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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신의 실제 뿌리, 물길과 말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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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쥬신의 실제 뿌리, 물길과 말갈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11>

***유리(羑里)에 가서 불탄다**

노태맹

이제 유리에서 푸른 강의 은유는 끝났네.
물고기 산중에 매달려있고
아침이면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
마른 북 울리며 늙은 소 물 마른 강가로 내려오네.
불길한 괘처럼 태양 속에 별이 뜨고
우리 딱딱한 혀는 얼마나 오래 유리의 은유를 견디는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적인 유리 나무들 제 마른 팔 부러뜨리고
붉은 새 안간 힘으로 둥근 유리의 시간 빠져 나가네.
그러나 여기 유리에는 외부는 없네.
마른 북 울리며 늙은 소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물 마른 강가 저녁 얼굴 가리고
부러진 나무속에 갇혀 우리 불타네, 우우
유리에 가서 우리 불타네.

- 노태맹 시집. 『유리에 가서 불탄다』(세계사 : 1995) -

‘유리(羑里)’란 삼천백여 년 전 은(殷)의 폭군 주왕(紂王)이 문왕(文王)을 가둔 감옥입니다. 문왕은 주(周)를 건국한 무왕(武王)의 아버지로 유리에서 복희(伏羲)씨가 그린 ‘팔괘(八卦)’를 처음으로 연역(演易)‘하였는데 이것이 주역(周易)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무왕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습니다. 무왕과 그의 후예들은 쥬신의 손발을 묶어 빠져나올 길이 없는 유리에 가두었습니다. 그로부터 수천 년 동안 쥬신은 유리(羑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 숲의 사람**

우리는 때로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조금만이라도 그 관념의 틀을 벗어나 보면 금방 알게 되는 것들도 그 관념 속에서 헤매다가 그 관념 속에 함몰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경우도 많지만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인 경우는 물길(勿吉), 또는 말갈(靺鞨)이라는 민족에 대한 것입니다.

말갈과 관련하여 몇 가지 먼저 알아둘 사항이 있습니다. 말갈은 고구려나 발해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의 “고구려·발해는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라고 하여 한국사와는 무관한 중국사의 일부로 보고 있습니다. 즉 발해는 ‘말갈족을 주체로 한 민족 정권인 동시에 당나라 중앙 정권의 책봉을 받아 당 왕조에 예속된 지방 정권’, 혹은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 정권’이라는 것입니다. 중국 정부의 공식입장을 대변하는 중국의 국정교과서에는 “발해는 당현종(唐玄宗)이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임명한 속말부(粟末部)의 수령(首領) 대조영(大祚榮)이 세운 속말말갈(粟末靺鞨)의 지방 정권’(『중국역사, 초급중학교과서』).”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중국학자들의 연구로 “고구려인은 여진족과 동일하다”라는 주장[왕건군(王健群),「고구려족속탐원(高句麗族屬探源)」『學習與探索』53 : 1987-6]도 있습니다. 즉 고구려는 부여(夫餘)에서 왔고 부여는 숙신(肅愼) 계통의 퉁구스족, 즉 후대의 여진족이므로 고구려인도 여진족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발해도 ‘고구려족(高句麗族)의 별종(別種)도 아니고 고구려의 후예도 아닌 중국 동북지방에 예로부터 생활해 온 숙신족(肅愼族)의 후예인 속말말갈족(粟末靺鞨族)’이라는 연구(김향, 「발해국의 일부 민족문제에 대하여」)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위에 나타난 내용만으로 보면 왕건군이나 김향의 주장은 크게 틀린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한국사학계의 고질적인 ‘새끼 중국인’ 근성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숙신, 물길이나 말갈은 우리와는 다른 미개한 오랑캐로 고구려나 부여의 지배를 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동북공정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고구려도 숙신, 즉 후대의 여진족의 국가라고 하니 꼼짝없이 당하게 된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숙신(물길ㆍ말갈)은 중국의 산서지방에서 흑룡강 연해주 등지에 걸쳐서 거주한 민족의 범칭(일반적으로 두루 부르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대로 말갈이나 물길이란 만주어로 밀림, 또는 삼림의 뜻인 ‘웨지’[窩集 (Weji)], 또는 ‘와지’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즉 ‘산골 사람’, 또는 ‘숲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특정한 권역을 가리키고 있지는 않지요. 그리고 이 말이 ‘해 뜨는 곳(日本)’을 의미하여 쥬신의 일반적인 명칭을 따른 것을 알 수 있지요.

