하, 보수세력이라고 표현함)은 이러한 민주화와 투명성의 증진을 마음껏 이용하여 현재의 정권을 비민주, 무능의 정권으로 색칠하는 것이 훨씬 용이해졌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보수세력이 현 정부가 무능하다고 공격하는 것은 시각에 따라 타당할 수도 있는 공격이지만 비민주적이라고 공격하는 것은 여간 억지논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현정부에 대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정체성을 밝히라고 하는 공격은 과거에 표현의 자유와 투명성이 한참 떨어졌던 시절에 정권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아니면 그러한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기에는 좀 낯 뜨거운 일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현정부 역시 스스로 바꾸어 놓은 민주주의의 환경에 스스로 적응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 역시 부인해서는 안 된다. 일단 민주주의의 방향을 역회전시키지 않는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와 투명성을 늘려 놓고 상대방의 다양한 언술공격에 대하여 억울하다는 호소만 하는 것은 상당히 안이한 단순대응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상대방은 표현의 자유시대에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하여 다양한 언술게임을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현 집권세력은 여론을 국민의 진정한 마음에 맞추어 주도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집권할 때 설정한 구호를 일방적으로 외치고, 주입시키려고 하고만 있다. 즉 국민을 향하여, 또 국민의 뜻을 반영하여 민주주의의 언술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비판세력에 대하여 방어적으로 과거에 써먹었던 방법을 되풀이하며 구태의연하게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방향이 뒤집어지지 않는 한 앞으로 정치의 핵심은 한편으로는 정책을 통하여 결과로 승부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여론을 유도하는 민주주의의 언술게임에 놓여있다. 언론의 자유와 투명성이 늘어난 이상 담론을 지배하는 세력이 정치를 지배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것이다. 1992년 미국의 대선 때 클린턴 후보와 당시 대통령이었던 부시가 붙은 적이 있었다. 당시 부시(현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는 1차 걸프전의 승리로 인하여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는데 이때 클린턴 후보가 "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즉 대선의 승부는 걸프전 승리로 인한 인기로 갈리는 것이 아니라 경제문제를 누가 더 잘 다룰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보고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는 말을 한 것인데, 실제로 이러한 전략이 맞아 떨어져 클린턴이 대선에서 승리하였다. 즉 클린턴은 민심의 방향을 부시보다 더욱 정확하게 읽고, 이에 맞춘 담론을 설정하여 민주주의 언술게임에서 부시에 이긴 것이다.
마찬가지로 필자도 현 정부에게 이러한 말을 하고 싶다. "It's the framing, stupid." 즉 정부가 민심을 정확하게 읽어서 정치경제 담론의 방향을 어떻게 지워주느냐, 어떠한 담론을 만들어 나가느냐가 앞으로의 승부에 결정적이라고 생각한다. 현 정부 들어 27:0이라는 재보선 결과는 정치경제담론의 방향성 설정(framing)에서 실패한 것이라고 여겨지며, 방향성 설정의 실패는 노무현 정부를 지지했던 상당수 국민의 뜻을 현 집권세력이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정치경제담론의 방향성 설정에 현 집권세력이 어떻게 실패했는지에 대한 필자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Framing의 실패**
