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르카위의 과거를 찾아서**
자르카위의 정체를 찾아 떠난 나의 조그만 여행도 이같은 자르카위 현상(자르카위에 대한 구체적 정보 대신 유언비어만 난무하는: 역자)을 보다 작은 규모로 재현하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만난 어느 누구도 자신의 본명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자신의 본명을 내 기사에 인용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르카위에 관해 말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신원을 감추려 했다. 이는 어쩌면 적절한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나와 통역 아이샤를 알자르카까지 태워주기로 한 압둘라(물론 본명이 아니다)는 요르단 사람이다. 외모로 미루어 30세 정도로 보이는 그는 여행 내내 불안한 듯 줄담배를 피워댔다. 나는 암만에서 자르카위에 관해 수소문 하던 도중 그를 만났고 함께 자르카에 가기로 했다.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자르카위를 알지. 90년대 초에 아프간에서 함께 싸웠거든. 원한다면 그의 고향에 데려다줄 수 있지."
다음 날 늦은 오후 우리는 그의 낡은 택시에 올라탔고 알자르카 왕복 요금에 합의했다. 압둘라는 한 묶음의 사진을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자르카위의 고향 알자르카까지 가는 동안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의 거대한 파이잘사원 앞에 짙은 구레나룻을 한(지금은 없다) 채 압둘라가 서 있었다.
또 다른 사진은 페샤와르에서 찍은 것이었다. 아프간 접경지역에 있는 이 도시는 탈레반 지원자들을 모집, 훈련, 파견하는 근거지다. 또 다른 사진은 필리핀인 듯 싶었다. 짙은 밀림 속에서 어깨엔 총을 메고 있었다. 물론 그 어떤 사진에도 현재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자르카위의 모습은 없었다. 하긴 놀랄 일도 아니겠지.
한동안 운전을 하던 압둘라가 느닷없이 소리쳤다. "누구든 이라크에서 미국인에 협력하는 자는 죽여야 돼!"
그가 뭔가를 얘기하고 싶어 한다고 느낀 나는 그에게 자르카위에 대해 아는 게 뭐냐고 물었다. 압둘라에 따르면 그는 이 전설적 테러리스트를 페샤와르에서 만났다. 그리고 1990년 자르카위와 함께 아프간 접경지역에 있는 훈련캠프로 보내졌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아프간과 파키스탄 사이의 산악지역에 유명한 훈련캠프가 몇 개 있지. 우린 거기서 시리아, 요르단, 팔레스타인, 레바논 등지에서 온 자유의 전사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어."
오직 '성전(jihad)'을 위한 전사들만이 이 캠프에 들어갈 수 있다면서 압둘라는 자랑스럽게 설명을 이어갔다. 다른 유명한 무자헤딘(자유의 전사)에 의해 신원을 보증 받은 자만이 훈련캠프에 들어갈 수 있으며 이는 첩자로부터 캠프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3개월간 기관총과 로켓포 등에 관한 훈련을 받은 뒤 그때까지도 남아 있는 러시아인들과 싸우기 위해 자르카위와 함께 아프간에 파견됐다고 그는 주장했다.
내가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자-러시아가 아프간에서 철수한 것이 1989년 2월이었으므로-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소련 정부가 철수를 공식 발표한 뒤에도 남아 있는 놈들이 많았거든. 그래서 우리가 이 잔당들을 몰아냈지."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 얘기였지만, 어쨌든 그는 얘기를 이어갔다. 아프간에서 어느 지역에 가는가는 무자헤딘 마음대로지만 대부분의 전사들은 전투를 원했기 때문에 '화끈한' 지역들을 선택했다고 그는 떠벌였다. 우리의 대화는 여기에서 중단됐다. 목적지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자르카 인근, 자르카위의 처남(또는 매부. 이하 처남으로 표기: 역자)이 살고 있다고 알려진 마을이었다. 우리는 예전에 자르카위가 매주 기도를 드렸다는 조그만 사원 앞에 내렸다.