일부에서는 물길이 부여나 고구려 계열과는 전혀 다른 종족이라는 근거로 『위서(魏書)』[북위(北魏)의 역사서 - 『삼국지』의 위나라가 아님] 「물길전」의 “물길의 말이 다른 동이의 그것과는 다르다.”라는 기록을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서』「물길전」의 기록이 아이누(좀 더 엄밀하게는 아이누의 선조, 또는 길랴크 같은 고아시아족), 또는 아이누와 교류하는 일부 숙신인들을 지칭하면서 아이누의 언어와 숙신 즉 물길의 언어를 혼동하여 생긴 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읍루 지역(아이누나 고아시아족의 영역)에 살고 있던 숙신을 아예 읍루처럼 불렀던 것 같습니다(‘읍루의 함정, 그리고 카멜레온 숙신’ 참고).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바로 물길의 위치 때문이지요. 『위서』에 따르면 물길의 대체적인 위치는 북류 송화강변이었습니다(『魏書』卷100「勿吉傳」). 이 지역은 현재의 하얼빈 동쪽 송화강이 북류하는 지역으로 하바로프스크에서 콤소몰스크(Komsomolsk)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앞 장에서 물길은 발해 때 숙신의 한 갈래가 막힐부(鄚頡部)를 중심으로 먼저 물길을 칭하였다는 말씀을 드린 바 있죠[북한사회과학원『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107쪽]. 구체적으로 보면, 5세기 경 물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종족이 사서에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정확히 언제 이 물길이라는 명칭이 나타났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연흥 5년(475년) 물길의 을력지(乙力支)가 북위(北魏)에 사신으로 간 것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이전의 시기로 볼 수는 있겠지요. 그리고 물길이 조공을 보낸 마지막 기록은 북제의 무평 3년(572년)입니다. 물론 이것은 기록상의 이야기이고 실제로 물길이 이 기간에만 존속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다만 이 마지막 조공 후에도 일정하게 그 이름은 있었겠지요,

문제는 물길을 가장 먼저 칭한 막힐부의 위치가 현재 랴오닝성(遼寧省) 창튜현(昌圖縣)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죠. 이 막힐부는 고구려가 설치하였고 발해가 이를 계승한 곳이었죠. 이 곳은 과거 고조선의 영역이자 동호의 영역인 지역입니다.

그러면 『위서』「물길전」의 기록은 분명히 이상합니다. [그림 ①]에서 보면 랴오닝성 창튜현의 위치는 요하(遼河) 북쪽입니다. 만주 서쪽 경계 가까이에서도 물길이 존재하고 동쪽 끝부분에서도 또 물길이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만주 지역 전체에 해당되겠군요. 손오공처럼 동쪽 끝과 서쪽 끝을 구름을 타고 날아다닐 일은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결국 물길의 영역은 요하에서 하바로프스크가 위치한 연해주 일대에 분포한 것이 되어 결국 숙신의 영역과 다를 바가 없지요. 차라리 범쥬신의 영역이라는 편이 나을 듯 한데요. 이것을 [그림 ①]로 확인해 보세요.

[그림 ①] 물길의 영역

그래서 『위서』「물길전」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고 이 책 역시 그 동안 고질적인 문제인 숙신(물길)과 아이누를 혼동하여 보고 있죠. 그 동안 이런 유의 기록을 한국이나 중국의 사학자들이 앵무새처럼 다시 반복하여 왔습니다. 그러니 숙신이나 물길의 실체가 보일 리 있나요? 다시 말씀드리면, 숙신의 일부가 읍루(아이누)와 접촉한 것을 두고 『위서』「물길전」은 숙신(물길)을 마치 읍루(아이누를 포함한 고아시아족)처럼 묘사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중국의 사서(史書)에서는 쥬신의 종족에 대해서 아무렇게나 기록하다보니 하나의 민족이 여기저기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에다 ‘새끼중국인[小中華人]’을 자처하는 한국의 사가(史家)들이 이것을 지속적으로 비판 없이 받아들여 사용하다보니 쥬신의 역사가 자꾸 안개 속으로 밀려들어가게 된 것이죠.

일단 물길에 대한 사료들을 간단히 보고 넘어갑시다.

물길인들은 문화적으로는 뒤떨어져 있었으나 군사적으로는 매우 강대하여 부여를 멸망시킨 것으로 되어있습니다(『魏書』卷100「勿吉傳」). 대부분의 사서에서 국가를 제대로 구성하지 못하고 만주일대를 살아가는 쥬신들은 강한 전투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이들 부족들을 지배하기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수많은 경제적 수탈과 정치적 압제 속에서 강한 전투력을 유지하고 그 한계상황에서는 과감히 도전하고 그들의 정치적 지배를 물리친 경우가 많습니다.

전체 물길인들 가운데 국가구성에 동참하지 않은 물길인들은 전쟁이 벌어지면 부족들을 중심으로 전쟁에 임했으며 전쟁이 끝나면 다시 원래로 돌아가 유목생활을 하였습니다. 각 부족들은 우두머리가 있었지만 전체를 통솔하는 큰 우두머리는 없었습니다(邑落各自有長 不相總一 :『魏書』卷100「勿吉傳」). 그것은 자연환경과 유목과 수렵이라는 경제적 배경에 원인이 있겠지요.

물길은 정착생활을 하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중국과는 달리 국가의 영역에 포함되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은 것이죠. 그렇다고 하여 이들이 숙신(물길)이 아닌 것은 아니죠. 우리가 모든 것을 단지 한족(漢族)의 농경민의 시각에서만 보니 이상한 것이죠. 위의 설명[邑落各自有長 不相總一]에서 보듯이 한족(漢族)과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 안에 속해있지 않다고 해서 다른 민족으로 파악해서는 안 되죠[참고로 한족(漢族)의 통치제도는 정착민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수탈과 착취의 경제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한족(漢族) 왕조들은 지나친 수탈과 사치로 패망합니다].

그러다보니 쥬신을 부르는 이름도 일관성이 없고 대충 부르게 된 것입니다. 한족(漢族)의 입장에서는 국가체제를 구성한 부족은 따로 분리하려 들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비칭(卑稱 : 욕)으로 동북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숙신 또는 물길(말갈)등으로 통칭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만주 지역의 문화적ㆍ지리적 특성과도 무관하지는 않겠죠. 인구가 극히 희박하고 부족의 단계에 머물러 수많은 씨족 또는 원시적 형태의 부족국가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족(漢族) 사가(史家)로서는 판단하기에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관심도 없었겠죠.