현 집권 세력과 정권 탈환을 목표로 하는 세력간의 담론 싸움은 크게 세 가지의 분야에서 붙어 있다. 이 세 가지의 분야는 모두 현 집권세력의 정체성을 묻는 담론과 관련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자주와 반미"의 담론, 두 번째는 "대북포용과 친북"의 담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제개혁과 좌경화"의 담론이다. 담론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던지는 구호가 간명하고, 이해의 길이가 짧아야 한다. 즉 이해를 하기 위해서 복잡한 사고의 프로세스가 걸리면 일단 담론싸움에서는 실패한다. 전문용어를 빌리자면 담론의 causal chain(인과관계의 논리구조)이 짧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의 세 가지 분야에서 일단 "반미, 친북, 좌경화"라는 보수의 담론은 일반사람들로 하여금 불안감을 심어주는 데 매우 효과적인, 이해의 길이가 길지 않은 담론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반면 "자주, 대북포용, 경제개혁"은 일단 초기에 희망과 비전을 심어 주는 데 성공하였으나, "반미, 친북, 좌경화"라는 대항담론이 생겨나면서 이에 대하여 효과적인 대응을 하는 담론으로 진화해 나가지 못했다. 따라서 보수세력의 의도대로 현 정부는 반미, 친북, 좌경화 정부라는 정체성이 국민들의 머리 속에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보수가 설정한 담론은 반미하고, 친북하고, 좌경화되면 나라를 빼앗기고, 경제가 나빠지고, 사회주의 국가같이 경제가 실패할 것이라는 상당히 간명하고, 또 국민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알리는 효과적인 담론이다. 실제로 국민 입장에서는 자주, 대북포용, 그리고 경제개혁이라는 급작스런 방향의 전환을 하면 그 불확실성(uncertainty)과 보수 담론의 간명한 causal chain 때문에 상당히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집권세력은 국민의 이러한 불확실성과 불안을 불식시킬 수 있는 대항담론을 만들고 그에 따라 정책의 전환을 꾀했어야 했다. 그런데 초기의 담론을 오만하게 고집하고, 계속 보수와 소란스러운 싸움만을 했기 때문에 상당수의 국민들은 더욱 불안해하고, 혼란 속에서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정부의 진정한 상대는 국민이어야 했는데, 정권탈환을 노리는 세력의 담론싸움에 말려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현 집권세력의 담론설정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1. 자주보다는 자긍**
현 정부의 외교정책은 "자주"로서 framing되어 있다. 이는 과거의 종속적 외교에서 벗어나 보다 독립적이고, 주권적인 외교를 하자는 의미에서 쓰인 것 같은데 "협력적 자주국방"이라는 표현이나, "동북아 균형자"의 선언,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가속화하는 문제, "한미동맹 재조정"의 문제 등이 그러한 방향에서 이해되고 있다. 기왕의 미국 종속적인 외교정책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방향의 설정은 초기에 상당수 국민들로부터 공감을 얻었으나 이러한 방향을 보수가 "반미""독자노선"과 "자급자족""고립"으로 재설정하자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수 국민들이 불안을 느끼면서 이러한 정책노선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협력적 자주국방, 동북아 균형자, 전시작통권환수 등과 같은 문제들은 그 논리의 프로세스, 즉 causal chain이 상당히 복잡하고, 길어 국민들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속에서 불안과 불확실성을 주로 보게 된다.
사실 많은 국민들이 자주를 통하여 얻고자 했던 것은 "우리도 외교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보자는" 자긍의 의미에서의 자주였지, "독자노선"의 자주는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의 국제정치에서 외교노선의 핵심이 "독자노선"(그리고 "반미")으로 간다면, 어떠한 국가도 살아남기 어렵고, 국민들은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외교노선이 설정되고, 또 그러한 정책이 추진된다면 국민은 불안감을 씻지 못할 것이다. "자주"를 통하여 진정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국가이익이고, 그렇게 자주적으로 국가이익을 달성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자긍"과 "자부심"을 갖게 하려면 한미동맹에서 떨어져 나가는 방향보다는 한미동맹에서 비토권(veto power)을 확보해 나가는 방향이 오히려 바람직하다.(이 부분은 한 외교전문가가 지적한 것으로, 간접 인용한 것을 양해 부탁드린다). 그리고 우리 외교가 세계에서 자랑스러운 외교를 한다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는 방향에서 정책이 추진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자주"에 대해서 "독자노선" "반미"와 "고립"의 담론이 나왔으면 이에 대응하는 "자주" 담론의 창조적 진화가 모색되었어야 했다.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그것은 "자긍"이라고 생각된다.