압둘라는 자기가 이곳에서 얼쩡거리는 것은 위험하다며-그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한 시간 뒤에 더 머물 것인지 여부를 내 휴대폰으로 물어보겠다고 말했다.
나와 아이샤는 조용한 중산층 마을을 걸어다니며 사람들에게 자르카위의 처남이 사는 집을 물었다. 꼬마들이 거리에서 뛰놀고 있었다. 그 뒤에 젊은 남자와 그 부모가 수상하다는 눈초리로 우리를 주시했다. 돌로 만들어진 요르단식 집들 사이의 길 위에 바람이 비닐 백들을 이리저리 날리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조그만 야채가게 앞의 낡은 의자에 앉아 있는, 흰 수염의 졸린 눈을 한 노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 사원의 이맘(기도 인도자. 기독교의 목사나 신부에 해당: 역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르카위를 아느냐고 물어보자 그는 교묘하게 직답을 피해갔다.
그는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자르카위가 내 사원에서 기도했다는 건 아마 맞는 말일 거야. 그런데 내가 기도를 인도할 때는 신도들에게 등을 보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맞는다고 얘기하는 어려운데…."
말을 마치자 그는 눈길을 거리 쪽으로 돌렸다. '우리가 어서 떠나길 내심 바라고 있는 게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앞의 많은 자르카위 추적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 다음 한 여자를 만났다. 물론 이 여자도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이 여자는 자르카위가 요르단 최대의 부족인 베니 하산족 출신이라고 말한 다음 검은 위성수신 안테나가 달려 있는 하얀 이층집을 가리켰다.
"저기가 아메드 자르카위의 집이라우" 그녀는 나지막하게 저 집이 자르카위의 형제 중 한 명의 집이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저 집 근처에는 가지 말아요. 당신들에게 돌을 던질 걸. 저 사람들은 기자들을 아주 싫어하거든"이라고 충고했다.
하얀 이층집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말라는 충고를 듣고 나서 우리는 자르카위의 처남에 대해 집요하게 캐묻고 다녔지만 아무도 안다는 사람은 없었다. 이상한 노릇이었다. 그 이층집에서 언덕을 올라가다가 우리는 한 중년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우리의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 그동안 각국의 정보요원이나 경찰은 물론이고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었을 이 마을에서 그는 별종의 인간이었다.
택시기사 압둘라와 마찬가지로 이 사내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자르카위의 형제들은 그에 얽힌 전설적 신화들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했다. 혹시 화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의식적으로 자르카위와 거리를 둬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커다랗게 웃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도 이곳을 찾은 모든 언론들이 자르카위 형네 집을 찍어갔지. 저게 자르카위의 집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는 좁은 계곡 너머 석양 속에 집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을 가리키면서 "자르카위는 저 마을 출신이야. 공동묘지 근처에 살았지. 아버지는 저 곳의 이장인데 알마숨(al-Ma'assoum)이란 곳이지"라고 말했다.
그는 자르카위와 함께 '프린스 탈랄 초등학교'에 다녔다면서 아부 무사브(자르카위)가 7살 때부터 그를 알고 지냈노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걔는 어렸을 때부터 말썽쟁이였어. 그렇지만 언론에 보도된 것은 사실이 아니야. 아부 무사브는 정상적인 사람이거든. 미국인들이 말하는 것은 죄다 거짓말이야. 이 동네에서 그를 아는 사람들 대부분은 언론 보도를 믿지 않지"
그는 자르카위가 90년대 초에 이 동네를 떠나 아프간에 갔다면서, 그러나 자르카위가 이라크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마을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르카위가 9.11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이 아프간을 공격했을 때, 미군 공습에 의해 아프간 토라보라 지역에서 사망한 것으로 믿고 있다.