예를 들면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물길전」)에 의하면 물길의 주변에는 대막루국(大莫婁國 : 부여국이라고도 함), 복종국(覆鍾國), 막다회국(莫多回國), 고루국(庫婁國), 소화국(素和國), 구불복국(具佛伏國), 필려이국(匹黎尒國), 발대하국(拔大何國), 욱우릉국(郁羽陵國), 고복진국(庫伏眞國), 로루국(魯婁國), 우진국(羽眞國) 등의 12개국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고대국가 체제가 아니라 부족, 또는 원시적 부족국가 정도의 단계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런 부족국가들을 모두 서로 다른 민족으로 분류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림 ②] 북위(北魏 : 386~535)

쉽게 말하면 쥬신은 주로 부족연맹·부족연합국가 등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중앙집권적 구조의 중국인의 사고로는 이해될 리가 없죠. 이런 특성은 부여ㆍ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몽골ㆍ금ㆍ후금(청)ㆍ일본 등에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전통은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농경생활이 정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쥬신의 주요 특성입니다[제가 『삼국지 바로읽기』(34장 삼국지와 고구려)에서 쥬신의 특성을 볼복스(Volvox)에 비유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지요].

***(2) 지배층만 고구려인이라니?**

숙신은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물길과 말갈로 불립니다. 그 동안 우리가 배우고 가르친 대로 동북방의 대표적 오랑캐지요. 지금까지 배운 대로 한다면, 이들은 발해의 피지배계층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고 피지배층인 민중은 말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물길과 말갈 역시 안개 속에 있는 민족입니다. 마치 쥬신의 역사가 안개 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그 동안 요동과 만주 지역의 민족에 대한 연구는 북한(北韓)에서 많이 이뤄졌습니다.

북한의 연구는 발해가 고구려 유민과 대부분 고구려의 전주민(前住民)에 의해 건국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북한 학자들은 발해주민을 일률적으로 말갈로 부르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대부분이 고구려(高句麗)의 유민(遺民)으로 보아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북한 사회과학원 『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120쪽]. 따라서 고구려인들이 발해를 건국했거나 일부의 고구려인이 건국하고 다수의 말갈을 지배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그리고 통일신라 때 최치원은 발해가 갈족의 한 갈래인 앙갈(鞅鞨)에 의해 건국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둘 다 잘못되었습니다. 말갈과 고구려 주민을 분리하는 것은 보다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문제이지 민족적 특성으로 보기는 어렵지요. 예를 들어 봅시다. 한국의 수많은 씨족 가운데 한 성씨인 전주(全州) 이씨(李氏)가 조선왕조를 건설했다고 해서 그들이 전체 대다수 한국인들과 다른 집단이라고 볼 수 있나요?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들을 바탕으로 하여 만주 일대에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포괄적인 말갈인(만주쥬신)에 의해 건국된 나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최치원은 중국에 조기유학한데다 중국에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지 발해와 말갈에 대해서는 비하하는 정도가 한족(漢族)의 사가와 유사하고(그래서 여러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의 연구는 지나치게 편협해[『력사과학』(1962) 1호 「발해사 연구를 위하여」, 『발해사연구론문집』(1992) 「발해의 주민구성」] 그에 반하는 사료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죠.

예를 들면 『유취국사(類聚國史)』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발해국은 고구려의 옛 땅이다. … 주현과 관역이 없고 곳곳에 마을이 있는데 모두 말갈인의 부락이다. 백성들은 말갈인이 많고 원주민(土人)들은 적다. 모두 원주민으로 촌장을 삼는다. 큰 마을은 도독, 그 보다 작은 규모는 자사ㆍ수령으로 부른다. 날씨가 극히 추워 수전 농사가 안 된다.(渤海國者 高麗之故地 … 無州縣舘驛 處處有村里 皆靺鞨 其百姓靺鞨多 土人少 皆以土人爲村長 大村曰都督 次曰刺史 其下百姓 皆曰 首領 土地極寒 不宜水田 : 『類聚國史』卷193)”

위의 글은 8세기 당나라에 유학했던 영충(永忠) 스님이 보고한 것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라고 하는데 “백성들은 말갈인이 많고 원주민(土人)들은 적다.”고 하고 있죠? 오히려 말갈인과 토인(土人 : 원주민)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같은 시대 사람이 같은 시대의 사정을 그린 것이고 비행기를 타고 다닌 것도 아닌데다 여러 지역을 직접 통과하면서 적은 기록이니 비교적 정확한 기록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북한의 학자들은 영충이 발해의 변두리를 보고 온데서 이 같은 말을 했다고 봅니다(북한 사회과학원, 앞의 책. 143쪽). 하지만 영충스님 글의 전체적인 서술 내용으로 보면 특정한 지역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기는 어렵고 발해의 전반적인 상황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즉 “백성들은 말갈인들이 많다”라고 하는 것은 일반론적인 서술로 볼 수가 있기 때문이죠. 오히려 전체 주민이 말갈이고 일부가 그 지역 사정을 잘 아는 그 지역 토착민(정착민)으로 보고 있는 것이죠.