***2. 대북포용과 친북**
"친북"의 framing은 한국정치에서 매우 오랜 역사를 갖는, 그리고 대단히 효과적인 framing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 시도하는 대북포용정책은 항상 "친북"이라는 framing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친북"의 framing은 양날의 칼이기 때문에 야권도 대담하게 항상 사용할 수 있는 카드는 아니다. "북풍"이라는 "친북"카드가 역으로 칼이 되어 날아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친북"의 문제는 여권과 야권 모두 어느 쪽이 유리하다고만 할 수 없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 집권세력이 이 게임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끌고 나가기 위해서는 초기 현 정부를 지지한(혹은 보수를 지지하지 않은) 일반 국민의 북한에 대한 인식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판단하기로는 초기 현 정부를 지지한 일반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북한에 대한 인식은 상당한 역사공부를 필요로 하는 "북한의 정통성"에 있었기보다는 "체제경쟁에서 완패한 북한" "극빈국 북한"에 있었다고 보인다. 따라서 북한의 위협을 과도하게 과장하여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과거 보수세력에 대한 반감으로 대북노선의 전환을 지지하게 된 것이고, 여기에 일정정도의 민족애라는 감상적 요인이 겹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반국민들은 자신감에서 극빈국 북한을 도와주고, 북한을 너무 코너로 몰지 않으면서 평화적으로 북핵문제와 통일의 문제에 접근하기를 원하는 것이었는데, 현 정부의 대북접근은 이러한 접근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북한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 대북관계를 통하여 한국 국내정치에서 한건 터뜨리려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어 상당수 국민들이 식상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북포용정책의 추진세력이 과거 북한식 사회주의 근대화모델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모습을 보았던 운동권세력이기 때문에 이들이 그러한 모델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실패한 모델이라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 점에서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보수세력의 친북, 용공이라는 framing이 보다 간명하고, causal chain이 짧은 담론이 되어 일반 국민들에게 먹히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은 체제경쟁에서 실패한 가난한 국가이며, 그 국가의 주민이 공교롭게도 우리 민족이기 때문에 북한을 체제전환시켜 살려내야 한다는 논리가 국민들에게는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현 정부는 이러한 논리를 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싫어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데 그것이 국민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으면 남을수록 "친북" "용공"의 framing은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3. 경제개혁과 좌경화**
경제개혁의 부분은 현 정부가 가장 헤매고 있는 부분인 것 같다. 자신들도 자기들이 좌로 가는지 우로 가는지 확실히 모르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현 정부 경제개혁의 방향은 97년 금융위기이후에 설정된 개혁의 방향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다. 경제정책으로 보면 역사상 가장 오른쪽으로 향하는 개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는 역으로 과거 정권의 경제정책이 상당히 "사회주의"적인, 국가가 계획을 짜서 이끌어간 경제정책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일찍이 Krugman도 지적하였듯이 박정희 정부시절 상당기간 국가가 투입(input)을 동원하여(mobilize)하여 산출(output)을 늘리는 경제성장을 해왔는데, 이는 전형적인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성장 방식과 별로 다름이 없다. 이러한 경제성장모델과 자본주의 시장을 결합시키면서 정경유착과 시장에의 국가개입이라는 결과가 나타났고, 그것이 금융위기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IMF가 진단을 내린 것이다.
여기서 IMF의 진단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따질 수는 없지만 여하튼 김대중 정부이후 정경유착과 기업의 전근대적인 지배구조를 청산한다는 차원에서 IMF의 권고대로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하였고 그것을 현 정부가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 정부의 경제개혁은 지극히도 "우경화"된 경제개혁이다. 이러한 경제개혁이 서민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재벌에 대한 반감 때문이며, 재벌의 족벌가문을 제외한 경제인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규제완화라는 방향 때문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필연적으로 시장에서의 실패자를 양산하게 되어 있고, 이에 대한 보호막으로 사회안전망이 필요한 것인데, 현 정부의 사회안전망구축 노력이 보수세력이 설정한 "분배"냐 "성장"이냐의 이분법적 논리에 포로가 되어 "좌경화"된 정책으로 몰리기 시작하였다. 즉 "분배"와 "성장"의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framing하는 보수의 담론전략은 성공하기 시작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현 정부를 "좌경화"된 정부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아이러니컬하게 가장 우경화된 정부의 경제정책이 "좌경화"되는 순간이다.