"부인하고 아이 셋은 아직 저 마을에 살고 있지"라고 그는 덧붙였다. "하지만 그곳에 가서 말 붙여 볼 생각은 하지도 마. 얘기하려 하지 않을 걸." 그는 자르카위가 죽었다고 믿고 있다. "100퍼센트"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강조했다. "그가 아직 살아 있다면 어째서 최근 사진이 보이지 않는 거지? 언론에서 보여주는 사진들은 모두 아주 옛날 거잖아."
많은 요르단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이라크인들의 저항을 지지했다. "모든 무슬림들은 미국의 이라크 점령에 맞서 싸워야 돼. 그들이 매일 무고한 이라크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잖아."
아프간에 가기 전까진 자르카위도 전사가 아니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부인은 계속 검은 천으로 감싸고 다니더군." 그에 따르면 자르카위에겐 아메드와 살리, 두 형제가 있다.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 오는 기자들 대부분은 서방 출신이야. 왜 그런 줄 알아?, 아랍 언론들은 이게 다 거짓말(myth)이란 걸 알고 있거든."
그의 아들이 커피를 내오자 그는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이라크에서 인질들 동영상을 보여줄 때 자르카위도 자기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거 아냐? 한마디로 그가 살아 있다는 미국이나 언론들의 주장은 근거가 없어."
우리는 포도넝쿨이 걸려 있는 테라스 밑에서 강한 향의 아랍 커피를 마시면서 잡담을 나누었다. 해가 지기 시작했고 운전기사가 휴대폰 전화를 걸어 왔다. 우리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곳을 떠났다.
나는 운전기사를 만나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러자 바그다드에 있을 때부터 함께 일해 온 아이샤가 "다르, 좀 천천히 걸어도 되잖아. 여긴 위험하지 않아. 해만 지면 위험해지는 바그다드가 아니란 말이야"라며 나를 일깨웠다.
만나자 마자 압둘라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자르카위 처남 집이 어딘지 말해주지 않지. 그 집은 요르단과 미국 정보요원들의 습격을 여러 차례 받았거든"
압둘라는 자르카위가 살아 있으며 이라크에 건재하다고 우겼다. "나는 확신해. 왜냐하면 만일 자르카위가 죽었다면 저 사람들이 사진을 공개하고 공식발표를 왜 안 하겠어. 자르카위는 강한 사내야. 우리가 아프간에 있을 때도 새 기관총이나 프랑스제 미사일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사용법을 터득한 사람이 바로 자르카윈데…."
압둘라는 자르카위가 다녔다는 또 다른 사원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곳은 알마숨 지역에 있었다. 자르카위의 여동생(혹은 누나) 중 한 명이 이 지역 이슬람센터의 책임자라고 압둘라가 귀띔했다. 그러고 나서 마치 무심코 말하듯이 자신도 모두 7년을 이곳 저곳의 감옥에서 지냈다고 털어놓았다. 아이고, 안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런 종류의 고백은 아예 못 들은 걸로 하든가, 아니면 그와의 동행을 결정하기 전에 못 들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아프간에서도 우리는 몇 사람을 참수했는데 그건 적들에게 앞으로의 운명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 그걸 보면 겁먹게 돼 있거든."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하긴 잘 먹힐 것이다'
압둘라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라크에서의 성전은 자르카위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지. 우리가 이기고 지는 것은 자르카위 손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알라 신에게 달려 있지. 만일 그가 죽는다 해도 이라크 성전은 결코 멈추지 않을 걸."
애꿎은 민간인 희생자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과연 자르카위는 무고한 희생을 피하려는 생각은 하고 있는 것일까? 압둘라의 대답.
"나는 이 문제로 이라크 사람들과 여러 차례 토론을 했었는데 그때마다 이렇게 말해주지. 자르카위는 부하들에게 무고한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만일 그가 그랬다면 내가 먼저 그와 맞서 싸울 것이다. 자르카위는 미국인과 그 협력자들만을 공격한다고"
어둠 속에서 암만으로 돌아오는 동안 그는 여전히 줄담배를 피워댔다. 나는 감사의 인사와 함께 요금을 지불했고 그의 낡은 택시는 혼잡한 시가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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