영충 스님의 글로 보면 고구려인이라는 말은 어디로 가고 말갈과 토인만이 있어서 고구려인이라고 별도로 분리한다는 것은 무의미해 보입니다. 오히려 말갈이 고구려인과 동일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북한 학자들의 연구방식도 결국은 ‘소중화의식’, 즉 ‘새끼중국인’의 사고방식에 깊이 물들어져 있음을 알 수 있죠.

하기야 한국 지식인들의 ‘새끼중국인’ 근성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런 식이니 과거 세종대왕께서 친히 민중을 위해 한글을 창제하시는데도 사리사욕(계급적 이익)을 위해 반대할 수가 있는 것이죠. 세종대왕께서는 집현전 학사들의 간섭을 피해 왕자·공주들과 비밀리에 한글을 만들어 기습적으로 반포하셨다고 합니다(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세계 문화유산이자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디지털 시대에 가장 적합한 아름다운 문자를 사용하고 있지요). 이런 자들을 어떻게 말리겠습니까? 한마디로 수천 년을 유리(羑里)에 빠져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직도 미망(迷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아무리 갈 길이 멀어도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갑시다. 이제 자가당착적인 ‘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 즉 ‘새끼중국인’ 근성은 그만 버리자는 겁니다. 몽골ㆍ만주족과 우리의 뿌리가 같은데도 남북한 학자들 모두 이들을 오랑캐 취급을 하고 민족사의 범주에서 제외시키려는 일들을 이제는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진실이 어둠 속에 갇히고 1900년대 후반기부터 시작된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 요동 만주 지역 쥬신역사 말살정책)도 자초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해결책은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중국의 논리를 도와주고 있을 뿐입니다.

숙신ㆍ물길ㆍ여진 등이 실제로는 고구려ㆍ발해와 같은 뿌리임에도 불구하고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의 논문(1933)이 발표된 이후 “발해(渤海)의 지배층은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만주사(滿洲史)의 대부(代父)격이라 해도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봐야하는데 남북한의 사학자들이 아직도 이 사고 범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식민사학[植民史學 : 만선사관(滿鮮史觀)]의 대부(代父)라고 핏대를 높인 사람들도 남북한의 사학자들입니다.

발해의 지배층만이 고구려 유민이라니 그것은 말이 안 되지요. 말갈이라는 명칭 자체가 중국인들이 중국의 동북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부른 소리인데 ‘말갈인 = 고구려인 = 발해인’인 상태에서 누가 지배층이 되고 누가 피지배층이 된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누구를 지배한다는 소린지 알 수가 없군요.

영충스님의 기록을 보세요. 그가 다녀간 곳은 과거 고구려 지역이죠? 그리고 그 지역이 이제는 발해가 되었고 그 대부분 백성이 이전에는 고구려백성이었던 말갈이고 나머지는 소수의 토착민이라는 것이죠.

고구려나 발해는 위ㆍ오ㆍ촉과 같은 정치적인 국가명칭이고 말갈은 중국인들이 만주 일대에 거주하는 종족을 부른 이름이 아닙니까? 실제로 발해의 피지배층으로 알려지고 있는 말갈계 족장들도 수동적으로 지배를 받은 존재들이 아니지요. 이들은 국제무역은 물론이고 외교에 있어서는 독자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李成市, 「 발해사 연구에서의 국가와 민족」『만들어진 고대』(삼인 : 2001) -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이 책 자체는 비밀이 많은 일본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학자 특유의 현학적 횡설수설이 많지만 발해 관계부분만은 비교적 객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갈인들은 7개의 부로 나눠져 있었다고 합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일부 말갈들은 당나라로 들어가고 일부는 세력이 미약하여 흩어지고 나머지는 발해로 들어갔는데 오직 흑수지역의 말갈, 즉 흑수말갈만이 강력하였다고 합니다(『신당서(新唐書)』권 219 「말갈전」).

이같은 분석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사가들이 말갈인들과 고구려 유민이라는 것에 아직도 집착한다면 다시 분석을 해봅시다.

만약 발해를 구성한 주민들을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인으로 본다면 이 들 사이의 종족적 문화적 차이는 있을까를 냉정히 물어봅시다.

발해에 있어서는 말갈인들을 위한 2원체제가 구성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말갈인들과 고구려 유민들 사이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죠. 제가 보기엔 그 차이라는 게 도시민과 지방민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발해의 백성이 된 말갈인과 편입되지 못한 말갈인은 정착 - 비정착 단계의 차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참고로 말씀드린다면,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산골에는 화전민(火田民)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학교에서 화전민은 산(山)을 망치는 매우 나쁜 사람들로 배워서 그런지 이들이 제게는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들은 실제의 한국 정부의 통제 밖의 존재로 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저 자신에 대해 놀라기도 했습니다. 같은 한국인끼리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즉 발해의 지방통치제도는 5경 15부 62주가 있었을 뿐 이민족(異民族)을 다스리는 별도의 부서나 제도가 없었다는 것은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과의 문화적 차이가 거의 없다는 말이죠. 북한의 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말갈인이 없었기 때문에 이원적 통치구조가 없었다[북한 사회과학원 『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153쪽].”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여러 사서에 발해 민족의 대부분이 말갈이라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실은 발해에는 (대부분) 말갈인만 있었기 때문에 이원적 통치구조가 필요 없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입니다.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해 본다면 한규철 교수의 지적과 같이 “말갈이란 어느 특정의 종족명이 아닌 넓은 지역 이민족을 통칭하여 부르는 범칭(한규철,『발해의 대외관계사』)” 으로서 일종의 욕설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코쟁이·짱꼴라 등으로 외국인들을 묘사하듯이 한 말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범칭으로 부르는 말갈은 과연 어떤 공간적 범위를 차지하고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말갈의 영역은 지나치게 광대하여 지금껏 말씀드린 범쥬신 영역을 대부분 포괄하고 있습니다. 6세기말 수ㆍ당 시대 이후 많은 학자들은 발해의 영역의 주민들을 말갈로 통칭하였고 그래서 시라토리 쿠라키치도 “말갈이란 이름은 넓은 동북 지방의 여진 민족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합니다(白鳥庫吉, 「塞外民族」『東洋思潮』12, 1935 ; 『白鳥庫吉全集』卷4 ).