재벌가와 이들과 생각을 같이 하는 상당수 경제인들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전근대적인 재벌의 부자 혹은 부녀 상속, 족벌 지배구조를 타파하기 때문에 이에 불안을 느껴 이제는 정부의 경제개혁을 "반기업"적이라고 framing하기 시작하였고,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국민들은 이러한 framing의 단순한 논리구조 (causal chain)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정부의 경제개혁은 "반기업"이 아니라 "반재벌가문 지배구조"이고 따라서 상당히 "시장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장친화적인 정책은 기업을 보호하는 정책이 아니고 경쟁을 부추기는 정책이므로 자연적으로 기업에 대해서는 잔인한 정책이지만 처음부터 기업을 죽이려는 "반기업"정책은 아니다. 북한의 부자세습을 욕하는 보수세력이 재벌의 부의 부자세습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옹호한다는 것은 스스로 전근대적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이라 아니 할 수 없으며, 그들의 도덕성을 의심케하는 부분이다.
대다수의 국민이 정부의 경제개혁을 통하여 바라는 것은 대다수의 국민이 실업과 경제적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소수의 기업들이 경제성장을 이끌어가는 그러한 경제개혁이 아니라 어엿한 일자리를 창출해 내는 경제개혁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정부의 신자유주의적인 개혁이 양극화를 심화시키게 되어 "경제개혁=좌경화=성장하락=실업률 증가"라는 보수담론의 framing이 초기 정부 지지세력에게 먹히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경제개혁의 방향은 "성장과 분배"의 연계를 통한 일자리 창출로 설정되어야 하는데(이것이 과거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전형적인 케인즈 경제모델이라고 할 수 있음), 애당초 신자유주의 개혁을 택했고 이것을 북유럽식 조합주의 모델로 화장을 하려고 하니 우도 좌도 헷갈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지지도는 실업과 체감경기라는 결과로서 판가름나게 되었다. 누구를 위한 경제개혁인가의 문제가 보수담론이 설정한 "분배우선" "좌경화"의 담론에 의해서 지배되면서 국민들도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은 "고위험 (high risk) 고수익 (high return)"의 방향이고, 시장에서 "거대자본과 내부정보"를 확보한 소수의 재벌 및 자본가들은 고위험을 방어하면서(소위 헷징"hedging"이라고 표현하는데, 사실은 헷징이라기 보다는 땅짚고 헤엄치기가 맞다), 고수익을 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양극화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는 경제가 좌경화된 경제라고 치부된다면 전 경제가 "고위험, 고수익"의 전형인 도박판이 될 수밖에 없고, 도박판에서는 판돈이 많은 놈이 딸 수밖에 없는 현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부는 경제개혁 담론을 risk(모험정신)와 labor(성실함)가 동시에 보상받을 수 있는 담론으로 새롭게 framing하여야 할 것이다.
제3의 길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부분은 가장 어려운 부분인데 일단 반미와 친북이라는 정치 담론의 framing싸움에서 벗어나면 경제담론의 framing은 "좌경화"의 framing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상황에서는 "우경화"가 "좌경화"로 몰리는 담론은 금방 효력을 잃게 될 것이며 오히려 국민을 위한 진정한 개혁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방향으로 담론이 재설정될 수 있다.
***나가면서: 창조적 통합을 모색하는 "신중도"**
이상의 framing의 문제는 현 집권세력을 도와주기위해서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집권세력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고, 국민의 마음과 인식을 어떻게 잘못 읽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비판적으로 제기한 것이다. 담론과 framing은 기존의 이분법적 싸움에서 창조적으로 진화하여 국가적인 담론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필자는 이것을 "창조적 통합"이라는 "신중도"의 노선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잘못된 이분법적 담론의 framing에서 이제는 벗어나서 여와 야가 같이 국가적 목표를 위해서 정책경쟁을 할 수 있는"창조적 통합"을 이루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따라서 어느 쪽이 먼저 국민의 뜻을 정확히 읽고 담론을 framing하는가에 따라 진보와 보수의 얇은 고정지지층이 아닌 상식적인 대다수의 국민들이 움직일 것이다. 과연 우리는 국민을 위한 간명하고, causal chain이 짧은 "신중도"의 담론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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