다시 말해서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만주에서 한반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부르는 말이 바로 물길, 또는 말갈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말이 옥저는 물론이고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쉽게 말하면 물길, 또는 말갈은 쥬신족을 불렀던 명칭이라는 말입니다. 즉 과거에 숙신이라고 하다가 나중(수나라ㆍ당나라)에는 요동ㆍ만주에 사는 주민들을 모두 물길, 또는 말갈족으로 불렀다는 것이죠. 이 점은 쥬신족의 실체에 대한 것이므로 좀 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말갈에는 크게 7부가 있는데 이들에 대한 견해가 다소 복잡하고 논쟁도 심하지만 결국 이들이 예맥계(濊貊系)냐, 숙신계(肅愼系)냐 하는데 국한되어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논쟁은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림 ③] 말갈의 7부

왜냐하면 숙신계와 예맥계의 차이가 궁극적으로 없지 않습니까? 예맥계든, 숙신계든간에 이들은 모두 말갈의 7부에 속한 민족입니다. 그러면 말갈로 부르면 되지, 왜 무슨 근거로 이들을 나눕니까? 중국인들은 이들을 포괄하여 그저 ‘말갈’로 부른 것이지요. 중국인이 입장에서는 “그놈들이 그놈”이라고 생각하여 ‘재수 없는 놈’이라고 하여 물길(勿吉)로 한 것 아닙니까?

더구나 중요한 것은 예맥이라는 말은 말갈이 등장할 즈음에는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예맥이 한순간에 증발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말갈계니, 읍루계니 하는 말들이 얼마나 단기적이고 일관성이 없는 용어인가 말이죠. 다 따지고 보면 숙신(숙신=예맥=동호)이라는 민족 그 자체는 그대로 있고 그것을 부르는 방식이 이리저리 바뀌고 있을 뿐인데 말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고조선과 고구려는 예맥계이고 발해의 주민은 말갈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 예맥과 숙신이 분명히 다르다는 말이죠? 그런데 지금까지 본 대로 도대체 무엇이 다른지 그 근거를 알 수가 없네요.

러시아 학자 엘 에르 꼰체비찌는 ① 고대 조선족과 숙신(물길ㆍ말갈의 선민족)의 인구분포가 사료와 지리상으로 일치하고 ② 이들의 종족 형성 과정이 유사하며 토템이 공통적으로 새[鳥]라는 점, 종족 발상지가 백두산(白頭山)이라는 점, ③ 그리고 이들을 묘사하는 말이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실상 동일 종족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안호상 선생은 예맥ㆍ숙신ㆍ동호를 하나의 범주로 봅니다. 중국인 학자 슈이 이푸는 『삼국지』와 『후한서』를 분석한 후 중국 대륙의 동부에 거주했던 모든 민족은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유엠뿌진, 『고조선』(소나무 : 1997)]. 앞서 본대로 숙신ㆍ조선ㆍ변한도 하나의 범주로 보는 것은 고려시대까지는 일반적인 관행들 가운데 하나로 볼 수도 있죠.

***(3) 물길과 말갈, 고향과 형제의 이름**

이상한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나 백제가 고구려와 접경지에서 말갈의 침입을 받았다는 말들이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침입하지 않고 왜 말갈이 침입하냐는 거죠?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볼까요?

『삼국사기』「백제본기」의 무녕왕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502년 백제의 무녕왕은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공략하였고 다음해(무녕왕 3년) 5천명의 군대로 마수책(馬首柵)을 불태우고 고목성(高木城)으로 침입해오는 말갈군대를 쳐서 물리쳤다고 합니다(三年秋九月, 靺鞨燒馬首柵, 進攻高木城. 王遣兵五千, 擊退之. 冬無氷). 506년 다시 말갈이 침입하여 고목성을 파괴하고 6백여 명의 주민을 죽입니다(六年秋七月 靺鞨來侵, 破高木城, 殺虜六百餘人). 507년에는 말갈군대의 침입에 대비하여 고목성 남쪽에 목책을 세우는 동시에 장령성을 축조합니다(七年夏五月 立二柵於高木城南, 又築長嶺城, 以備靺鞨). 그러자 그해 겨울 고구려의 장수가 말갈과 함께 한성을 공격하기위해 횡악에 주둔하자 왕이 군대를 보내 이들을 격퇴하였다고 합니다(冬十月 高句麗將高老與靺鞨謀, 欲攻漢城, 進屯於橫岳下, 王出師, 戰退之).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말갈의 영역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죠? 그 동안 배운 역사에서는 말갈은 현재의 흑룡강변이나 하바로프스크에 있어야지 함경도나 평안도 남부에는 왜 나타나느냐 말이죠.

그래서 정약용 선생은 이를 두고 말갈이 아닌데 말갈로 잘못 사용했다고 하였습니다. 즉 동예(東濊)를 말갈로 착각하여 기록했다는 말이죠. 현대의 사학자들도 이런 견해를 수용하거나 아니면 말갈이 고구려의 속민 또는 식민지(부용국)이니 백제나 신라의 정벌에 말갈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고구려가 백제ㆍ신라와의 한창 전쟁 중이던 거의 1백여 년간 말갈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죠. 말갈병의 전투력이 대단하므로 이 때가 오히려 더 많은 말갈병이 필요할 터인데 나오지를 않고 있으니 더욱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말갈병들이 몽땅 증발한 듯이 말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이 분야의 전문가로 알려진 한규철 교수는 말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변경 피지배 주민들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초기에는 단순히 피지배계층(통치의 대상)으로만 보던 말갈을 후기에 갈수록 하나의 동일한 국가구성원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한규철 교수의 글을 직접 보시죠.

“고구려지배층들은 평소에는 변경의 피지배 주민들을 ‘촌사람’의 뜻을 갖는 ‘말갈’로 생각하다가, 삼국 항쟁의 위기 아래에서는 ‘고구려국인(高句麗國人)’에 그들을 포함하여 편제하였다는 것이다. … 고구려는 지방에 대한 통치력을 많이 상실하게 되어 지방 세력가의 발생을 초래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대외적으로는 당과의 관계에 있어 반독립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말갈’이라는 이름을 남기었고, 대내적으로는 도시의 지배층으로부터 다시금 ‘말갈’의 변방 사람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삼국사기』 편찬자는 598년부터 고구려 피지배 주민의 비칭이자 범칭인 ‘말갈’을 『수서』, 『구당서』등에서 다시 차용하여 썼다고 생각한다.[한규철, 『발해의 대외관계사』(신서원 : 1994) 제1장]”

즉 말갈이라는 것이 고구려의 주류 민족과 다른 민족이 아니라 고구려의 지방민들을 두루 일컬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래 전에는 역사 서술이 왕조 중심적이고 도시 중심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또 도시 사람과 시골(지방) 사람 및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차별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의 지방민을 그저 ‘말갈’로 불렀다는 얘깁니다. 몇 가지를 제외하면 상당히 타당한 지적이죠?

이같은 현상은 비단 고구려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죠. 『남사(南史)』에 따르면, “신라는 그 풍속에 성을‘건모라’라 하고, 읍은 안쪽에 있는 것을 ‘탁평’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을 ‘읍륵’이라 하는데, 역시 중국의 말로 군현이라는 것이다. 나라에는 6탁평과 52읍륵이 있다.(其俗呼城曰健牟羅, 其邑在內曰啄評, 在外曰邑勒, 亦中國之言郡縣也. 國有六啄評·五十二邑勒. :『南史』「列傳」)”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이란 신라어로는 잔머라[健牟羅(jianmuluo)]이고 그 성안을 쥬핀(啄評[zhuoping])으로 불렀으며 성 밖의 사람들을 일러서 이루(邑勒[yile])라고 하는데 이 말은 바로 읍루(挹婁)와 거의 같은 발음이 나타나고 있지요. 아직까지 정확한 의미를 고증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중앙민과는 달리 지방민을 비하한 표현으로 ‘읍루(아이누)같은 촌놈’ 정도로 생각됩니다.

이런 경우는 흔히 나타납니다. 즉 신라가 경주의 다른 이름으로 쓰이는 것이나 발해의 경우에도 국인(國人 : 나라사람들)이란 지배층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결국 우리는 흔히 발해인의 구성인 대부분이 말갈인이었다고 하는데 발해인들이 그 스스로를 말갈로 불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는 얘기죠.

다시 봅시다. 한국의 사학계가 흔히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고,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위의 논리대로 하면 결국은 ‘발해 = 고구려’라는 의미가 되지 않습니까? 발해의 지배층은 또 발해의 수도에 살겠지요? 그 수도에 사는 사람이 고구려인이죠? 그 나머지는 고구려 시대에나 발해시대에는 역시 말갈인이죠? 그래서 저는 발해라고 하지 말고 대고구려(대고려), 또는 후고구려(후고려)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죠.

사실 과거로 갈수록 관존민비(官尊民卑)뿐만 아니라 왕경(王京 : 수도), 즉 중앙과 지방의 격차는 매우 심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도시(都市), 즉 왕경을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겠죠? 가령 고구려(또는 발해)에서 평양(상경)을 중심으로 할 터이고 그러면 평양(상경) 이외의 지역은 ‘고구려’, 또는 다른 종류의 범칭(凡稱)이 필요하니 이것을 중국인들은 다소 욕설에 가까운 “버선발과 가죽신 입은 놈[말갈(靺鞨)]”이나 “기분 나쁜 놈[물길(勿吉)]”으로 불렀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가지는 뉘앙스는 한규철 교수의 지적대로 ‘(재수 더러운) 촌놈’에 가장 가까웠을 것입니다. 단 이러한 말들은 고구려(또는 발해)의 입장이 아니라 중국의 입장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한규철 교수가 간과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물길이라는 말 자체가 ‘촌놈’을 의미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물길이니 말갈이라는 말은 아무렇게나 나온 말은 아니고 범쥬신 지역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던 말, 즉 ‘와지’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이죠.

이 ‘와지’라는 말은 숲이나 삼림, 또는 ‘해 뜨는 곳[日出地]’이라는 쥬신에게는 다소 성스러운 삶의 터전, 또는 그 민족을 가리키는 말인데 한족(漢族 : 중국인)이 이것을 ‘재수 더러운 놈[勿吉]’이라는 욕설로 만든 것입니다. 기가 찰 일입니다.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새끼중국인’들이 더욱 가증스럽죠. 결국 물길(勿吉)이라는 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짱꼴라’, 또는 ‘코쟁이’ 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심한 욕설입니다.

중국의 입장에서 봅시다. 중국인들에게는 설령 고구려라는 거대 국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정책과 의사결정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은 왕경(수도)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근대적 국가와는 달리 수도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민, 즉 지방민이란 통치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 불과했던 것이니까요. 따라서 실제로 중국인들과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사람들은 왕경인들이라고 봐야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떤 말로 대충 부르게 됩니다. 그래서 한족(漢族)들은 고구려의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을 고구려인으로 판단하고 그들을 고구려인으로 부르지만 나머지 사람들을 대충 ‘말갈’로 비하하여 불렀다는 얘기죠.

그렇다면 이상하게 보였던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말갈’이라는 표현이 잘못되지 않았을 수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즉 말갈이 침입했다는 말은 고구려의 지방군이 공격했다는 말이 된다는 말이죠. 결국 고구려군이 침입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후에는 말갈병이 침입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군이 침입한 것이니 기록에 남을 리가 없는 것이죠. 한규철 교수의 지적처럼 중앙과 지방민의 인식변화라기보다는 아마도 통일전쟁이 가속화되고 치열해짐으로써 중앙과 지방 사이의 군사적 협력과 연계가 강화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생각됩니다. 그 결과 중앙과 지방민의 인식도 바뀐 것이겠죠. 즉 순서가 틀렸단 말입니다.

그리고 정약용 선생의 경우도 말갈을 너무 천한 오랑캐라는 편견을 가지고 이 문제를 분석했기 때문에 말갈이 백제를 침입했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던 것뿐입니다. 그렇군요. 천하의 석학(碩學)이라도 수천 년 동안 지나친 관념의 유리(羑里) 속에 갇히게 되면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이것은 단순히 국호(國號)에만 나타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과거에 노비(奴婢)도 그렇지요. 노비는 성(姓)이 없었고 이름도 단지 구별을 위한 것입니다. 요즘의 예를 들면 드라마 작가가 시나리오를 쓸 때 ‘행인 1’, ‘행인 2’, ‘포졸 1’, ‘포졸 2’ 등으로 엑스트라들은 그저 구별을 위한 말만 필요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큰눈이·분이· 끝딸이·분통이·섭섭이·점순이·돌이 등등이 그 예입니다. 근대 시대에 들어오기 전까지 일반인들은 성(姓)이 없이 살았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현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봉건 왕조체제와 유사한 북한을 보세요. 북한의 수도인 평양(平壤)은 아무나 거주할 수 없는 곳이 아닙니까? 그 뿐인가요? 남한도 서울(Seoul) 지역의 사람들은 은연중에 지방인들을 깔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울에서는 인구 4백만이 넘는 국제항구 부산(釜山)도 시골이라고 합니다(부산 사람들 들으면 사흘 정도는 밥을 먹지 못할 일이죠).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죠. 프랑스도 파리사람을 부르는 별칭이 있고 일본도 마찬가지지요.

***(4) 발해는 후고구려**

저는 앞에서 ‘발해 = 고구려’이니 발해라고 하지 말고 대고구려(대고려), 또는 후고구려(후고려)라고 해야 한다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시 봅시다.

숙신은 한나라 때에 이르면 ‘읍루’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사람의 모습은 부여와 비슷한데 언어는 고구려나 부여와는 다르다.”고 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삼국시대 말기의 기록에는 읍루가 또다시 숙신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三國志』「魏書」상도향공기). 이것은 앞에서 본대로 숙신이 읍루(아이누·길랴크 같은 고아시아족)라는 말이 아니라 읍루와 교류를 하는 극소수의 숙신(또는 옛 읍루지역에 사는 숙신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북위시대에 숙신은 물길(또는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중국과 교섭하고 있습니다(『魏書』「孝文帝紀」). 『신당서(新唐書)』에는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은 다시 발해에 종속된다고 합니다(『新唐書』「黑水靺鞨傳」). 이 때는 흑수말갈만이 따로 떨어져 존재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이들도 발해에 속하게 됩니다(『金史』本紀 1). 그런데 대부분의 중국 사서에는 발해는 말갈의 국가라고 하고 있죠.

제가 같거나 비슷한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많은 사서들이 같은 민족을 이리저리 부르고 있기 때문이죠. 간단히 보면 물길ㆍ말갈ㆍ숙신은 같은 민족의 다른 표현이며 이들이 고구려와 발해의 국민이었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발해 = 고구려’를 좀 복잡하게 표현한 것뿐이죠. 사실 뻔한 얘기인데 사학자들이 무슨 이유인지 너무 복잡하게 꼬아놓아서 일반인들의 접근을 못하게 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표현이 복잡하든 말든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은 ① 정치적 계승의식과 통치 영역의 면, ② 인적 구성의 면, ③ 문화적인 일체감 등에서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발해는 후고구려로 보는 편이 적당할 것입니다.

중국의 사서(史書)에도 도처에 “발해는 국토가 고구려와 일치하며 산물(産物)들도 고구려와 일치(『오대사(五代史) 』74 「고려전」)”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발해의 국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습을 그대로 간직했다”고 하고 (『속일본기(續日本記)』10 聖武天皇 新龜四年), “발해는 부여의 별종”이라고도 하고 있습니다(『武經總要』 前16 下).

『구당서(舊唐書)』나 『신당서(新唐書)』에서도 “발해의 풍속은 고구려와 거란과 같다”고 하고 있습니다(『신당서(新唐書)』219 「발해전」, 『구당서(舊唐書)』199 「발해말갈전」).『속일본기(續日本記)』에서는 발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스스로를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칭하면서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유지한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遺俗 : 續日本紀 권10)”라고 하여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합니다. 일본에서도 그를 고려국왕으로 칭하는 것으로 보아 ‘발해 = 고구려’라고 보는데 하등의 이론이 있기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발해의 시조 대조영은 고구려의 구장(新羅古記云 高麗舊將 祚榮姓大氏 : 『三國遺事』)이라는 기록이 있죠.

그리고 발해왕이 천손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니[『속일본기(續日本記)』권23]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발해는 그 스스로 고려라고 칭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측에서나 일본 측에서도 ‘발해 = 고구려’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발해가 정치 경제는 물론이고 그 문화나 사회전반에 걸친 이데올로기까지도 고구려를 완벽히 계승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대등하게 발해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국왕의 묘호를 제정하였다는 점에서 쥬신의 역사에 큰 중요성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발해를 발해로 부르기보다는 후고구려(후고려, 또는 대고려)라고 부르는 편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림 ④] 발해

그리고 발해는 아예 ‘발해 말갈’로도 지칭이 되는 나라입니다[『구오대사(舊五代史)』,『오대회요(五代會要)』,『구당서(舊唐書)』,『삼국사기(三國史記)』]. 또 “발해는 본래 말갈(靺鞨)이라고 불렀는데 고려(高麗 : 고구려)의 별종(『五代史』74 「高麗傳」)”, “발해 말갈은 본래 고려종(高麗種)(『五代會要』30 「渤海」)”, “고려의 별종인 대조영(大祚榮)(『자치통감(資治通鑑)』210)”이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기존 한국 사학계의 여러 저명한 선생님들처럼 고구려인과 말갈인이 제대로 구별이 됩니까?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들을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통(正統) 사학도(史學徒)가 못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 사료를 종합해보아도 그 민족이 그 민족입니다. 즉 예맥 - 조선 - 숙신 - 물길 - 말갈 - 고구려 - 발해 - 거란 등의 민족들이 모두 하나의 범주로 포괄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당시의 발해에 대하여 북적(北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중국인들이 사방의 오랑캐를 부를 때 동이(東夷)와 북적(北狄)은 완전히 다른 듯이 말하곤 했지요.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발해를 북적(北狄), 또는 적국인(狄國人)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자기들도 동쪽 오랑캐인 주제에 참으로 딱하기도 합니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들이 임의로 쓴 말은 아닐 것이니 북적과 고구려․부여․읍루 등을 지칭하는 동이(東夷)와의 차이를 찾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쉽게 말해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동이(東夷)를 북적(北狄)으로 같이 부르고 있으니 그것이 구별이 되겠는가 말입니다.

참고로 한 마디만 더 합시다. 중국에서는 발해를 자기의 지방정권으로 중국사의 일부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니지요.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발해 - 통일신라사이에는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정신적 흐름이 분명히 발견됩니다.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발해를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명백히 지칭하고 있습니다(『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권37 지리지). 아마 이 당시까지만 해도 상당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통일신라가 발해에 대하여 북조(北朝)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 북쪽을 북한(北韓)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즉 통일신라는 발해와 현재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同族) 전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있다는 말이죠.

이상의 분석을 토대로 보면 숙신과 그의 다른 이름인 물길과 말갈은 만주 지역에 광범위하게 거주했던 사람들의 총칭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예맥이라는 말이 없어진 자리에 숙신ㆍ물길ㆍ말갈 등의 명칭들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예맥은 소멸하고 물길이나 말갈이 성장한 것이 아니라 그 민족이 그 민족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맥과 숙신ㆍ동호는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이들은 요동ㆍ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끝없이 뭉치고 흩어진 하나의 역사 공동체이자 문화공동체라는 말이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쥬신의 뿌리를 찾아서 긴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예맥 - 동호 - 숙신 등에 이르는 민족에 대한 분석을 마쳤습니다. 쉽게 말하면 쥬신의 뿌리에 대한 총론(總論)을 마친 셈이지요. 동아시아 고대사의 영역 가운데 가장 어렵고 지루한 부분이 마무리된 것이지요. 필자의 입장에서는 내용 자체가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아무리 재미있게 쓰려고 해도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음 장부터는 쥬신의 보다 재미있고 역동적이면서 구체적인 모습들을 찾아갑니다. 즉 쥬신의 신화(神話)와 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몽골ㆍ금ㆍ일본 등 구체적인 나라들이 쥬신의 역사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하는 점들을 살펴봅니다. 여기서는 고구려는 물론, 백제와 일본의 건국과정, 몽골과 금의 건국과 역사를 쥬신의 관점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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